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물 요소가 들어간 글입니다.
취향에 맞지 않거나 예민하신 분들은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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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나를 기다리면서 무얼 하면 좋을까요
떨어지라면 떨어질게요
바닥에 물이 되라 하면 할게요
반짝반짝, 영감이 되어줄게요
남학생, 주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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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날 마주친,
남학생
男學生
구상/글
RESCUE
1.
서울 집에서 요양 차 옮겨 온 지 이틀 겨우 되던 날, 나들이랍시고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발견한 이후 혼자만의 아지트로 삼았던 곳이 있었다. 우선 우리 집 대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정확히 눈을 감고 200걸음을 걷는다. 그러면 이어서 짧은 자갈길이 나온다. 어디선가부터 시작된 시냇물길을 따라 졸졸졸, 산새소리를 들으며 200걸음을 걷고 살포시 감은 눈을 뜨면-
투명한 맑은 물이 아름다운, 매우 커다랗고 사람이 하나 없어서 웅장하기까지 한 나만의 커다란 호수가 내 눈 가득히 담긴다.
그곳에서 나는 항상 주위의 동물들을 벗삼아 놀며 물에 발을 담그고 놀곤 했었는데, 그 곳에만 가면 기분이 참 좋아져서 항상 남동생과 삼촌 몰래 오가며 매일 하루의 시작을 그 숲에서 시작했다. 시골은 마냥 싫었는데, 이런 맛에 시골 사나. 아침마다 나를 깨우는 일이 커다란 고역이라던 삼촌도 늦잠을 자는 내 버릇이 고쳐졌다며 신기해했다.
2.
그러던 어느 날은 일이 생겨서, 왠일로 평소보다 조금 늦게 갔던 적이 있었다. 쩍- 하품을 하며 눈을 감고 평소와 같이 이백 걸음을 세고 낯익은 샘물 소리와 새소리에 이백! 하고 눈을 떴는데,
...오늘은 웬 남자애 하나가 그 호숫가 안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어....
평소와는 다른 광경에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잠시 서 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는데, 쟨 또 누구야? 혹시 쟤도 여기가 아지트인 거 아냐? 처음부터 내 것도 아니었는데, 유치하게 괜히 뺏긴 느낌이 들었다. 이어 발걸음을 옮기다가 바위 아래에 깔려있던 교복을 발로 건들었는지, 사박사박. 와이셔츠 특유의 소재 소리가 났다.
아, 고딩이었구나. 부럽다, 어리고.
혹여나 그 아이가 볼까 봐 바위 뒤에 조심히 몸을 수그려 앉아 몇 뼘 떨어져 있는 교복을 구경했다. 아무 장식도 없이 그저 새하얀 게, 까만 피부의 저 애와 왠지 상반되면서도 잘 어울렸다. 살금살금 눈치를 보며 다가가 옷을 집어들어서 여기저기 뒤집어 보다가 명찰과 다른 색으로 삐뚤빼뚤하게 달려 있는 천으로 된 명찰을 발견했다. 투박한 손으로 직접 손바느질로 했나 본지, 내가 잘 해줄 수 있는 입장도 아닌데 괜히 다시 해주고 싶을 만큼 달랑달랑 달려 있는 모습이 조금 서툴어 보였다.
그와 반대로 이름은 정갈하다. 딱 남자같은 이름. 소년 냄새가 나는 이름. 입으로 조곤조곤, 한 번 읊어 본다.
-박, 우진.
미쳤어. 괜시리, 마음이 설레었다.
3.
이름을 알게 되니 그 다음은 얼굴이 궁금해 못 참을 지경이었다. 바위 틈에서 살짝 나와 몸은 아직 숙인 채로 작은 발걸음을 내딛었다. 고개를 쭉 빼 얼굴을 흘깃 훔쳐보고 있는 폼이 여간 우스운 게 아니다. 서울에선 그래도 부잣집 딸이라고 고개 빳빳이 들고 다녔는데, 지금은 이름 하나 아는 학생 앞에서 쩔쩔매는 폼이. 아휴. 동생이 보면 배꼽이 빠지도록 웃을 것이다. 어, 잠깐만... 그 애가 안 보였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한 사이 어디론가 사라진 건지, 고개를 들었더니 아까 그 곳에 없었다. 방금까지 분명 저기에 있었는데. 왜 안 보이는...
