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민. 23세.
다정다감한 순애보이며, 책임감이 강함.
건널목에서 거의 죽어가는 그녀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
그녀와 함께 은신중.
정세운. 21세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나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다.
영민의 가장 친한 친구로,
특유의 나른한 표정을 짓는 그의 속내는 의심스럽다.
1. 치명적
"사람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거야."
"........."
"지금은 네 편을 들지만 언제든 널 배신할 수 있는 게 사람이야."
"넌?"
"물론 나도 포함이지. 그리고 지금 널 배신하려하는 게 나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나 떠나. 아마 며칠 네 곁에 없을거야."
저렇게 태평한 모습으로 떠난다는 말을 하는 영민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내 곁에 없을 거라니.
"나 아직 아파!"
"알아."
"알면서 떠나겠다고?"
내겐 몇년 전 사고로 인해 다리신경이 마비되어 틈만 나면 다리힘이 쭉 빠져 주저앉게 되는 희귀병이 생겼다. 늦은 밤 교통사고였고, 주변엔 어둠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죽어가는 도중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길을 잃고 우연히 이 곳을 지나던 행인,
지금 내 곁에 머물러준 임영민이었다.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간 영민 덕에 생명은 건진 나였지만, 다리는 그 당시에 이미 심하게 손상된 상태였다. 의사는 내게 가망이 없다며 다리를 잘라내자고 권유했지만, 영민은 최선을 다해보자며 1년 간 내 곁에 붙어 각별히 보살펴주었다. 그의 보살핌 덕분인지 운좋게도 난 1년 간의 약물치료 끝에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이내 정상인처럼 돌아갔다. 그러나 시도때도 없이 주저앉는 병은 고쳐지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더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하다 판단했고, 그렇게 나와 임영민은 병원을 나왔다. 다리는 거의 다 나았지만 틈만 나면 주저앉는 병 때문에, 이제 난 곁에 누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삶으로 변해버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걱정은 없었다. 병원을 나오면서도 내 곁을 평생 지켜주겠다 약속한 너가 있었기에.
이젠 그 없이는 살 수 없을 만큼 임영민에게 많은 의지를 했다.
근데 이제와 너가 떠나버리면 나 혼자 어떻게 살라는거야.
"나 혼자서는 못살아. 알잖아?"
"부탁한 사람이 있어. 나 대신 그 사람이 옆에 있어줄거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내가 말한 건 그저 날 혼자두지 말라는 뜻이 아니야. 내 옆자리에 임영민, 너가 없으면 못 사는 거 잘 알잖아. 나는 애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 외침이 간절했는지, 때마침 다리의 힘이 풀렸고 난 금세 주저앉았다. 물론 재빨리 나를 낚아챈 영민에 의해 몸이 땅에 닿진 않았지만.
"이거봐, 나 아직도 이렇게 아파. 너니깐 나 안 다치게 하잖아."
"그 사람도 너 절대 안 다치게 할거야."
"싫어. 가지마. 왜 그래, 임영민"
내 허리를 가볍게 감싸안은 채, 나를 다시 일으키려는 영민에게 투정 부리듯 그의 목을 두 손으로 꽉 끌어안았다. 안자마자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 아기새처럼 나는 그를 꽉 붙들었다. 날 버리지마, 영민아. 이에 그는 잠시 나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그러나 이내 내게 시선을 맞추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해결할 일이 있어. 널 데려가기엔 너무 위험해. 그래서 그래."
"...거짓말. 근데 왜 배신이라는 말을 써."
"배신에 나도 포함이라고 했지, 나라고는 안했어."
"........"
"내가 입버릇처럼 말한거 기억하지.
나 없는동안 누구도 믿으면 안된다고, 알지?"
"......알아"
"너 이렇게 만든 사람 잡기 전까진, 네 편이라고 확실하더라도 절대 따라가서도, 믿어서도 안 된다는 말. 장난처럼 하는 말 아니야."
영민의 단호한 저 표정과 말투는 마치, 아이에게 유괴범을 따라가지 말라 가르치는 엄마의 모습 같았다.
그리고 그에게 답하는 내 모습은,
"데려가줘. 그렇게 불안하면 데리고 가면 되잖아."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 투정부리는 아이였다.
그리고 아무리 투정을 부려도 임영민이 떠나야하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가씨 A
W. 슈가링
"안녕하세요, 정세운입니다."
"...네"
지금 내 눈 앞에 임영민을 대신해줄 낯선 남자가 서 있다. 바르게 자신을 소개하는 모습과 차분한 목소리.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세운이, 내 친한 동생이야. 믿을 만한."
임영민은 세운이라는 남자를 만나기 전부터도 저 말을 계속 했다. 믿을 만한 녀석이야. 걱정 안해도 돼. 처음엔 나를 안심시키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마주쳐보니 영민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정말 믿음직해보였다. 저 사람이라면 내 몸 하나쯤 받아줄 만큼 건장해보였으니깐.
