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왜 둘이서만 왔어, 그렇고 그런 사이야?"
"아, 아닌 거 알면서 왜 그래요?" "으하하하학" 김동현이 나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격하게 부정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떨림, 설렘을 단 한순간도 느껴본 적 없는-똥 냄새도 공유하는- 부랄 친구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나는 옹성우 선배가 있는 이 자리에 끼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김동현이 전에 옹성우 선배랑 왔던 고깃집 볶음밥이 너무 맛있다고 생떼를 쓰길래 오게 됐고, 앉을 자리가 없어 나가려던 참이었다. 우리를 부르는 방정맞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눈치 채자마자 도망갔어야했는데, 사준다는 꼬심에 넘어가버렸지(나말고 얘가) 옹성우 선배는 낯가리는 사람한테도 만만한 그런 존재였다. 왜냐면 진짜로 만만하거든. 특히 여자한테는 더 만만하다. 그래서 같이 있으면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뭐 나쁘지 않았다. 또라이 같은 구석이 웃길 때가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 앞에 앉아있던 사람이 문제였다. "영민이 형, 어떻게 둘이서만 있었어요? 아, 벌써 피곤해."
평소에 잘생겨서 들이대보고 싶었는데, 잘생긴 사람한테는 말을 못 거는 병에 걸린지라 인사만 하는 사이인 임영민 선배가 있었단 말이지. 심지어 그 인사마저 선배 혼자 있을 땐 못하고 옆에 옹성우 선배나 김태민 선배처럼 친근(만만)한 선배가 있어야지만 가능했다. 남초 과인 우리 과가 소문난 꽃밭이어도 난 그 누구에게도 추파를 던진 적이 없다. 사실 어차피 날 봐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서 일찍이 관심을 접었더랬지.. 그리고 얼굴이 다가 아니라는 게 벌써 과 간판인 옹성우선배한테서 드러나고, 그를 이어 15학번, 16학번, 17학번, 모두가, 전부가, 다! 그랬다. 그 중에서도 정상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임영민 선배이올시다. 나이 차이도 꽤 나지만 그 나잇값을 너무도 잘했다. 신중하고, 배려심 넘치고, 똑똑해! 솔직히 마음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 말고도 아마 꽤 좋아할 거다. 또 내가 환장하는 귀여운 얼굴상을 하고 있으니, 덕질하기 최고였다. 물론.. 덕질할 거라곤 가끔 옹성우 선배의 페북에 뜨는 사진이 다였지만.. 원래 옹성우 선배 앞자리에 앉으려했는데 (둘이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김동현이 들어가라고 눈치 없게 굴어서 이 추한 몰골로 영민 선배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빡세게 화장하고 오는 건데... 망할.. 옹선배와 김동현의 취중회담에 끼지 못하고 조용히 술잔만 홀짝이던 선배가 나를 힐끗 쳐다봤다.
"술 못 마시면 콜라나 사이다 시켜줄까?" 따흐흑.. 심장 아파. "형, 얘 술고래에요. 저보다 잘 마셔요." "역시 좀 마시게 생겼다했더니." "뭐래. 선배는 아닌 거 알면서 왜 거들어요?" 사실 난 평균 여자보다 많은 주량을 갖고 있지만-김동현과 옹선배는 알고 있지만-, 일단은 아닌 척 해야지. 잠깐동안 넷이서 얘기하다가 또 김씨와 옹씨 둘만의 취중회담-주제는 게임-이 이어졌다. 이번에도 영민선배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 이 선배 자꾸 사람 떨리게 하시네. "근데 여기 남자만 많은데 왜 오게 됐어? 동현이랑 같이 온 거야?" "절대 아니에요! 쟤가 저 따라온 거죠. 그냥 괜찮아 보여서 왔는데.. 옹성우 선배 같은 사람이 있는 줄 알았으면.." "어? 나 뭐?" 옹선배가 취해서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니에요. 하던 얘기 계속 하세요."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영민 선배에게 속삭였다. "절대 안 왔죠."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아, 잘생겼다. 선배의 잘생긴 얼굴에 자꾸 헤실헤실 웃음이 삐져나왔다. 잔뜩 취기가 오른 듯 했다. "근데 선배 있어서 괜찮아요." "응?" "선배는 성격도 좋은데..." "겁내 잘생겼잖아여.."
갑작스러운 내 말에 선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습하기엔 이미 늦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버렸다. 김동현이 우리가 조용해지자 훽 고개를 돌려 나와 영민 선배를 번갈아 쳐다봤다. "영민이 형 취했나보다. 얼굴 빨간 거 보니까. 쟤는.. 그냥 맛이 갔고.." "쟤 잘 안 취하는데 웬일이래. 오늘 2차는 못 하겠다." "우리 둘이서 해요" "쟤 삐치면?" "아 그런 걸로 삐치는 사람 형 밖에 없어요." "그르냐?" 식탁에 반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야, 그럼 나는 누구랑 가!" "알아서 가." 저, 저, 못된 놈. "선배, 쟤 진짜 싸가지 없죠? 맨날 집 같이 가는데 자기 놀고 싶을 때는 막 이렇게 버린다요?" 내가 잔뜩 취한 말투로 칭얼거리자 선배가 예쁘게 웃었다. 아, 웃는 거 엄청 귀엽네.
"내가 데려다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