-찾았다.
-누구...히익!
분명 아까까지 물 속에 있던 애가, 왜 내 앞에? 그것도 위, 위에 아무것도 안 걸치고!
-저..저기!
남학생은 말은 않고 날 응시한다.
-옷, 옷 좀 입는 게..
-교복.
-교복.
-.......네?
-교복을 줘야 내 입을 거 아이가.
...아. 아까 들고 있던 교복 와이셔츠가 아직 내 손에 들려 있었다. 순간 얼굴에 화악 몰리는 열이 느껴져,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옷을 건넸다. 괜히 먼 산을 쳐다보면서. 웬 이상한 여자가 나타나서 옷을 훔쳐갈 기세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게다가 옷까지 안 줬으면서 옷을 입으라 윽박을 질렀으니 말 다 했지. 학생은 날 미친 아줌마로 봤을 것이 틀림없다. 고딩에게 혼나다니...얼이 빠져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계속 그러고 있다가, 또 혼났다. 변태라고.
-변태, 남 옷 입는데 대놓고 꼬나보고.
아, 안 봤어요! 그래도 계속 눈을 피해 가며 억울함을 토로하던 동시에 원피스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고 비켜가기 위해 옆으로 한 발자국을 옮겼는데, 어어.
-어어어...!
풍덩. 호수 밑으로 빠져 버린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고, 심한 천식에, 수영을 전혀 할 줄 모르는 나에게는 그만큼 무서운 곳이 없었다. 어렸을 때 겪었던 몇 번의 크고 작은 수술들과 호기심에 동생과 들어갔다가 무서워서 밤을 새었던 귀신의 집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찔했다.
-.....으으.
팔을 최대한 크게 휘적여 위로 올라가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게 뭐야.. 이렇게 어이없이 죽나 싶어 물속에서 입을 다물고 속으로 소리를 쳤다. 소리가 안 나서, 괜히 더 입을 꾹 다물고 눈은 꼭 감은 상태로 더 크게 울었다.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몸이 가라앉는 것을 느낀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삼촌,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아 미안하다. 나 먼저 갈...
4.
꿈을 꾸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내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아 주는 꿈. 정신을 차리자 서서히 꼭 감은 눈꺼풀 사이사이로 밝은 색이 보였다. 물에 빠져 죽은 것치고는 너무 편안한 느낌에 내가 드디어 천국에 온 건가 싶어 눈을 떴다. 그러나 다행히 천국은 아니고 얕은 물가였다. 전과 같은 풍경에, 내가 잠시 물에 빠져 기절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맞다. 나 물에 빠졌었지.
숨을 참다가 한꺼번에 쉬려니까 머리가 핑 돌았다. 에구구, 돈다 돌아. 그 때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힘없이 고개를 들어 누군가 봤더니, 아까 그 남학생이었다.
-괜, 괜찮나 니.
-......
-와, 내는 진짜로 죽은 줄 알고...
억수로 놀랬다이가. 몇 분을 누워 있었는 줄 아나.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쟤가 나를 건져 줬구나. 사납게 생겨서 노는 앤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보다. 고, 고맙습니다. 괜히 부끄러워져 고개를 까딱 숙이고 급히 일어나려는데, 또 삐끗했다. 어어.. 이번에는 남학생이 허리를 숙여서 나를 품에 안아 주었다. 급히 몸을 숙이며 나를 안는 과정에서 작은 물줄기가 얼굴로 팍 튀었다. 남학생의 품에서는 물 냄새와 연한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 교복을 뚫고 요동을 치고 있는, 심장 박동 소리.
