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도 없이 눅눅해져 검붉어진 천장은 우리를 환히 맞이했다. 파리 지옥으로.
C A U T I O N
w. 반다이
03
- 잘 들어. 박지민. 거기서 헛소리해도 뒤지고 이번 임무 깔끔히 수행하지 못해도 넌 뒤져. 그러니까 괜히 잘난 척 한답시고 도청기를 뺀다거나 뭐 그런 이상행동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알아들어?
- 여긴 원래 이런 식으로밖에 조언을 못 해줍니까.
- 조언같은 소리하고 있네.
- 실망스럽네요.
- 난 지극히 개인적으로 탈영한 새끼들을 아끼진 않아.
- 들어갑니다.
하여간- 그의 말을 거뜬히 무시한 자신으로 인해 짜증이 돋친 듯 교신 장치로 욕을 일삼는 윤기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지 지민이 와이셔츠 포켓에 달린 도청 장치를 태연하게 건들였다. 한 시간 전, 차를 준비시켰다는 그녀의 문자에 약속 장소로 미리 나와있던 지민의 눈길이 자연스레 멀리서부터 자신을 강하게 비춰오는 헤드라이터로 향했다. 지나지 않아 운전석에 앉아있던 기사는 지민에게 목례를 하며 차문을 열어줬고 이에 때맞춰 지민이 태연스레 발걸음을 앞에 열려진 차문으로 옮겼다. 어두워진 저녁 하늘 사이로 평탄한 시멘트가 아닌 수풀이 우거진 구도로를 가로질러 하나의 세단이 천사의 분수대가 중앙에 위치해있는 웅장한 대저택에 몸을 담았고 그와 동시에 허망한 윤기의 목소리가 지민의 이어폰으로 흘러나왔다. 세상 존나 불공평하다. 그리고는 세상을 비판하는 그의 현실주의적 사고가 맘에 들었는지 지민이 몰래 입꼬리를 살짝 말아올렸다.
천사들의 합창이 이어지고 있는 분수대를 지나 저택의 문 앞에 서 있던 기사가 손님이 도착했다는 걸 뜻하기라도 하듯이 초인종을 꾹 눌러댔고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그 날에 메모를 남기던 여자가 지민을 반갑게 맞이했다.
" 오느라 힘들었죠? 길이 엉망이어서."
" 아니요. 괜찮습니다."
열려진 현관문 틈으로 발을 내딛던 그녀의 상냥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연신 지민에게는 감정의 변화따윈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유를 묻는다면 아마 그에게 감정이란 사치였을테니까. 이러한 사실은 누구보다 지민, 그가 제일 잘 아는 바이기도 했다. 아빠. 이 분이야. 나 구해준 사람. 거실을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큰 소리로 그녀의 아빠를 밖으로 불러냈고 따라 구석에 있던 서재의 문 고리가 반동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갔다. 지금부터야, 정신 똑바로 차려. 그리고 이와 함께 윤기의 냉철한 음성이 연이어 지민의 고막을 간질였다. 어서 와요, 전에 남준이 보여준 화면 속 인자한 중년의 남성이 먼저 악수를 건넸고 지민또한 그 모습에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였다. 형식적인 인사를 끝으로 중년의 남성이 저녁을 대접하겠다며 지민을 부엌으로 인도했고 지민은 여전히 평범한 가정집과도 같은 분위기를 내고있는 이 집의 행색이 과히 내키지 않았다.
" 이런 자리까지 마련해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 자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딸이 어떻게 내 집에 있겠어. 다 덕분일세."
유쾌하지도 않은 이 자리에 유쾌한 웃음을 내비치는 중년을 지민이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디선가 보았다, 지민이 한 순간에 느낀 직관이었다. NIS본부에서 화면을 통해 그를 본 기억뿐 아니라 다른 기억의 조각들이 지민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하지만 주마등처럼 스쳐간 기억은 다시 돌아올 줄을 몰랐고 스테이크를 썰던 그의 칼질이 점차 멎어들어갔다. 죄송하지만 말씀 좀 여쭤봐도 될까요. 생각치도 못한 지민의 물음에 중년의 남성이 와인을 목구멍에 넘기려다 잔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순간, 윤기가 아닌 다급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지민을 귓가에서 불러세웠다.
- 박지민 멈춰.
