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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락비/우지호] 콩깍지.4 (부제 : 소나무) | 인스티즈

 

 

 

콩깍지. 4

 

 


따라와 빨리.

 

 

 

안입던 옷을 입어서 인지 유독 넓직해보이는 지호의 등을 보면서 나는 끊임없이 그 목소리를 머릿속으로 재생중이다. 처음의 우지호. 지금의 우지호. 하나도 변하지 않은것 같아도 하나도 변하지 않은것이 없다.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르다가 재빠르게 옆으로 가서 섰다. 늘 그렇듯 무신경한 우지호는 한번 눈길주고 제 갈길을 묵묵히 간다. 괜찮아. 아까전까지 그렇게 다정했던 목소리는 거짓말 같다. 입술이 저도몰래 삐죽 튀어나오려다가 맘을 고쳐먹었다. 하긴 내가 이녀석 애인도 아닌데 뭔 쓸데없는 기대야 이여주. 정신차려. 터벅터벅 두사람의 발소리만 오고가던 와중. 결국 내가 먼저 못이겨 입을 열었다.

 

 

" 야 , 우지. "

" 왜. "

 

대답을 하면서 날 쳐다보지도 않는다.

확 진짜.

 

 

 

" 너 아까 어떻게 된거야? "

" 야,이여주. 편의점 들렀다 가자. "

" 어떻게 한거냐니까? "

" 맥주랑 까까 좀 사게. "

 

 

 

확 진짜!

속으로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나는 못이긴 척 그 앨 따라서 편의점으로 가는 호이단보도 앞에 섰다. 흥얼흥얼 평소 좋아하던 힙합을 웅얼거리는 지호를 빤히 쳐다보다가 체념하려 고갤 돌리는 순간 신호가 바뀐 길을 건너기 위해 내 팔을 잡아끌면서 지호가 입을 열었다.

 

 

" 나중에 알랴줌. 기다리셈. "

 

 

그리고 개구진 웃음. 으이그.

곧 편의점에 들어선 지호는 이것저것 고르며 내게 별 의미없는 질문들을 몇 개 던지고 옆집 강아지 이야기 같은 재미없는 남소식을 이야기했다. 우리집으로 가는 내내. 성의없이 내가 대충 대답하고 있는데도 유달리 말을 멈추지 않았다.

 

 

" 비번 누를꺼니까 뒤 돌아. "

" 다 알거든? "

 

 

 

그래도 그냥 기분이 그러니까 뒤 돌 아! 나의 윽박지름에 별말없이 지호가 뒤를 돌았다. 아니 무슨 남자가 여자방 비밀번호를.. 아니지. 얘랑 내가 무슨 남녀야. 어? 왜이래 이여주! 오늘 그런 골목길에 가서 글. 그런일이 있어서 쓸데없이 인식하는 거라고. 과잉인식.

 

 

 

" 야 문고리 만들어서 오냐. "

 

 

 

등 뒤에서 들리는 나른한 목소리에 퍼뜩 비밀번호를 눌렀다. 익숙한 음과 함께 삐리릭. 문이 열렸고 우지호는 어느새 내앞에 와서 나보다 먼저 입실 중이시다. 야. 하고 뒤에서 불러도 묵묵부답 요지부동이시다. 하여튼 저 철판은 알아줘야 돼. 나도 뒤를 따라 신을 벗고 방으로 들어섰다. 언제 찾았는지 신문지에 판을 벌리려고 준비 운동 중이시다. 색색깔의 과자들을 펼쳐놓고 입으로 우겨넣는 지호에게 한 소리하며 나도 비로소 옆에 앉았다.

 

 

 

" 호프갔다와 놓고 또 웬 술? "

" 말도마라 , 먹지도 못했다. "

" 왜? "

 

 

 

내 물음에 흘끗. 지호가 내 눈치를 본다. 뭐. 뭐. 왜. 눈짓으로 되묻자 다시 과자로 시선을 돌린다.

 

 

 

" 야. 것보다 시내갈꺼면서 뭐하러 아까 그렇게 뺏냐? "

" 그르게. "

 

 

내 말에 우지호가 옅게 웃으며 대꾸했다. 오늘따라 수상하다. 맥주 캔을 따고 한번 들이킨 지호는 나가기 전까지 보일러가 최고로 높여져 있던 집안탓에 코트가 영 더웠는지 제 집인 것 처럼 코트를 휙 벗어 던진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보일러를 낮추면서 손에 든 맥주 캔을 땃다.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과자만 샀어 . 하고 투덜대면서. 라면없냐, 라면. 과자를 흡입하면서 지호 역시 투덜거렸다. 없어! 짜증을 내면서도 부엌으로 절로 발걸음이 돌아간다.

