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부 박우진 X 미술학도 김여주
*
"..안녕."
낮게 깔린 목소리가 복도를 웅웅 울렸다. 지금 나한테 인사하는 건가 싶어 잠시 멍하니 서 있었더니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와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안녕. 다시 한번 더 들려오는 인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바보같이 인사를 받아줬다마는, 박우진은 뭐가 그리 비장한지 윗입술로 아랫입술만 꾹꾹 누르고 있었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에 잠시 그 애의 눈을 쳐다보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그대로 빤히 내 눈을 쳐다봐서 먼저 고개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마는."
"..에?"
"괜찮나."
한참 말뜻을 이해하려다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설렁설렁 대답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꿉꿉한 표정을 짓다 이내 그때처럼 내 양 볼을 붙잡고 고개를 들어 올려 내 얼굴을 살피는 박우진이었다.
"..괜찮네."
"..."
"그럼 됐다. 가자."
이젠 붓기가 아예 가셨는지 판판해진 이마를 본 박우진은 안심했다는 듯 웃어 보이고는 손을 뗐다. 멍하니 서 있는 내가 웃기기라도 한 지 계속 웃어대던 박우진은 내 팔을 잡아 끌었다. 가자.
고요하고 어둑한 운동장을 혼자 아닐 때 걷는 건 또 오랜만이었다. 아, 걸었다기보다는 끌려갔다는 게 맞다. 아까부터 잡혀있던 팔이 너무 신경 쓰였다. 그 상태로 교문 앞 신호등까지 나를 끌고 온 박우진은 그제서야 슬쩍 내 팔을 놓곤 나를 마주했다.
"집."
"..에?"
"집이 어디야."
"..."
"아, 그니까, 데려다 주려고.."
당황한 내 얼굴을 보자마자 말을 더듬던 박우진은 이내 붉어진 귀를 드러내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나만 이 상황이 이렇게 혼란스럽고 이해가 가지 않은가 보다 싶었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인사에, 걱정까지 해주고, 집까지 데려다준다니. 착한 아이인 걸 떠나서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날 기다린 것 같은데 더이상 민폐를 끼치기는 싫어 거절하기로 굳게 맘을 먹었다. 지금 보니 목까지 빨개진 게 심각하다 싶었다. 어깨를 톡톡 치니 번뜩 고개를 드는 박우진에 소심하게 말을 꺼냈다.
"저기.."
"..어."
"우리 집 저기 앞이니까, 안 데려다줘도 돼."
"..아, 응, 응."
머쓱한지 혀로 입가를 훑는 박우진에 나도 덩달아 뒷머리만 긁어댔다. 그럼, 내일 봐. 마침 켜지는 신호등에 손을 흔들곤 인사를 하는 박우진이었다. 어, 어어.. 나도 모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언제부터 내일 보는 사이가 됐지. 괜시리 어색한 마음에 급히 손을 내렸다. 내일 보자는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그 날 이후로 박우진은 계속 내 눈앞에 알짱거렸다. 도대체 나는 얘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미술실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어느샌가 불쑥 나타나 내 옆을 걷고 있었고, 축구 연습을 하다가도 내가 지나가면 공을 내팽개치고 나에게 달려오기 일쑤였다. 그게 부담스러워 가끔 일부러 늦게 나오기도 해봤지만 그럴 때마다 미안하게 항상 계단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박우진에 나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덕분에 어둑한 복도 끝에서 반짝거리는 형광색 완장을 나는 매일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박우진이 몇 반인지도 몰랐다. 박우진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축구부라는 거, 그 축구부 주장이라는 거, 귀가 잘 빨개진다는 거. 이 세 개가 다였다. 학교에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거니와 마주치더라도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모습이 다였고 딱히 접점도 없었다. 애초에 사람들과 접촉을 잘 하지 않는 나였기에 학교에서 내게 말을 거는 사람들은 손에 꼽았다. 그런 나에게 박우진은 정말 이상한 애였다. 매일같이 나를 기다려놓고 하는 것이 안녕, 이 한마디와 교문까지 바래다주는 것. 그리고 잘 가란 인사, 내일 보잔 말. 이게 다였다. 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서로를 모르지도 않고. 이 애매한 사이를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하나 싶었다.
점심을 항상 거르다보니 딱히 대회 시즌이 아니더라도 미술실에 박혀 습작을 하는 게 일상이 되었었다. 고요한 미술실 안에선 사각사각 소리만 울렸고, 간간히 복도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는 게 익숙했다. 자꾸만 삐뚤어지는 선들에 귀마개라도 살까 싶어 고민하던 찰나, 이번엔 미술실 문이 열렸다.
"어."
"..."
"여기 있었네."
갑자기 덜컹 열린 문에 놀란 것도 잠시, 한참 나를 찾아다녔다는 남자애의 말에 의아해하며 그 애를 올려다봤다. 연필 냄새가 난다며 코를 킁킁거리던 남자애는 이내 캔버스 옆에 의자를 끌어다 놓곤 털썩 앉았다. 김여주, 맞지? 고개를 끄덕거리자 곧 자신의 이름은 안형섭이라며 덥석 내 손을 잡아 왔다. 흑연이 잔뜩 묻어 있었던 손을 잡고 흔들어대던 애는 자신의 손에 묻어나온 까만색을 보고 눈을 키웠다. 그 모습이 꼭 토끼 같다고 생각했다.
"아, 다름이 아니고.. 너 박우진 알지?"
