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으……. 속쓰려"
쓰린 속을 붙잡고 일어난 세 여성들은 초토화된 거실의 관경에 기함했다. 사람들은 쓰레기처럼 나부러져 있었고, 초록색병, 갈색병들이 일렬로 주욱 라인업 되있었다. 먹다 만 안주들이 굴러다녔고, 밤 새 얼마나 달렸는지 술냄새가 진동했다. 쓰러져있는 전우들을 건너뛰다 못해 밟고 전진한 여성들은 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다. 셋중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는 예인이 결정을 내렸다. 우선 거실에 쓰러져있는 성열과 명수, 성종과 호원을 발로차며 깨웠다.
셋은 마치 죽다살아난 좀비처럼 일어났다. 부시시한 머리와 부은눈에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수가 없었다. 세 일꾼들에게 우선 떨어져있는 안주들을 치우라고 명령했다. 그사이에 유정과 인혜는 각각 동우, 성규와 우현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 깨우기 시작했다. 동우는 그나마 이 일곱장정들중 멀쩡한 모습을 보이며 일어났다. 성규와 우현의 방에서는 성규가 혼자 이불을 다 차지하고 있고 우현은 저 멀찍이 구석에서 새우잠을 청하고 있었다. 모두 흔들어 깨운 여성들은 거실을 어지른 죄로 남자들을 부려먹기 일수였다.
***
유정의 부름에 일어난 동우는 생생히 떠오르는 어제 일에 안색이 창백했다. 꿈이 아니었다. 거실에 나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안나갈수도 없고. 이도저도 못하는 동우를 유정이 질질끌고 나갔다. 동우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어제 필름이 끊겼을거야' 하고 자신을 안심시키기도 했다. 고개를 들었을때, 호원은 막 일어나 소주병들을 밖으로 치우고 있던 중이었다. 동우는 호원이 나가는 사이에 후다닥 달려가 바닥에 떨어진 땅콩들을 주웠다.
다시 호원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동우의 몸이 경직되었다. 땅콩을 줍던 손이 멈칫했고,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흐르는것같았다. 정적이 흐르는 동우만의 세계를 깬것은 인기척이었다. 뒤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땅에 코를 박듯이 한 동우는 뒤를 힐끔 돌아봤다. 호원이 이쪽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놀란 마음에 그만 소리치고 말았다.
"뭐, 뭐하는거야!"
모두의 이목이 호원과 동우쪽으로 집중되었다. 호원은 깜짝 놀란 듯 했고, 다른 사람들도 쟤가 갑자기 왜저래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동우는 입을 땔 수가 없었다. 호원이 동우의 옆쪽으로 손을 옮겨 병을 줍어갔기 때문이었다. 장동우가 병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호원의 등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뒤돌아 보지 않았다.
"장동우 미쳤냐?"
성열이 동우의 팔꿈치를 툭툭 치며 물었다. 동우는 아주 울상이었다. 오해를 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정작 상대방인 호원은 아무렇지 않아보였지만. 어제 일때문에 호원의 작은 행동하나 하나가 신경쓰였다. 조금만 다가오려 해도 화들짝 놀래고, 과민반응했다. 동우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성열이 불쌍한 이호원, 또라이 장동우한테 잘못걸려서. 쯧쯧-하는 소리는 동우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
일박 이일의 짧았던 엠티가 끝이 났다. 이번 엠티의 결과 호원과 동우사이에 알수 없는 벽이 하나 더 생긴 느낌이었다. 애초에 성규와 예인이 말했던 MT의 의미는 무슨. 이젠 다른사람들에게도 확실히 티가 났다. 둘이 어색한 사이라는것이. 그리고 전보다 더 어색해졌다는 것이. 그날 아침의 동우의 행동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 엠티 이후 동우는 이날만 생각하면 침대에서 하이킥을 할 정도였다.
호원은 아무렇지 않아했지만, 과에 이 사건이 퍼지자마자 몇몇 동기들이 작전을 짰다. 이호원 장동우 화해시키기 작전. 물론 둘이 싸운것은 아니나, 아마 다른 사람들은 둘이 전날 밤 싸웠다고 오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도 안되는 타이틀이 붙은 것이고. 이작전은 비밀리에 실행되었다. 성열이 호원에게 연락하고, 명수가 동우에게 연락하여 둘을 한자리에서 만나게 하자는것. 이것이 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그 결과, 동우와 호원, 성열과 명수는 막창집에서 모였다. 성열과 명수는 서로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 받고 있었고 호원과 동우는 이 상황이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둘만 만나는 줄 알고 이었다. 그런데 네명이라니……? 이게 무슨상황인가. 갑자기 성열과 명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둘을 올려다본 동우와 호원은 의문의 눈빛을 보냈다.