 

 

 

" 짜파구리 먹고싶은데, 갑자기. "

" 닥치세요 우지호씨. "

 

 

 

열린 선반은 오늘 아침이 마지막이였는지 텅텅 비어있다. 아휴. 짧은 한숨을 내쉬고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라면 없어. 내말에 우지호가 탄식을 내뱉는다.

 

 

 

" 아-! "

 

 

 

나는 모른척 콧구멍만한 티비를 키고 거실 테이블에 편안하게 등을 기댔다. 별 재미없는 예능에서 여자 아이돌이 나와 깔깔거리며 오버하며 웃는다. 재미있는 건 없나 채널을 돌리며 맥주를 홀짝홀짝 들이켰다. 거기 멈춰봐 좀. 뒤에서 우지호가 뭐라고 궁시렁댄다.

 

 

 

" 야! 멈춰보라고! 이효리나오잖아! "

" 난 엑소볼껀데. "

" 아진짜. "

 

 

 

그래봤자 티비에는 재밋는 것도 없다. 대충 채널을 돌리다 말고 리모콘을 내려놓기 무섭게 지호가 낚아채 아까 전 채널을 튼다. 요란스런 음악이 흐르면서 동시에 우리의 대화도 끊겼다. 맥주먹고 과자먹고 티비보다가 맥주먹고의 반복. 가끔가다 티비에 나오는 애들의 구설수를 이야기하며 웃고 떠들기도 했지만 둘 다 별 대화 없이 화면에만 집중할 뿐이엿다. 얼마나 마셨을까.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나니 맥주는 똑 떨어졌고, 과자는 아직 한참이다.

 

 

 

" 야 얼마나 많이 샀으면 이렇게 남아. "

" 라면먹고싶다. "

" 딴소리하지말고. "

" 맥주 더 사러갈래? "

 

 

 

또? 살짝 취기가 오른 내가 정신없이 웃어대며 대꾸했다. 우지호는 더운지 괜히 고갤 이리저리 돌린다. 내가 모른척 웃으면서 티비를 힐끔 거리자 일어나라며 잔소리 작렬이시다.

 

 

 

" 왜~ "

" 이거 취했네. "

" 뭐~! "

" 일어나 술도 좀 깨게. "

" 코 앞이면서 뭘 또 날.. "

 

 

 

일어나 좀.

결국 팔을 잡아 일으키는 우지호다. 왜 굳이 밖에 나가려고 그러냐. 내가 툴툴대자 어수룩한 목소리로. 더워서 그런다 더워서. 하고 대꾸한다. 보일러 끈지가 언젠데 실없는 소리하고 있네. 밖에 추울텐데. 몸을 웅크리면서 괜히 안 나가고 꿈지럭대자 우지호가 내가 벗어놓은 패딩을 얼굴로 던져버린다. 패딩을 껴입으며 짜증을 있는데로 부리면서

 

 

 

" 그래, 간다 가! "

 

 

 

하고 당차게 말하고 문을 열었지만 찬바람이 뺨을 휙하고 스치는 순간 절로 어께가 오그라 들었다. 간다며? 뒤에서 지호가 킬킬거린다. 간다고 가! 속으로 툴툴 거리며 앞장을 섰다. 가는 길은 대체 어떻게 갓는지 그냥 춥기만 했는데 편의점에 다와가자 역시 바깥바람을 쐬어서 그런지 술이 조금 깨기 시작했다. 어서오세요. 하는 소리와 동시에 우지호와 내가 외쳤다.

 

 

 

" 으~ 추워! "

" 추워죽겠네. "

 

 

 

문 근처의 호빵기계 옆에서 손을 녹이는 나와 다르게 우지호는 들어서자마자 라면코너로 뛰어간다. 어지간히 먹고싶었나 보지. 나는 호빵이나 하나 사갈까. 얼마예요? 하고 카운터에 물어보는데 순식간에 우지호가 카운터로 온다. 한아름 과자와 라면 , 육포 들을 품에 안고.

 

 

 

" 야! "

" 아 왜. "

" 이거 쓰레기 다 우리집 꺼다? 다 안갖다놔?! "

" 내가 들고가면 되지. "

" 웃기지마.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냐? "

 

 

진짜야! 하고 전혀 신빙성 없는 얼굴로 지호가 외친다. 절대 안되지. 나는 지호의 등짝을 내리치며 계속해서 소리쳤다.

