3개 전부 별개의 이야기에요
어둠 속을 밝혀줘 (재업) |
- 그렇게 스스로 불쌍해하며 살고 싶으면. 쓰레기에 계속 처박고 살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까만 정적이 이어졌다. 따가운 눈가와 볼을 손으로 비벼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쓰레기더미에 고개를 처박고 있느라 피곤해진 몸이 느껴질 뿐이었다. 3평 남짓한 방임에도 불구하고 재환이 떠난 헛헛함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게 우스워 다시 웃었다. 무거운 몸으로 한참을 웃다 보니 눈이 감겨왔다. 시야가 캄캄해질수록 정신은 또렷해졌다. 더럽고 추한 골목에 늘어져 있는 싸구려 조명처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 내버려 둬.
정말로 혼자 있고 싶어서, 스스로를 더 구렁텅이로 내쫓고 싶어서 뱉은 말이 아니었다. 이 좁은 방에서 뒤돌아간 재환이 정말로 저를 내버려 두려던 것이 아닌 것처럼.
곧 남자가 집에 돌아올 시간이었으며, 그가 재환과 마주치면 모든 화가 제게 돌아올 것을 재환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뺨을 내리치고 급하게 집을 나선 것이다. 그까짓 손찌검 한 번쯤은 아프지도 않았다. 처음 재환의 커다란 손이 예고없이 얼굴 전체를 내리쳤을 땐 정신도 못 차릴 만큼 큰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고 끅끅 숨을 들이켰지만, 한참 의식이 아득해졌을 때야 그것이 잠들지 말라는 뜻임을 알아챘다. 잠에 취해있는 동안 남자가 들어오면 더 낭패였다. 내가 우습냐는 등의 고함과 함께 몇 배로 심한 폭행을 겪어야 했기 때문에.
재환이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그 답은 고민할 것도 없이 금방 나왔다. 이 좁은 방 한칸에 방음이 될 리 없었다.
누가 그딴 식으로 위해주라고 했어? 너 없이도 충분히 잘 지내고 있었어.
알람시계처럼 녹슨 쇳소리가 끼이익 울려퍼졌다. 진한 알코올 향을 지닌 익숙한 인영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하다. 한두 번도 아닌 3년이다. 충분히 잘 지내고 있었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나름대로 아프지 않게 맞는 방법을 터득했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빌어야 남자의 마음이 그나마 누그러지도 파악했다.
- 아비가 왔는데, 일어나지도 않고. 씨발 년, 염치도 없는 년.
그 삼년으로 어렵사리 적응한 몸이 고작 한달의 호의로 무너져내린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투박하게 뺨을 내리치는 손, 사실은 그게 어쩔 줄 몰라하는 조심스러운 손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쓰레기더미에서 머리를 박고 비참하게 빌빌 기며 사는 자신을 소중하게 대해준다는 그 사실만으로, 당연하다는 듯 겪어왔던 모든 일이 미친 듯이 억울해졌다. 뛰쳐나가고 싶었다. 이 순간에도 그런 충동이 일었다. 재환의 도움이 계속될수록 그것이 더 자신을 몰아세웠다. 어차피, 무기력하게 발버둥질해 봤자 벗어날 수 없는 방이었다.
그런데 자꾸, 혹시나, 라는 지리멸렬한 기대가 자라난다.
내버려 둬.
- 이거 좀 놔 봐. 씨발, 진짜... 너 맞으라고 온 거 아니라고. 병신아.
어차피 쓰레기나 다름없는 내가 다 겪도록 내버려 두지 그랬어. 내가 정말 쓰레기인 줄만 알고 있도록. 억지로 저를 떼어낸 재환이 남자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재환이 벽에 머리를 박고 구석에 쓰러진다. 한참을 발길질하던 남자가 바닥에 침을 퉤 뱉더니 좁은 방을 나섰다. 겨우 한 번의 순간이 지났다.