"자, 잠깐, 과제 까먹은게 있어서"
어색한 거짓말을 늘어놓은 둘은 빠르게 줄행랑 쳤다. 가게안에 흐르는 어색한 기류에 괜히 막창만 뒤집는 동우였다. 호원은 그런 동우가 뒤집는 막창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자리에서 그냥 간다면 둘의 사이가 더 서먹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애초에 친했던 사이도 아닌데 막창을 먹으면서 도란도란 얘기 할수도 없었다. 결국 동우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저, 저기 호원아"
호원이 고기를 보다 말고 동우의 눈을 쳐다보았다. 강렬한 호원의 눈빛에 순간 눈을 깔뻔한 동우는 겨우 눈에 힘을 주었다. 엠티날 밤, 술마시고 했던 호원의 행동을 묻고 싶었다. 호원이 기억을 할까 모르겠다. 결국 앞에 있는 소주를 홀짝거리며 두루뭉실하게 묻는 동우였다.
"너 혹시 엠티 첫날 밤에 있었던일 기억나?"
호원이 따라져있던 소주를 원샷했다. 동우의 물음에 대답을 할듯 말듯했다. 동우는 호원의 대답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호원이 무슨일,하고 반문했다. 그에 호원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확신한 동우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호원은 계속 동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워나아-"
술도 못하는게 무슨 술을 마셔서, 호원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동우를 업고 걷고 있었다. 가볍지 않은 무게에 질질 내려가는 동우를 고쳐 업은 호원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솔직히 그날 밤 일이 모두 기억이 났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일어난 아침에 파노라마 처럼 스쳐간 기억들이 호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동우에게 미안함은 없었다. 남자랑 키스했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없었다. 그저 술에 취한 밤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과 키스를 했고, 그게 장동우였을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좋았다. 키스를 처음해보는 서투른 느낌이 좋았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호원과는 다르게 동우는 마음에 다 담고 있었나보다. 성열과 명수가 마련해준 자리에서 그날 밤 일을 묻는 동우에게 뭐라고 대답해줘야할지 모르겠었다. 기억난다고 하면 오히려 동우와의 사이가 더 멀어질것만 같았다. 자리를 주선해준 성열과 명수가 불쌍해서, 그리고 타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그럴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기억나지 않는다고 시치미 때는 건 호원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결국 돌려서 대답해준거였는데 동우는 안심하는 듯했다.
***
동우를 업고 거리를 활보하던 중 자신의 바지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업고잇던 동우를 잠시 담에 기대어 놓았다. 동우는 벽에 기대어 헤롱 대고 있었다. 그런 동우를 보고 귀엽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은 호원은 재촉하듯 울리는 벨소리에 냉큼 전화를 받았다.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애교가 잔뜩 담긴 목소리였다.
[선배, 동우선배랑은 잘 해결 됬어요?]
애초에 싸운 적도 없는데 잘해결될게 무엇이 있나. 그러나 대충 응,응 대답을 한 호원이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동우를 바라봤다. 동우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동우의 앞에 자신도 쭈구려 앉았다. 눈높이가 맞자 동우가 호원은 풀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유정과 동우사이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전화기 너머 유정과 눈앞의 동우사이에서 왔다갔다 했다. 마침 유정이 질리는 차였다. 동우와 잘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급히 유정과의 전화를 끊고 동우를 들어올렸다. 벽에 기대게 만든후 넘어지려는 다리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급히 끼어넣었다.
동우가 왜에-하며 칭얼거렸다. 호원이 그런 동우의 목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 쉬었다. 동우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경직되고, 자신의 셔츠 자락을 잡는것도 느껴졌다. 동우의 살냄새가 호원안의 본능을 자극했다. 동우가 움찔거렸다. 그런동우의 팔을 움켜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동우의 뒤통수를 잡아 끌었다. 그리고, 그대로 입맞췄다.
어떻게 되는 상관없다. 동우가 노멀이든 게이이든, 호원 자신은 바이였다. 유정과 정리하고 동우와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새끼라고 욕해도 상관없다. 괜한 욕심이 드는 순간이었다. 골목길에서의 키스는 꽤 오래 갔던 것 같다.
키스를 끝내고 굳은 동우를 업은 뒤 동우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침대에 눕힌뒤 조용히 집을 나갔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동우의 집에서 나온 호원은 곧바로 유정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불과 몇십분 전까지만 해도 아무일 없이 통화를 하던 둘이었건만……. 갑작스런 이별통보에 유정은 호원에게 전화를했다. 호원은 전화를 피하지 않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나오는 유정의 음성은 못믿겠다, 장난하는거 아니냐 고 호원에게 다그쳤다. 이래서 여자들이 싫다니깐……. 호원은 최대한 유정에게 좋게 좋게 얘기했다. 내가 너에게 부족한 남자인것 같다. 더 좋은 남자 만나라. 그동안에 만났던 여자들에게 했던 진부한 이별 통보였다. 유정은 끝내 울먹였고 호원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미련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 후, 몇번 유정에게 문자도 왔지만 보지 않았다. 불보듯 뻔한 내용일 것이다. 내가 미안하다. 잘못했다. 다시생각해주면 안되겠느냐. 유정에게 온 문자를 지웠다. 이제 유정과의 게임은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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