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황민현
A
황민현은 특별했다. 대학 수석 입학에, 장학금에, 뭐 하나 빠짐없이 특별했다. 하하하. 이젠 모두가 황민현의 정직한 웃음소리 마저 특별하게 여기고 있는 그런 존재였다. 황민현이 특별한 이유는 단지 저게 다가 아니였다. 딱 봤을때 차갑다고 느껴질 만큼 냉미남에 가까운 얼굴은 황민현이 입꼬리를 올리기만 하면 무장해제였다. 그런 황민현의 얼굴은 천재라고 불릴만큼 잘생겼고, 키는 또 얼마나 크게요. 182cm를 담고 있는 우월한 피지컬과 귀찮을지도 모를 동기들의 응석까지 받아주는 인성은 그야말로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 황민현이 없으면 그들의 과파티는 성공적으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 미안, 오늘은 내가 바쁜일이 있어서. 그 한마디에 아쉬움을 달고 수십명씩 달겨드는 여학생들을 황민현은 어쩔 줄 몰라하며 40분동안 달랬다는 소리도 있다. 물론 사람 좋게 웃으면서. 저들의 원성에 평소였으면 넘어왔을 황민현이지만, 그 날 만큼은 무슨 이유가 그렇게 중요했는지 황민현은 정말 과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날 여자애들 출석률이 어떻게 됐더라. 여주랑, 소연이랑 서너명 됐나. 아무튼 80%가 빠졌다고 보면 된다.
그럼 김여주는? 평범했다. 평범함의 끝을 달렸다. 그렇다고 남자애들과 지내지 않는건 아니였다. 인사할꺼 다하고 다같이 놀기도 하고, 농담 따먹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야 여주 어때?
하면
"여주? 성격좋지."
"착하지."
끝이였다. 지혜나 현지를 물으면 예쁘지, 귀엽지. 연예인 누구 닮았지. 했던 그들이 이질적이게 누군가의 인성을 칭찬을 하게 만드는 장본인이였다. 심지어 동기중에서는 김여주를 모르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물론 모를 수 있지만, 여주는 아싸가 아니였기에 그 부분은 조금, 아니 대략 난감했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황민현이였다. 황민현은 여주를 과파티에서 알게 되었다. 것도 학기가 벌써 8개월이나 지난 시점에서. 말이 되나 싶겠지만, 슈퍼스타 능가하는 민현의 생활을 봐선 가능할 지도 모른다.
"야 세운아 김여주 자작한다. 좀 말려라."
민현은 제 앞에 앉아 있는 재환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민현아 왜? 어디 아파? 취했어?
저들에게 시선이 간 것도 아닌데 단지 근처에 시선이 왔다는 것 만으로도 무섭게 반응하는 여학생들에 민현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들 사이로 말리는 세운의 팔을 뿌리치며 투정 부리는 얼굴이 보였다.
'아 왜에! 내가 마시겠다는데.'
그렇게 큰 목소리도 아닌데. 다 뭉개져선 옹알이 비슷한 말을 뱉고 있는 여주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적당히 좀 마시지. 민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제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황민현은 다시 김여주를 잊었고, 그들의 접점은 이것으로 끝일 줄 알았다. 적어도 비가 오던 그 날 전까지는.
특 별 한
황 민 현
무섭게 쏟아지는 비에 민현은 망연자실했다. 입술을 꾹 깨물은 체 발만 동동 구르던 민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버스 정류장까지만 뛰어가기로 마음을 먹고 발을 굴렀다. 가방으로 머리를 가려봤지만, 점차 물기를 먹는 가방은 오히려 더 무거워져 민현을 힘들게 할 뿐이였다. 안되겠다 생각한 민현은 이를 악물은체 머리가 젖든 말든 가방을 바로 메고 다시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민현은 저가 기다리는 버스가 오는 정류장에 도착했다. 아무리 특별한 황민현이라도 물에 빠진 생쥐꼴을 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온 몸이 축축해진 민현은 그렇게 쉴틈없이 도착한 버스정류장에서 또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젖어도 버스 아저씨가 저를 태워줄까. 하는 생각이였다. 그런 민현을 자꾸만 힐끗 힐끗 쳐다보던 여자들 중 하나가 조심스레 손수건을 건넸다. 닦으세요. 주변 다른 여자들에게서 탄식 소리가 나왔다. 내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아 감사합니다."