5.
남학생의 짧은 생머리가 흠뻑 젖었다. 아까 봤었던 새하얀 교복도 물에 푹 젖어 그 애의 몸에 딱 붙은 채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반듯하게 다림질이 잘 되어 있었던 교복이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흐물흐물하기 짝이 없었다. 내 머리에서도 물이 떨어졌다.
눈이 마주친 그 순간에는, 햇빛 아래로 투명하게 보이는 얼굴과 그 시원한 바람을 닮은 모습을 보고 숨을 쉬는 법을 잊었다. 순간의 순간, 그리고 투시透視.
숨을 참은 채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멍하니 있었다. 우리는 무언가에 홀린 듯 물가에 서서 서로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그 애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내 모습 또한 물에 젖어 있었다.
-.........
-.........
-.........
영화의 장르가 바뀐 듯 사뭇 기분이 묘했다.
혹시 속옷이 비치지 않을까, 급하게 옷을 정리하려고 손을 드니 그 애가 갑자기 자기 손도 들어서 내 손목을 턱 잡는다. 계획 없이 갑자기 세게 잡힌 손목이 아려온다.
혹시 속옷이 비치지 않을까, 급하게 옷을 정리하려고 손을 드니 그 애가 갑자기 자기 손도 들어서 내 손목을 턱 잡는다. 계획 없이 갑자기 세게 잡힌 손목이 아려온다.
-아.
금방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손은 불에 닿은 듯 뜨거웠다.
-....나이는.
-제, 제 나이요?
-어. 니 몇 살이가.
남학생이 물어온다. 나이가 몇이냐고.
-스물 다섯이요...
-...뭐야. 아줌마네?
아니, 한창 분위기 좋았는데 이 놈 자식이.
-어.......
낮은 목소리로 그 애는 잠시 뜸을 들인다. 헉헉. 숨소리는 뜨거웠고 거칠었다.
-아줌마 키스할 줄 아나.
-아, 안 돼 너랑은.
-와?
-싫어, 고딩이랑은 안 해...키스.
-뭐?
-안 할 거라고, 새파랗게 어린 놈이랑은!
-거짓말.
-...........
-거짓말 하지 마라.
그리고 그 다음은.
6.
남학생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언제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입술에 돌진했다. 내가 에라 모르겠다. 하며 목에 팔을 감으니까 씨익 웃으면서 내 허리를 끌어당긴다. 난 고딩의 팔 힘에 힘없는 종잇장처럼 딸려갔다. 점점 숨이 막혀오는 기분에 고개를 뒤로 뺐더니 의외로 순순히 빠진다. 가쁘게 내쉬는 숨이 잠잠해지기 무섭게 고딩이 다시 가까이 다가오며, 다 쉬었나. 이제 됐지. 하며 다시 입술을 부딪혀 온다. 얘 봐...나보다 훨씬 잘 하는 것 같아.
남학생이 고개를 비틀며, 자꾸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건전하게 끝날 것만 같던 입맞춤이 점점 진득해진다. 입 안에서 뜨거운데 말캉한 게 뒤섞이는 느낌이 야했다. 딱 붙은 채 얼굴을 맞대고 있는 우리 사이에는 무언가의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다. 우리는 삽시간에 자연스럽게 그 선을 넘어 버렸고, 동시에 급해 보이는 그 애의 손이 내 등을 맴돌다가 내 옷 속으로 들어왔다. 물기가 어려 차가운 손에 순간 반응한 내가 부르르 떨자, 그 애가, 입술을 떼고 반쯤 풀린 눈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 온다.
-아줌마, 우리 집 갈래.
하늘은 파랗고, 두 입술은 빨갰다.
ㅡ
예전에 써 놨다가 우진이 이미지와 어울리는 것 같아 리네이밍하여 각색한 단편입니다. 많이 고민고민하다가 올려봅니다.
우진아, 데뷔 축하해!
우진아, 데뷔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