 

 

" 안갖다놔? 안갖다놔?! "

" 아, 아파! "

" 맥주는 왜이렇게 많이 들고 왔어! 너 또 우리집에서 죽칠려고 그러지! "

" 야 우리집이 코앞인데 왜 너네 집에서 죽치고 있겠냐?! "

" 그러니까 내말이. 갖다놔라? "

 

 

 

카운터를 보던 여자가 우리를 난감하게 쳐다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경전은 꽤 오래 지속되었고 결국 육포 한 봉지와 컵라면 두개로 타협을 보았다. 끝까지 꽃게랑을 놓지 못하는 우지호에게 집에 있는 과자나 다 먹으라며 딱잘라 말하자 그제야 생이별이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과자를 내려놓았다. 안녕히 가세요. 하는 알바생의 인사와 동시에 문밖으로 나서는데 아까전 보다 추위가 조금 덜하다.

 

 

 

" 쫌생이야. "

" 시끄러-. "

 

 

 

사람도 별로 없는 시각. 한산한 거리는 유독 오늘따라 운치있어보였다. 알코올이 들어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지호와 터덜터덜 걷는 와중 저번에 고등학교 동창 애들과 함께했던 술자리가 떠올랐다.

 

 

 

" 아! 우지호! 나 얼마전에 고딩 동창애들 만났다? "

" 그르냐. "

" 근데 걔들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

 

 

 

말을 꺼내기도 전에 킥킥 웃음이 나왔다. 뭐랬는데, 하는 듯 심기불편한 표정으로 지호가 내 쪽을 쳐다보았다.

 

 

 

" 너랑 내가 사귀냐고 하더라. "

" 어? "

" 말도 안되지 않냐? 내가 진짜 그 말 듣고 어이가 없어서~.. "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나를 여전히 이상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던 지호가 내가 말을 멈추자 황급히 앞으로 시선을 돌린다. 왜저래.

 

 

 

" 야, 왜? "

" 하긴. 말도 안되지. "

 

 

그치?

다시금 내가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그리고선 줄줄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 근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우리가 사귀는 줄 알 수도 있겠더라! 우리가 얼마나 지지고 볶는지 못봐서 그런거지..아마 봤으면 절대! 그런 소리 못할걸! 니가 얼마나 나를 구박하는데. 거의 주인과 노예수준이지 안 그렇냐? 어!? 야 넌 좀 반성해야되. 나같이 착한 친구가 어딧냐고. "

 

 

 

그런데 우지호는 연신 멍청하게

말도 안되지. 말도.. 하는 말만 중얼거리고 있다. 뭐가 그렇게 말도 안되는지.

 

 

" 야. 야. 내말 듣고있어? "

" 어? "

" 왜이래? 취했어? "

" 아니. "

 

 

 

잡아때기는.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흥이 난 채로 내 이야기를 계속했다. 여전히 내 목소리에 우지호가 집중하고는 있는지 모르겠지만서도 신이나서 머릿속에 꾹꾹 눌러담아놓았던 이야기 까지 줄줄 이야기 했다. 밤 탓이다. 모든게 밤에 취해서 그런 탓인가보다.

 

 

 

" 근데 애들이랑 잇는데.. 옛날에 나랑 싸운 애 이야기가 나오는거야. 강지윤이라고. 넌 알려나 모르겠네? 걔 안본지 진짜 오래됐는데. 사실 별거 아니였다? 우리가 싸운거. 진짜 별거 아닌걸로 싸우고 그 뒤로 안보고 있어. 감정 한번 상했다고 거의 남이 된거지. 정말 고딩때는 평생 친구일 줄 알았는데. 그런거 보니까 씁쓸하더라.. 사람 관계라는게 다 변하는 거구나. 싶고.. "

 

 

 

나는 괜히 눈물이 나려고 해서 실없이 웃었다. 지호는 대꾸도 없이 조용했다. 가로등만 꿈뻑꿈뻑 흐리게 앞을 비추고 길가에 꽃이 다 진 나무들이 앙상하게 바람에 나부끼며 음산하게 바람소리를 내면서 휑한 거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초라한 몰골이 꼭 불쌍해보여서 무심결에 나는 입을 열었다.

 

 

 

" 그게.. 꼭.. "

" ... "

" 저 나무처럼.. 꽃이 예뻐도 나중에 다 져서 땅바닥에 질척질척 보기 못나지는 것 같이..좀 부질없다고나 할까.. "

 

 

 

바람이 쌀쌀하게 패딩속으로 파고든다. 나는 몸을 웅크리며 가만히 나를 업어주던 지호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래도 너는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숨긴 채,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호는 코트를 여매며 툭 대꾸한다.