재환이 숨을 삼키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헝크러진 머리칼과 피가 터진 입술. 구겨진 교복, 더러워진 신발. 깨끗하지 못한 그 모습이
- 그러니까... - ...... - 내버려 두라고 했잖아. - 웃기지 마. - ...... - 너 나한테 도와달라고 했어.
어떤 화려한 빛보다 예쁘게 빛났다.
-
- 이재환. - ...... - 내가 왜 좋아? - 안 좋아
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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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줘 (재업) |
얼룩이 묻었다.
그 쯤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쫓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굉장히 힘들 테니까. 자라기 시작하는 이 감정의 싹을 미리 잘라내기로 한 것이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고, 괜히 한번 더 바라보게 되는, 본능에 가까운 행동들은 굳이 막지 않았다. 막으려고 해 봤자 그럴수록 반항심처럼 커지기만 할 애정에 대한 욕망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다른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웃고 있으면, 이재환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그 들어간 무리에서 의외로 괜찮은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녀석과 반대쪽의 무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다행이었다.
착하고, 어쩌면 이재환보다 더 잘생겼으며, 날 아껴주는 사람이 거짓말처럼 존재했으니까. 접으면 된다. 이렇게. 아무런 감정도 싹트지 않았던 것처럼.
그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사랑이 주는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그것이 너무나 큰 행복을 준다는 점이다.
좋아할 사람이.
그 소망을 깨고 뜨거워 화상이라도 입을 것 같은 체온이 손목에 닿는다. 손목을 한 손에 쥐고도 두 마디가 남는 커다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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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거짓말을 해줘 |
그 날. 일기예보엔 폭설주의보가 내렸지만 이곳엔 비가 내렸다. 하교할 때쯤 쏴아아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짙은 색깔로 물들어진 신발을 현관 밖에 버리듯 던져두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빗소리는 굵어져 투둑, 투둑, 끊어지는 소릴 내며 시끄럽게 집안에 스며들었다. 몸에 달라붙은 셔츠가 찝찝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그 빗소리 속에 현관문을 두드리는 작은 소음이 섞여있는 것 같았다. 짜증스레 옷을 벗어내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구었다.
혼자 하교하기 시작한 지 한달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내온 가족 같은 네가, 우는 얼굴로 고백한 지도 딱 한달 째였다. 미워하지만은 말라고 했었다. 너에게 가장 두려웠던 건 좋아하는 나의 혐오스러운 얼굴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난 싫었다. 친구라고 믿고 해왔던 행동들이 녀석에겐 설렘으로 다가갔을 생각에 구역질이 나기도 했다. 무의식중에 했던 포옹이나 짖궃은 장난까지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네 감정을 내게 평생 숨겨왔다면 너를 그렇게 무시하고 모욕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잊고 싶은 기억일수록 또렷하게 남는 법이었다. 기억이라는 게 우스워서, 자주 꺼내는 기억일수록 제멋대로 왜곡되고 뒤틀렸다. 눈을 감고 생각해낼 때마다 미묘하게 균열이 생기는 머릿속, 게다가 배신감으로 가득찬 너에 대한 기억이 온전하다는 것은, 나에게 신기한 일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지금 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진실과는 먼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세게 들려왔다. 아니, 들릴 듯 말 듯 작게 들려왔었던가. 애써 무시하며 TV의 볼륨을 높였다. 방금 씻고 나왔는데도 눅눅한 집안 공기 때문에 그다지 상쾌하다, 는 기분은 들지 않았었다. 쾅쾅. 쾅쾅쾅. 두드리는 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천천히. 아프도록. 평소 같았으면 한두 번 문을 두드리다가 발걸음을 옮겼을 네가 그날따라 달랐다. 씨발, 그렇게 중얼거리며 결국 문을 벌컥 열었다.
- 재환아.