여자가 수줍게 고개를 저었다. 핑크색 손수건으로 얼굴 구석구석을 닦던 민현이 돌연간 뒤에서 들리는 큰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
왠 여자아이 한명이 할머리를 제 뒤에 숨겼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그런 비슷한 행위를 취한 여자아이가 저보다 덩치가 두세배 큰 남자들과 대처하고 있었다. 쌀쌀한 이 날씨에 얇은 민소매 차림인 것으로 봐선 할머니의 머리 위에 씌어져 있는 남방은 여자의 것으로 보였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한 민현이 같이 놀라 뒤를 쳐다보고 있던 여자에게 "감사합니다." 손수건을 건네며 발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깔린 열무들이 지저분하게 거리를 덮고 있었고, 아마도 그것을 담고 있던 바구니들은 조금 부서져 있었다. 어느정도 사태 파악이 된 민현의 머리가 쏟아지는 비에 다시 젖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중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저,
것보다는 얼마나 젖은 건지, 자칫하다 속옷형태까지 보일만큼 젖은 여자아이와 할머니가 혹여 남자들에게 다칠까 염려가 되어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사과 하시라구요!"
얼굴이 흠뻑 젖은 여자아이가 크게 소리쳤다.
"아니 이새끼가 진짜."
소리에 놀란 민현이 정신을 차릴틈도 없이, 남자들이 주먹을 쥐고 한대 때릴 것 같은 위협적인 포즈로 빠르게 전진하자 재빨리 민현이 그 사이를 가로 막았다.
특 별 한
황 민 현
민현은 어쩐지 퉁퉁 부어 감각도 없는 것 같은 제 볼을 더듬거리며 시끄러운 남정네들 사이에서 경찰을 기다렸다. 그만 들 좀 하세요! 컴퓨터를 두들기던 경찰의 일침에 그제서야 조용해지는 내부에 여주는 피곤한 눈가를 지분거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비를 어찌나 맞으신건지, 여주는 이 여름에 찾아 볼 수 없는 난로가 경찰서 구석에 놓여있음에 다시 한번 안심하고 따뜻한 물을 들고 작게 떨고 계신 할머니께 다가갔다. 드세요. 건네오는 컵을 받아들이신 할머니의 어깨위에 축축하게 달라붙은 제 남방을 걷어 낸 여주가 경찰서 입구로 나가 물기를 짜기 시작했을까, 저 멀리서부터 황급히 달려오던 중년의 남자가 여주를 재치고 경찰서 내부로 들어왔다. 고개를 살짝 빼어내 바라보니 아마도 할머니의 아들인듯 싶었다.
아들과 함께 경찰서를 나서던 할머니는 문 앞에서 물기를 짜고 있던 여주의 손을 붙잡은체 감사의 표하며 떠나셨다. 괜히 찡한 마음에 혀를 한번 차며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주는 경찰서 안에서 제 이름이 불리자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특 별 한
황 민 현
"두 분다 감사드리고요. 앞으로는 조금 더 신속한 신고 부탁드립니다."
"……"
"남자 분 없으셨다면 여자 분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안가네요."
…하하. 어색하게 미소를 지은 여주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번 하곤 짐을 챙겨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어느덧 마른 머리가 떡이져 있어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저기요."
뒤에 서 있던 민현이 여주를 불렀다.
"…네?"
당황한 여주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민현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로. 어느덧 여주 앞에 대뜸대고 선 민현이 뒷목을 긁적이는 여주를 한 없이 바라보았다. 민현은 본래 예의 없는 사람을 싫어했다. 그 말은 즉, 어떻게 보면 예의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과 같았다. 암만 봐도 고딩같은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민현은 어째 작은 여주가 대단하기까지 느껴졌다.
"……"
"……"
것보다 계속 신경쓰였던 여주의 옷차림에 민현은 조심스레 가방에서 가디건을 꺼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뭐야 왜이래. 그렇게 생각하며 낯선 손길을 받던 여주는 올곧 저를 내려다보는 민현의 시선에 부담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아까 경찰분 말처럼 위험한 상황이였어요."
"……"
"그래도 이제는 신고부터 빠르게 하는게 나을 것 같아요."