허나 그렇다고 세운이 맘에 든 것은 아니었다. 세운이 아니었다면 영민은 아무에게도 날 맡기지 않았을 거니깐. 그는 차라리 미운 편에 속했다.
정말 임영민이 나를 떠나는 걸까. 난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영민이 날 두고 농담따윈 하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날 맡아줄 사람이 찾아오니 두려웠다.
일주일 전 그는 싫다고 매달리는 내게 일이 끝나는 대로 빨리 올거라 설득했다.
"정말 믿을 만한 녀석이야. 걱정 안해도 돼"
"알았어, 그럼 어디 가는지라도 말해줘"
"........"
"말해주면 더이상 붙잡지 않을게. 너가 어디가는지도 모른 채 있고 싶지 않아"
"....3년 전 네 사고장소"
"뭐? 거길 왜 다시가는데?"
그가 내게 대답한 장소는 너무 뜻밖이였다. 생각하기도 싫은 장소에 너가 왜...나는 가슴이 두근대며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영민은 두려워하는 내 모습에 덜덜 떠는 손을 꽉 잡아주며 귓속말로 중얼거렸다.
"범인을 잡은 것 같아. 내 미끼를 물었어."
그 말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며 풀썩 주저앉았다. 범인을 잡았다고? 가슴이 철렁했고,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 숨이 가빠졌다. 정말 잡은거야? 이제 나 안심할 수 있는거지? 가쁜 숨으로 내 손을 잡은 영민을 끌어당겨 그의 품에 안겼다. 영민은 그런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아직 확실하진 않아. 그래서 확인하러 가야돼"
그의 말에, 순간 그 동안의 일들이 떠올랐다. 나를 차로 친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누구길래 그 이후에도 나를 끈질기게 죽이려 하는걸까. 그가 누굴지 내게 대체 왜 그러는지, 난 너무나 궁금했다.
영민과 같이 사는 아파트에 강도 침입. 이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으나, 또 강도 침입. 그 두번 다 영민이 일을 나갔을 시간에 나를 노렸다. 집에 혼자 있던 내게 무자비하게 덤볐으니깐. 그 뿐만이 아니다. 장을 보러나가겠다고 밖을 나갔을 때도 소매치기를 위장한 칼부림이 있었다. 이는 영민과 함께 나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쯤되자 임영민은 내 교통사고가 단순한 사고가 아닌, 고의적인 사고라고 판단을 내리고 그 범인이 아직까지 나를 노리고 있음에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이를 피하기 위해 우린 사람들 모르게 떠나왔다. 영민이는 나를 지키기 위해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숨어 살았다. 과연 난 임영민 없이 지금끼지 멀쩡히 살 수 있었을까. 강도 침입이 일어났을 때, 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내 곁에 재빨리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그 땐 이미 난 죽었겠지. 처참하게.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이었다.
영민은 바닥에서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나를 어루만지며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춘 뒤 다정스레 말했다.
"더 이상 불안에 떨게 만들지 않을게"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
"그러니깐 너도 맘 편히 날 보내줘. 꼭 잡을게"
"그치만 너 조심해야돼. 너 없으면 난..."
"알았어. 약속할게"
임영민을 보내줘야한다. 내 신변을 위해서 그를 전장에 보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만. 내가 행복한 것을 영민이도 원하니깐. 아니 우린 이제 행복해질 거니깐. 이정도 위험쯤은 감수해야한다. 이미 영민이는 갈 생각밖에 없었다. 가서 범인을 잡고 행복해질 생각만. 그래서 이렇게 침착한 걸까. 나만 괜찮으면 되겠지. 그와의 미래를 위해 며칠쯤 영민이가 없으면 또 어때. 난 선택지가 없는걸.
내가 그에게 해줄 것은 다치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
.
.
"부탁할게, 세운아"
영민은 세운과 잠시 할 말이 있다며 여주를 잠시 떼어놓았다. 세운에게 부탁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주저앉는 병을 가진, 아직 많이 아픈 애였고 특히 마음은 더욱 더 여린 여자였기에. 세운은 그가 세상에서 제일 의지하는 친구였고, 그가 여주를 잘 지켜줄 거란 믿음이 있었다.
"많이 아픈 애야. 힘풀린 것 같아 보이면 바로 잡아줘야돼"
"알았으니깐 가요 형. 나 믿잖아요."
"믿지. 맡길 사람이 너밖엔 생각이 안 났어. 미안해, 2년 만에 연락해서는"
"괜찮다니깐요"
"해결하는 대로 금방 올게. 아, 그리고 혹시나해서..."
갑자기 영민의 눈이 낯설게 변하였다.
그의 모습은 마치 이빨이 날카롭게 들어선 호랑이같았다.
"쟤 건들면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