낯선 얼굴에서 나오는 낯설지 않은 이름에 이번엔 내가 눈을 키웠다. 고개를 주억거리니 큭큭거리곤 손에 묻은 가루들을 털며 입을 여는 애에 멍하니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요즘 박우진이 밥도 안 먹고 잠만 잔다니까?"
"..."
"그치, 너가 생각해도 이상하지? 쉬는 시간에도 공 차겠다고 체육복만 입고 있는 놈인데, 이제는 교복에 넥타이까지 풀로 입고 온다니까?"
"..."
"어어? 여주야, 내 말 듣고 있어?"
내 앞으로 손을 휘휘 저어댄 안형섭은 곧 내가 제 얼굴을 쳐다보자 쫑알거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듣다 보니 모두 박우진에 대한 얘기였다. 요즘은 방과 후 연습도 설렁설렁한다느니, 갑자기 공을 내버려 두고 어디로 달려간다느니, 연습이 끝나고도 피시방에 가지 않는다느니.. 아무래도 어디 관심이 팔린 것 같다며 매우 걱정하는 애였다. 그나저나 그 애 얘기를 왜 나한테 하지.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안형섭을 쳐다보자 다시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는 안형섭이었다.
"아, 그래서 그런데 여주야.."
"..?"
"너가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될까?
"..? 뭐를.."
"너랑 박우진이랑 많이 친하잖아. 너가 박우진 정신 좀 깨워줘.."
살면서 누구랑 친하다는 말은 처음 듣는 것 같았다. 박우진이 요즘 너 엄청 신경 써. 너도 알지? 모르는데..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내 어깨를 툭툭 치곤 매일 데려다주는 거 누가 모르냐며 익살스러운 얼굴을 하는 안형섭이었다. 제가 말을 하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고, 다음 주가 지역 경기인데 이대로 가다간 경기까지 말아먹을지 모른다며 꼭 부탁한다고 내 손을 다시 잡아 오길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울리는 예비종에 안형섭은 다시 손을 털어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우진 지금 반에서 자고 있을 거야. 친절하게 박우진이 어디 있는지까지 알려준 안형섭은 이동 수업이라며 서둘러 미술실을 나갔다. 마무리가 되지 않은 그림을 대충 이젤 채로 벽에 세워두곤 앞치마를 벗었다. 잘게 묻어나온 흑연 가루들을 털며 수돗가로 향하던 때에 생각났다. 나 박우진 몇 반인지 모르는데.
*
내가 박우진과 서로 몇 반인지도 공유한 사이인 줄 알던 안형섭 덕분에 1반에서부터 박우진을 찾기 시작했다. 문을 열어보면 아이들이 쳐다볼까 봐 열지는 못하고 창문 밖에서 소심하게 쳐다보는 것밖에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찾고는 있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박우진에 이동 수업이라도 갔나 싶어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불이 다 꺼져있어 들여다보지도 않고 지나친 반을 혹시 몰라 확인해보니 누군가 혼자 엎드려서 자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동글동글한 뒤통수에 박우진인 걸 알아챘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깊이 잠들었는지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꽤 컸음에도 미동 없이 엎드려 있는 게 안쓰러워 보였다. 칠판에 큼지막하게 써져 있는 이동 수업 네 글자에 시계를 보니 곧 종이 칠 시간이었다. 밥도 안 먹었다 그랬는데.. 괜시리 걱정스러워져 동그란 머리통만 빤히 쳐다보다 이내 비어있는 앞자리에 앉아 박우진을 내려다봤다. 하굣길에 봤을 땐 항상 실실 웃고 있어서 괜찮아 보였는데, 또 그건 아니었다 보다. 새근새근 잘 자는 것 같은 박우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이렇게 자다간 수업도 못 들을 것 같아서.
"박우진."
"..."
"박우진..?"
"..뭔데.."
하루에 박우진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를 줄은 몰랐다. 이러다간 정말 못 일어날 것 같아 어깨를 조금 흔들었더니,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고개를 들은 박우진이었다. 눈을 비비다 그제서야 나인 걸 봤는지 눈이 커진 채로 굳어버린 게 머쓱해 괜히 볼을 긁었다.
"그니까.. 안형섭이란 애가 찾아와서.. 너 깨워달라고 그래서.."
"..안형섭?"
"어, 어."
"..아.."
"..걔가 너 걱정 많이 했어."
안형섭의 이름이 나오자 입술을 삐죽 내밀며 머리를 흐트리는 박우진에 살살 눈치를 보다 이내 말을 꺼냈다.
"밥도 안 먹고 그런다며."
"..어."
"다음 주 시합 중요하다는데 연습도 잘 안 나가고."
너 그런 애 아닌데 그러니까 더 걱정된다고 그랬어. 이런 말을 하니 괜시리 내가 박우진의 친한 친구라도 된 것 같아 민망했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박우진을 보다 이내 고개를 내렸다. 그.. 우승! 우승 해야지.. 하하. 횡설수설 말을 꺼내다 민망함에 억지로 웃어 보였다. 너무 오지랖을 부렸다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어.. 그럼 나 가볼게. 내 어색한 웃음에도 아무 말 없는 박우진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붙잡힌 두 손목에 다시 앉아버린 나는 박우진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연습 잘 나갈게."
"..."
"경기도, 우승하고 올게."
뎅뎅.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걸 알리는 종이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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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망상의 한계치를 여기서 느끼는 것 같다.. 어렵다.. 글잡..
아, 그리고 암호닉을 받았다! 행복했다 >♡<
암호닉 |
0226 안대 윙크 설 오레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