 

 

 

" 요새 감성이 터지시네, 이여주. "

 

 

 

하여튼, 우지호.

나는 지호 모르게 한번 가자미 눈으로 째려보았다.

 

 

 

" 니가 이 누나의 깊은 생각을 어떻게 알겠냐~ 쯧쯧. "

 

 

 

 

내 말에 지호가 옅게 웃었다. 어느새 집에 도착하고 나는 괜시리 이상한 드립을 치면서 무마시키려 오버액션을 하고 우지호는 아는지 모르는지 따라웃으면서 장난을 친다. 다시 들어서서 보니 아까 전의 잔해들이 더럽긴 더럽다.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치솟다가 에라. 다 마시고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다시 자리에 털퍽 주저 않았다.

 

 

 

" 위하여~ "

 

 

 

다시 맥주를 들이키는데, 번뜩. 오후의 문자가 떠올랐다.

 

 

 

" 아. "

 

 

지호는 육포를 이빨로 뜯기에 여념이 없다.

 

 

 

" 나 내일 엠티가야 되는데. "

" 근데. "

 

 

 

근데는 무슨. 내일 가면 술 엄청 먹을텐데.. 내가 어쩌자고 오늘까지 마시고 있지? 눈앞의 안 딴 맥주캔들을 보면서 나는 고뇌에 빠졌다. 뭐가 문제냐는듯이 마셔. 하고 쿨하게 대꾸하는 지호의 말을 못들은 척 내일의 눈앞에 펼쳐질 상황들을 곰곰히 떠올려 보니 이건 미친짓이다.

 

 

 

" 아아아! 나 안주만 먹을래. 너 다 마셔. "

" 뭐? "

" 나 내일 가서 숙취로 골골대고 싶지 않거든? 너 다 마셔!"

" 장난치냐? "

 

 

 

재효선배의 얼굴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눈앞의 우지호는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는 중이지만 나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먹다 말아 조금 푸석한 과자를 입에 계속 집어넣었다.

 

 

 

" 안가면 되잖아 그럼. "

" 말이라고 하냐. "

" 신입생도 아니고 뭔 문제야 . 개인사정으로 못간다고 해. "

 

 

 

무슨 개인사정. 내가 되묻자 우지호는 곰곰히 생각하는 듯 하다가 티비에서 들리는 소리를 따라하는지 사투리를 흉내내며 개구지게 대꾸했다.

 

 

" 내랑 놀아야 된다꼬. "

 

 

염병. 싫거든.

 

 

 

" 안돼. 재효선배도 오고.. "

" 재효? 금마가 눈데. "

" 고마해라? "

 

 

 

혼자 킬킬대던 지호가 알겠다는 뜻으로 합죽이를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것보다 재효선배가 누군지 모른다고? 내가 몰라? 하고 되묻자 다시 육포를 입에 물며 고개를 끄덕이는 우지호. 옛날에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야기 했던 것 같은데.

 

 

 

" 내가 옛날에.. 1학년때 엄청 이야기 했던. "

" 1학년때? "

" 니가 방울토마토 막 먹으면서 짜증내고.. "

" ....아, 아아! "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지호가 떠오른 듯이 고개를 갑자기 쳐들고 소리쳤다. 기억나지? 재효선배를 떠올리면서 히히 웃는 나를 지호가 그때와 비슷한 썩소를 지으며 내려다 본다.

 

 

 

" 뭐.. 과탑? "

" 응. "

 

 

 

연신 웃음꽃이 핀 내 얼굴을 보더니 지호가 같잖다는 듯 말하며 맥주를 들이킨다.

 

 

 

" 엠티 가봤자 아무것도 안생겨, 술먹고 뻘짓안하면 다행이지. "

 

 

 

맞는말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뭔가 짜증나면서 창피한 기분에 양볼이 달아오르는 것 같다. 정작 지호는 대수롭잖은데 꼭 뭐라도 이뤄지기를 기대하는 거냐는 식인 것 같아서 급하게 말을 바꿧다.