그럼에도 지민은 장난감에 도취된 어린 아이마냥 멈추질 못했다.
" 어디서 뵌 적이 있었나요? "
".............."
" 제가."
" 글쎄. 난 자네를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던 그의 대답은 끝을 맺지 못하고 쥐도새도 모르게 등장해버린 저음의 목소리로 인해 고급진 갈색 카펫 아래로 뭉개져버렸다. 빨간 넥타이와 블루 계열의 더블버튼 코트를 어깨에 걸친 젊은 남성이 식탁으로 발걸음을 떼며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는 지민을 보고서도 심드렁하게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아버지, 뭐에요. Aaron은 어디 가고 저 사람이 앉아있어요? 그새 사람 바꿨어요?"
" 인사해라. 네 동생을 구해주신 분이야."
" 뭘 또 그런 부질없는 행동을 하셨대. 고생했겠네."
붉은 조명을 밝히는 샹젤리제 아래에서 홈바에 몸을 기댄 채 잔에 와인을 따르던 젊은 남성이 피식하며 바람 빠진 웃음을 자아냈다.
" 이 자식이 예의없게 손님 앞에서 뭐하는 말버릇이야. 사과드려라."
" 또 또 과민반응하신다."
" 얼른 하지 못 해."
" Was it bad? friend. (미안한 일이었나요? 친구) "
" 이 놈의 자식이 그래도."
" Aaron 들어오면 체스나 두게 제 방으로 오라고 대신 전해주세요."
아니나 다를까 그런 그의 행동을 혼내려는 듯 중년의 남성이 호통을 치기 시작했고 항상 그래왔듯 젊은 남성은 와인을 오른손에 쥔 채 식사 잘하고 가라는 의미 없는 문장만 늘어놓은 채 부엌을 벗어났다. 자식을 잘못 교육시킨 건 아는지 중년의 남성은 거듭 사과를 전해왔고 지민은 그저 그의 모습에 괜찮은 척 가식적인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 그래, 마카오에는 여행 온 거에요? "
" 지금은 대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있습니다."
" 교수인가. 무슨 전공을 담당하고 있지?"
" 아직 정식 교수까지는 아니고 경제학 부교수를 맡고 있습니다."
얼마 전,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를 몰라보고 윤기는 호석이 발급해온 가짜 신분증을 보며 거짓말을 쳐도 분수껏 치라는 아낌없는 조언을 내뱉다 결국 지민의 입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말을 듣고서야 입을 앙 다물었다. 네? 순간 떠오른 지난 날에 중년의 남성이 연이어 내뱉은 문장의 취지를 알아듣지 못한 지민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그에게 되물었다.
" 자네. 우리 딸도 좀 가르칠 수 있겠냐고 물었어. 뭘 그렇게 놀라나. 내가 페이는 두둑히 주지."
" 예?"
" 우리 딸이 그 공부를 많이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그러네."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에 적잖이 놀란 지민이 아무렇게나 말을 버벅였다. 그리고 이는 윤기의 오더가 내려질 때까지 시간을 벌려는 그의 속임수이기도 했다. 한다고 해. 윤기가 오더를 지시했다. 어떠한 선택권조차 없던 지민은 얼토당토않게 그녀의 과외를 떠맡게 되었고 식사를 마친 현재 시각에는 그녀의 방 안 소파에 앉아있는 꼴이 되어버렸다.
" 그럼 이제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되죠? 대학 와서까지 과외할 줄은 몰랐는데."
" 성적이 꽝이라면서요."
" 그건 아빠가 기대치가 높아서 그런 거에요."
" 일주일에 한 번 뿐이잖아요."
일일이 그녀의 말에 대답하기가 귀찮은 듯 지민이 짧게 대꾸하고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 구해줘서 고마웠어요."
"............."
"............."
" 당연한 일이었어요."
아주 잠깐의 정적이 무색할 정도로 칭찬 받을 일이 아니라며 맥을 딱 끊어버린 그로 인해 머쓱해진 여자가 힘을 한껏 준 주먹을 입에 가린 채 헛기침을 하며 나즈막하게 그를 불렀다.
" 김여주에요, 제 이름. 이제야 말하네요."
" 그냥 J 라고 불러요. "
"............."
"그 날 잃어버린 목걸이는 찾았습니까."