이상하다는 건 진작에 느끼고 있었다. 학교에서 너를 대하던 녀석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것도, 웃지 않는 순간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생글생글하던 너의 얼굴이 언젠가부터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것도. 그리고 체육관 뒷편에서 안쓰럽게 맞고 있던 쓰러진 뒷모습도. 뒤를 돌아보려는 네가 무서워서, 도망친 나도.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짙은 눈썹이 조금씩 비쳤다. 헬쓱해진 볼에는 흘러내리는 빗물과 다닥다닥 달라붙은 모래 알갱이가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돌에 긁혔는지 옅은 핏자국도 이곳저곳에 나 있었다. 녀석의 눈을 마주볼 자신이 없었다. 울긋불긋한 목과 어깨에서 시선을 내렸다. 와이셔츠가 너덜너덜했다. 속옷의 끈은 팔뚝으로 흘러내린 채. 지저분한 흙탕물에 젖은 교복치마는 너덜너덜하게 구겨져 있었다.
시선을 올려 너를 바라보았다.
- 나 좀 살려줘. - ....... - 도와줘. - ....... - 미워하지 마.
동그랗게 자리잡고 있던 동공이, 반쯤 감긴 눈꺼풀 사이로 빛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말로 설명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감정이 밀려왔다. 사실 지금도, 그때 느꼈던 가슴의 답답함을 종종 느낀다. 그리고 여전히 설명할 수 없다. 화가 났다, 왜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다. 알게 되면 난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그 화가 너를 향해 있었다는 것도 확신할 수 없다. 무작정 어깨를 꽉 붙잡았다. 머리카락에서 줄줄 흐르는 빗물과 함께 너의 눈물도 둑이 터지듯 흘러넘쳤다. 울고 있다, 고 알게 된 것은 다음에 이어진 너의 말이 엉망으로 떨렸기 때문이었다.
- 미안해. 이제 안 좋아할게.
너는 믿지 않겠지만, 그동안 쌓아왔던 추억까지 매장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 그러니까 나 좀 - 더러우니까 꺼져.
쓰레기더미에 스친 손을 털어내듯 네 어깨를 잡았던 손을 바지에 슥슥 닦아냈다. 애써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던 네가, 점점 참기 힘들었던지 소리내어 흐느꼈다. 파란 입술을 깨물며 최대한 울음소리를 참아내는 너를 보며 나는 다시 화가 치밀었었다. 아니, 이렇게 매몰차게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모른 척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다정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문이 닫혔다. 빗소리도 잦아들었다. 터벅터벅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쥐었다. 리모컨을 쥐고 있었으나 눈은 닫힌 창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너는 비 오는 날을 유난히 좋아했다. 질척질척하고 축구도 못하는데 뭐가 좋냐, 고 퉁명스레 말하던 나에게 너는 막힌 입꼬리를 올리며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좋아했다. 좋아했는데, 너는. 다음 날 교실에는 백합 한 송이가 너의 자리를 대신했다. 자살했대, 욕조에서 손목 긋고. 간만에 관심거리가 생겼다는 듯 주절거리는 들뜬 목소리들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함께 지냈던 친구가 죽었다는 것에 대한 반응이 고작 그 정도였다. 사람이 한 순간에 변하냐고, 나는 욕할 자격이 없었다. 울고 싶었다.
미안해, 너를 좋아했어
뜨끈한 핏물이 물을 가득 담은 욕조에 차오르기 시작한다. 빌어먹을 핏줄. 너는 몰랐던 너와 나 사이의 유일한 공통점. 그 날처럼 네가 좋아하던 비가 내린다. 지금도 네가 비 오는 날을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새 늘어지던 몸이 마음대로 가누어지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 너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나도 몰랐다면 우린 웃을 수 있었을까. 염치없는 거 알지만 우리 만나면, 한 번만 웃어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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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줘 라는 제목으로 종종 올라올거구
켄시리즈입니다 ㅇㄴ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