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열
03
흑심(黑心). 흑심이라는 말은 의미에 걸맞은 이름을 가졌다. 본래 속세의 사물들은 모두 본연의 성질에 걸맞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어쩌면 임영민과 김여주의 본명은 그것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뱃가죽을 뚫고 들어간 깊은 곳 어딘가에 그 둘의 본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세례명이 있는 임영민은 천주교의 독실한 신자이고 김여주는 껍데기만 크리스트교인 신자에 불과하다. 임영민은 그런 주제에 늘 죄를 짓고 산다. 흑심이라는 걸 입안 가득 쑤셔넣고 아닌 척, 자신은 깨끗한 척 그렇게 성당을 무거운 마음으로 오갔다. 그래. 임영민이 독실한 신자라면 그런 신자를 꼬드긴 김여주는 타락한 천사쯤 되려나.
너희는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니? 둘은 곧잘 이런 질문을 받아왔는데, 그에 대답하는 건 늘 영민의 몫이었다. 여주는 남들에게 우리의 얘기를 하는 것을 꺼려했으므로 언제나 그 상황을 무마하는 건 임영민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하는 영민의 모습이 여주에게는 단지 거슬릴 뿐이었고. 이런 상황에 마주하면 둘은 속으로 생각한다. 아- 또 씨발. 물론 그 욕설은 서로가 아니라 질문을 한 상대를 겨냥한 것이었다.
"임영민."
"듣고있어."
"곧 시험기간이니까 우리 집에 그만 놀러 와."
"만지고 싶으면?"
"니가 짐승새끼니, 그것도 다 죄야 영민아."
"씨발. 알았어."
여주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영민의 심기를 거슬리게, 또는 영민을 놀릴 때면 줄곧 쓰느 말이 이거였다. '그거 죄야.' 독실한 신자인 영민의 발목에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쇠로 만든 족쇄가 하나 더 채워지곤 했다. 어두운 표정의 임영민은 젓가락으로 밥알을 휘휘젓다가 기분나쁜듯 젓가락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여주는 차분한 얼굴로 반찬을 집어먹는다. 흑심을 드러내지 마. 친구 사이에 흑심 품는 건 죄니까.
"젓가락 떨어졌다. 내 거 쓸래?"
"됐어, 안 먹어."
"애처럼 굴기는. 애 같은 건 너야 영민아."
"시험 기간이 제일 좆같아, 김재환보다 더."
니가 그렇게 말 하니까 더 짐승새끼 같다 영민아. 눈을 차분하게 내리깐 여주가 영민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짐승새끼. 아니, 비수가 아닐지도 모른다. 은연중에 임영민은 이미 인간이길 포기하고 살아왔으니까. 짐승새끼가 인간의 형을 하고 살아가는 것을 죄로 삼아 죄를 씻기 위해 신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시험기간은 둘이 만나게 된 초등5년 이후로 스킨십이 금지되는 짤막한 기간이었다. 둘 사이에 서리가 내리는 기간이다. 밥이든, 연락을 하든, 집에 가든 그따위의 것은 일상과 다를 바 없었다. 단지 그때는 손을 잡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생각보다 여주는 집중력이 잘 흐드러지는 편이었고 그것을 잘 캐치해 불편하게 하는 게 영민이었기에.
딱, 그 딱 하루.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시험 3주 전은. 오늘이 지난 내일을 기점으로 영민과 여주의 스킨십은 손을 잡는 것으로 최소화 될 거다. 영민은 여주를 위해서 여주는 - 역시 영민을 위하여.
*
수근수근. 나란하게 교실에 들어선 영민과 여주를 힐끔힐끔 돌아보는 아이들의 눈이 심상치않다. 가방끈을 붙잡고있던 여주의 주먹에 힘이 실린다. 대충 어떤 레퍼토리인지는 다 안다. 확실한 증인이 있다든지 뭐 사진 따위라도 찍었다든지 하는, 좀 골때리는 찌라시가 떠돌았음에 분명하다.
"안녕."
영민이 웃는 낯으로 뻔뻔하게 자리에 앉았다. 평소와 똑같이 교실에 들어와 와이셔츠를 벗고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영민의 눈은 다름없이 아래를 향해 내리깐 상태다. 주눅들었다는 게 아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에. 긴 속눈썹이 꿈틀거렸다. 미소를 함뿍 담고있는 입은 앙 다문채로.