"아니요. 다시 선물로 받았어요."
" 방금 그 Aaron이라는 사람한테서요? "
자신에게 시선을 올곧게 맞춘 채 대답을 해오는 지민에 당황한 듯 눈이 동그래진 여주가 어떻게 알았냐는 작은 탄성을 드러냈다. Aaron. 지민이 방금 전 부엌에서 들은 이름을 다시금 느리게 되새겼다. 그는 누굴까, 그는 호석이 말해준 골드락의 선상들 중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커진 눈동자를 전혀 숨기지 못하는 여주를 조심히 올려다보던 지민이 살점이 뜯겨버린 입술을 매만지다 연이어 말을 덧붙였다. 알고 싶었다. 그저 궁금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민은 지키지 못할 선을 아주 천천히 넘어섰다.
" 누구에요? Aaron이라는 사람."
그게..... 쭈뼛쭈뼛 섣불리 대꾸하지 못하는 여주를 지켜보던 지민이 이내 그만 됐다는 듯 마주하던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옮겨갔다. 그러자 이번엔 그의 돌려진 시선을 탐탁치 않게 바라보던 여주가 운을 떼었다.
" 원래 그래요? "
" 뭐가요."
" 원래도 사람을 잘 안 믿냐고요."
" 그럼 그 쪽은 할 일없이 원래 그렇게 밝아요? "
한결 톤이 낮아진 목소리를 배경으로 그의 쌀쌀맞은 어투가 여주의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래야 사람들은 날 좋아하니까요. 그리고 마치 모래 사장의 모래성을 한껏 집어삼켜버린 그녀의 음성이 끝내 지민의 세상을 중단시켰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종의 동정심이라는 감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난 솔직해졌어요."
"..........."
" 그러니까 말해봐요. 선생님의 진짜 이름."
" ............."
" 재미없어."
" 그 쪽이 먼저 말해줘요. Aaron이라는 사람."
궁금하니까. 당신의 집이 미칠 듯 궁금하니까요.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내적인 독백을 입술 사이에 머금고서 지민이 여주와 시선을 교차시켰다. 남자친구에요. 그리고 연이어 그녀에게서 들려온 말은 생각 외의 문장이었다.
" 지금은 아빠 밑에서 본부장으로 일하고 있어요. 이제 선생님 차례에요."
"............"
" 진짜 말 안 해줄 거에요?"
" 박지민."
"............"
" 박지민이에요. 한국 이름."
어둠이 찾아온 가로등 불빛만이 은은히 들어오는 방 안으로 그들만의 비밀을 움켜쥔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알 수 없는 호기심에 잡혀버린 지민에게 그녀는 간질거린 웃음을 내비췄다.
"예뻐요. 선생님 이름."
"............."
" 이건 칭찬이에요. 진짜 잘 어울려요."
" 고마워해야 하는 겁니까."
" 내 남자친구 이름도 예쁜데."
여전하게도 그의 시선을 옭아매던 여주가 이내 지민을 향한 시선을 끊어내고선 너눅해진 밤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더위에 짓눌려 습해진 나무 냄새가 이 곳까지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정국. 전정국.
지민의 낯빛이 점차 제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려 일그러지는 줄도 모른 채 그녀는 다시 한 번 어두운 밤바다에 홀로 떠있는 공허한 목소리를 밖으로 내뱉었다.
" 전정국이에요."
"..........."
" Aaron이라는 사람."
" 아. 이건 진짜 비밀."
창문을 바라보던 몸을 뒤로 틀고서 그녀는 그렇게 지민을 향해 환한 웃음꽃을 피어냈다. 그것은 감히 따뜻한 햇살을 가득 머금은 파리 지옥과도 같았고 교신 이어폰 너머로 이 모든 상황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듯 호석이 정갈한 손가락을 들어올려 모니터에 향해있던 얼굴을 거칠게 쓸어담았다.
[화양] [노트북] [햄버거] [망개떡]
저번 2화에 신청해주셨던 저의 감사한 우리 암호닉 분들 추가했어여♡
요즘 날씨가 장난이 아닌데 건강 조심하시고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가득 담아 저의 독자님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항상 좋은 일들만 가득하시기를 바라며 저는 이만 자러 가볼게여....♥ 제가 많이 사랑합니다♥♥
♥ 고마우신 저의 사랑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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