"…아 예."
"……"
"저기 근데 …맞은데는 좀 괜찮으세요?"
아, 말하자 마자 또 다시 욱씬거려오는 볼에 민현은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볼을 더듬 거렸다. 그런 민현의 모습에 이젠 저가 가방을 뒤적거리던 여주가 제 손보다 큰 물파스를 꺼내 들었다. 물파스를 들고 다니는 여자라. 작게 헛웃음을 지은 민현이 아픈 볼을 부여잡고 제대로 웃지도 못하고 바보처럼 웃었다. 허허허. 허허허.
"…이거 눈 근처에만 안 닿게 바르시면 되거든요."
"발라 주시면 안돼요?"
"에?"
저도 모르게 삐딱하게 나간 말에 당황한 여주가 어버버 거리며 민현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런건 신경도 안쓴다는듯 민현은 천천히 얼굴을 내렸다. 제가 거울이 없는데 지금 너무 아파서요. 원래 이렇게 능청맞았나. 민현은 스스로도 처음 보는 자신의 모습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
알싸하게 퍼지는 박하 비스무리한 알콜 향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처럼 해질녘 맑게 게인 하늘 아래로 선선하게 부는 저녁 바람과 같이 시원했다. 어느덧 손길이 멈춘 제 볼에 민현은 조심스레 얼굴을 들었다. 토끼처럼 입술을 앙앙 깨물며 물파스를 가방에 집어 넣은 여주가 민망한지 큼, 하는 소리를 냈다.
"…저 그럼 가볼게요."
"……"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숙여오는 고개에 따라 머리를 조아린 민현이 멀어지는 작은 뒷모습을 마냥 바라보기만 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호흡이 가팠고, 가슴이 뜨거운게. 첫 눈에 반한 순간이였다.
"아 맞다 가디건."
…번호라도 물어보는건데. 좋아하는 브랜드의 회색 가디건이였지만, 것보다는 그것을 구실삼아 여주와 연락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였다. 딱 봐도 고딩인데 무슨 쓰레기 같은 생각이야 황민현. 골치 아픈 제 본심에 헛웃음을 지으며 눈썹 언저리를 긁적이던 민현이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기 시작했다.
…다시 보고 싶다.
떠난지 5분도 안됐는데 하늘에 가득 메워지는 얼굴에 민현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운명이라면 다시 만나겠지. 제 바램을 담으며.
특 별 한
황 민 현
"감사했습니다. 이거 그래도 세탁한거거든요."
건네는 쇼핑백을 받지 않고 가만히 허벅지 옆에 정렬된 두 팔에 여주는 당황스러워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 본 민현의 얼굴은 입을 벌린체 어디 한대 맞은 사람처ㄹ, …아 어제 맞았지.
뭘 이해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주억거린 여주가 혹여 감기라도 걸린건가 민현의 얼굴을 작게 살피다가 다시 한번 가디건을 담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팔이 올라가면 올라가는대로 머리의 지배가 아닌 몸의 지배를 받은 민현이 기계처럼 팔을 들어 여주가 건넨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꾸벅. 허리를 크게 굽혔다 피며 제 곁을 스쳐 지나가는 여주의 뒷모습으로
"야 김여주!"
하는 소리에 민현은 뒤를 돌았다.
'야 세운아 김여주 자작한다. 좀 말려라.'
거짓말처럼 재환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고, 옹알이 같은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멀어져 가는 조그만한 뒷모습에 민현은 손을 올려 제 입을 덮었다.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미쳤다. 민현은 새삼 어제 제 우산을 들고 튀던 성우가 고마웠고, 비가 그칠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무식하게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던 제 다리가 대견스러웠다.
"……"
올라가는 입꼬리에 입술을 깨물은 민현이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에 주먹을 쥐었다. 쇼핑백에선 벌써부터 여주로 가득한 향이 스멀스멀 올라는듯 싶었다. 평범했던 여주가 민현에 의해 특별해지는 순간이였다. 민현이는 이것을 첫 눈에 반했다. 아니 첫 눈에 사랑에 빠졌다. 라고 단정짓곤 발걸음을 옮겼다.
"…김여주."
…무슨 이름도 이렇게 예뻐.
기분 좋은 민현의 콧노래가 복도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