 

 

 

" ...아알어 나도! 그런 기대같은거 안하고 그냥 가는거야! "

" 니예니예. "

 

 

 

참나. 무슨 기대를 한다고 내가. 티비소리는 여전히 요란하다. 아까 전 가요무대는 끝난건지 예능프로 재방송이 한참이다. 나는 안주만 먹다가 결국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벌써 두 캔째 따버렸고 지호는 거침없이 달리고 계시다. 비몽사몽. 고개를 푹 숙이고 흔들흔들 정신없는 몸을 가누다가 이제 그만 마셔야 겠다 싶은데 거실 테이블에 엎어진 지호가 들릴듯 말듯 나를 부른다.

 

 

 

" 이여주. "

 

 

왜.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나는 그런 생각으로 대꾸했다. 예능프로 속 개그맨들이 이리저리 넘어진다.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는데 우지호가 아까 전 보다 또렷하게 내 이름을 부른다.

 

 

 

" 이여주. "

" 왜. "

 

 

 

나는 여전히 건성으로 대꾸했다. 지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 그...너랑..내가. 왜 좀. 그.. 보기에 아름다운 사이는 아니지 않냐? "

" 뭐래. 왜 갑자기 시비야? "

" 아니..하...그...뭐냐. 그게 아니라. "

 

 

 

취한건지 머리를 마구 헤집는 지호를 가만히 쳐다보는데 잠시 잠잠하게 생각하던 지호는 고갤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 그러니까 내말은. "

 

 

 

텔레비전은 여전히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볼륨을 좀 낮출까. 이런 생각을 하는와중 지호의 입이 열렸다.

 

 

 

" 나는 피고 지고 떨어져서 더러워질 걱정 안해도 된다고. "

 

 

 

나는 그저 가만히 그 목소리를 들었다. 등뒤의 시끄러운 소리들이 이상하게 사그라들고 점점 지호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 우리는 꽃처럼..그. 뭐냐. 그렇게 피고. 지고. 뭐 이런 관계는 아니라고. "

 

 

어쩐지 목 아래쪽이 따듯해지면서 무엇인가 울컥 치고올라왔다. 콧잖등이 짠하게 울리고 주책맞게도 울음이 날것 같았다. 술에 취해 정신없이 내뱉는 소리일지도 모르는 우지호의 한마디가 왜이토록 고맙고 감동적인지 모르겠다.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참아내고 눈을 꿈뻑거리며 과자봉지를 만지작 거렸다. 괜히 틱틱대는 말을 내뱉으면서.

 

 

 

" 웃기지마. 너도 똑같지 결국 뭐. "

" 아, 진짜! 이여주. 하여튼 의심병. "

 

 

실실 웃던 지호가 좋아. 하고 다시 입을 연다.

 

 

" 좋아. 그럼. 나는 소나무 하면 되겠네. "

" 소나무? 참나. "

" 일년 삼백 육십 오일 푸른 소나무 하면 되겠네. 됐지? "

 

 

 

되긴 뭐가 되 바보야. 지호는 내말에 간만에 활짝 웃어보였다. 웃기는 녀석이다. 그런 유치한 하소연에 일일히 대꾸하면서, 또 그 대답 역시 유치하고 오글거리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난 늘 지호에게 위로받는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3년동안 묵묵히 내 옆을 지켰다. 가끔씩은 꼭 남자처럼 도와주기도 하고, 가끔은 둘도 없는 웬수같은 소리도 해가면서. 미련할정도로 우직한 사람. 나한테 우지호는 그런 친구다. 꼼수 쓰지 않고 맘에 없는 소리는 죽어도 못하는. 그래서 많은 남자들과 다르게 우리는 한결같이 친구였는지도 모른다. 웃으면서 남은 맥주를 들이키던 지호가 테이블위로 쓰러지며 마지막으로 내게 말한다.

 

 

 

" 그러니까 이여주.. 걱정말라고. 소나무는 눈이 오던 비가 오던. 겁나 푸르거든.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

" 뭔소리야.. "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려 씰룩거린다. 지호의 검정머리칼으로 괜히 손이가서 장난처럼 만지작 거리는데 아직 잠들지 않은건지 눈을 감은 채 지호가 마지막으로 웅얼거린다.

 

 

" 계절이 변하고 , 날씨가 변해도. 절대 안 지니까... "

 

 

그말을 끝으로 지호는 골아떨어졌고, 나는 잠든 얼굴을 마주보며 차가운 테이블 위로 얼굴을 갖다대고 누웠다.

고맙다, 우지호. 속으로만 너에게 말한다. 언젠가 말할 날이 있겠지 , 하고 오늘도 미루면서.

 

 

밤은 점점 저물어가고 있었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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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진짜 좋다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내취향 어찌알고 이렇게 저격해여ㅠㅠㅠㅠㅠ진짜로!!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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