섣부르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일이 일파만파 커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김여주와 임영민이라고 해도 사리분별은 하며 행동해야지. 이곳에서의 포식자는 둘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다 멍청한 놈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혹 가다가는 지나칠정도로 똑똑한 놈들이 있곤 했으니까.
"저기, 영민아."
"응?"
평소보다 조금 더 누그러진 눈으로, 순한 웃음을 담아서, 눈을 동그랗게 뜬 영민이 앞자리 여학생에게 반응한다. 김여주가 아무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다시 이곳의 주도권은 이쪽으로 넘어올 거란 사실을 지레짐작했다는 뜻이다. 똑똑하고 눈치빠른 애가 영민을 불러세웠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라지만 영민의 앞자리 여학생 A는 그저 단순무식한 애였으므로, 김여주는 이어폰을 귓구멍에 쑤셔박았다. 아무런 노래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저기, 그,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기분 나빠할 수도 있는데 말이야."
"뭘 그렇게 뜸을 들여, 기분 안 나빠할 테니까 말해 줘."
"그, 앞반에 어떤 애가 그러는데 너랑 여주가 …"
어젯밤 집 앞에서 둘은 질척하게 키스를 했다. 김여주는 영민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었고 임영민은 여주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미성년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과연 - 미성년이란 무엇인가. 꼴사납긴. 임영민이 밖으로 토해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짓이겼다. 영민은 A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당치도 않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다.
여기까지도 뻔한 레퍼토리. 아이들은 안 그런 척하며 모든 관심을 그쪽으로 쏟고있을게 분명했다. 김여주마저도.
"나랑 여주가 그랬다고? 하하, 누구야 그런 소설 지은 애가?"
"그, 그건 말을 못해줘."
"아냐 괜찮아. 어떤 멍청한 애인지 알 것 같다. 미안한데 나랑 여주 어제 따로 집에 갔거든."
아아- 교실 안의 모든 이들이 탄식한다. 이렇게, 우리 모두가 너희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어, 하는 걸 간접적으로 표시하는 거였다. 영민이 방금 한 말은 거짓이 하나도 없었음에 자부한다. 단지 사실일 뿐. 뒷 이야기를 삼켜낸 것일 뿐.
"아 맞다. 어제 영민이 부모님이 데리러 오셨었음."
어떠한 산증인으로 인해 상황은 역전했고 콜라에 김이 빠져버렸다. 푸쉬익- 그걸 이제 말하냐 너는? 주변 아이들이 그 애의 등을 한 대씩 때리고 다시 소란스러워진다. 반응과 결과는 늘 한결같았다. 왜냐면 똑똑하고 눈치좋은 애들은 이미 레퍼토리를 간파하고 나서지 않기에 자처했으니까, 또는 둘에게 관심을 두지 않기로 한 듯이. 어찌되었든 소문은 빠르다, 아마 개중에 폰을 내지않은 애들은 수업시간에 몰래몰래 소문을 퍼뜨려줄 거다. 사실 아니래 그거. 오늘 임영민이 얘기했음.
아, 여주야, 아까 학생부장선생님이 우리 부르셨었지. 응. 영민이 고개를 기린처럼 빼서는 여주가 앉은 자리를 돌아본봤다. 여주가 고개를 주억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그 누구도 둘을 의심하거나 씹어대지 않았다. 동시에 조례를 시작하는 타종이 울리고, 영민과 여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도 없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기분 어땠어."
"관심 받는 거 피곤해. 기분 더럽고 좆같았어 영민아."
"키스할까."
"쓰레기 새끼, 어제가 끝이라고 했지."
"키스하면 기분 좋아지잖아."
화장실 맨 끝 칸에 들어선 둘은 문을 걸어잠그고 눈을 맞췄다. 영민이 여주의 허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여주의 축축한 눈이 영민을 토해내듯 삼켜내면 입을 맞춘다. 흔한 뽀뽀가 아니다. 질척거림. 생경한 소리가 끝칸부터 퍼져나왔고 뻑뻑한 와이셔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영민의 목 뒤로 여주가 손을 감싸안음과 맞물린 입술은 다시 한 번 멀어졌다. 올려다보는 눈은 꼭 심해 같아서 이제는 정말 죽어버리겠구나, 싶다가도 여주는 틈을 주지않았다. 그 바다에 빠져버릴 수도 없게 꽁꽁 얼려놓지를 않나. 그 황량한 바다가 푸른 무우밭인 줄로만 알고 날아가던 나비가 어쩌면 영민일지도 모른다고. 그렇다고 생각했다. 씨발, 정말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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