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아가씨가 된 기분이야.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삶.
영민아. 넌 예쁘게 가꿔진 날 보며 어떻게 생각할까. 너에게 미안하지만
어쩌면, 아주 어쩌면 내가 널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
3. 포카리 향
가는 길은 굉장히 멀었다. 출발하기 전엔 밝은 대낮이었는데,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어 밖은 어둑어둑했다. 직접 운전대를 잡은 세운은 뒷자석에 앉은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가는 길에만 몰두했다. 표정 또한 밝았던 아까와 달리 차갑게 정색한 얼굴로 운전만 하니 어딘가로 끌려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두려움보다는 새로운 곳에 간다는 설렘과 떨림이 가슴을 조여왔다.
"일어나요"
가는 길이 멀다보니 나도 모르게 잠에 들었나보다. 오랜만에 들린 그의 음성에 그제서야 눈을 슬며시 떴다. 화창한 햇빛. 최근에 받아본 적 없는 따스함이었다. 너무 눈부신 나머지, 나는 눈을 뜨지 못하고 계속 부비적거렸다. 여긴 어디야. 이 곳이 어딘지 창 밖을 내다보는데, 세운이 차에서 나와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자, 손 잡아요. 그렇게 그의 도움을 받아 차에서 내렸을 떄, 난 내가 지금 마주한 경치에 대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이 곳은 상상 그 이상으로 훨씬 더 큰 대저택이었다.
이 곳도 역시 산 속이긴 했다. 그러나 그 전 살고 있는 집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활기차게 지저귀는 새들과 시원하게 들리는 물소리, 맑은 하늘까지 자연이 선사한 선물이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내가 차에서 내렸을 땐 이미 그의 영지에 들어온 후였고, 이에 어디까지가 그의 땅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눈 앞에 보이는 궁전같은 집을 보며 그의 능력치를 감탄할 뿐.
"이 곳이 내가 살 집인가?"
어마어마하게 크고 넓은 이 저택을 바라보면서 벌써 내 것인 마냥 미소가 지어지는 건 뭘까. 이기적인 년. 영민이를 위험에 처해놓고 너 혼자 아가씨처럼 살 길 바라는 거야? 내 양심이 작게 소리쳤다. 아주 자그만하게. 그러나 행복에 취한 내 귀에 들릴 리 만무했다.
"내가 이 곳에 있어도 될까요?"
"왜요, 안 믿겨요?"
"나 지금 어때보여요?"
들뜬 내 모습에 세운은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은데."
내가 행복해보인다니. 그와 있을 때 행복이란 단어가 나오게 될 줄 정말 몰랐다. 내 행복은 임영민 말고는 없을 거라고 단정했으니깐. 넘치는 사랑을 받아본 게 영민이가 처음이었고, 평생 그와 살면 행복할 거라는 착각을 했었다. 범인이 내 삶에 침투하기 전까지는.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고, 숨어산 그 집은 행복하기 위한 도피처로 전락해버렸다. 지금, 가슴이 벅차고 설렘으로 가득찬 이 기분. 이게 행복일까.
나는 종종 걸음으로 저택 외곽을 빠르게 훑었다. 내가 며칠 간 머물 곳, 이 아름다운 곳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눈에 담고 싶었다. 이 설렘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다. 조금만 더 행복에 취하고 싶었다. 그런 나를 세운은 멀리서 지그시 지켜볼 뿐이었다.
아가씨 C
W. 슈가링
"여주씨, 피곤할 텐데 이만 들어가 자요."
도착한 지 한 시간쯤 되었을까. 한참을 신나게 구경하다 그의 앞에 섰을 때, 세운은 제 손에 찬 시계를 흘끗 보더니 들어가자 재촉했다. 하늘은 빨간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해가 지면서 아까의 따스함은 사라지고, 몸에는 찬 기운이 점차 돌기 시작했다.
"네, 제가 너무 돌아다녔..."
그 때, 갑자기 발이 저리며 풀썩 주저앉게 되었다. 어쩐지 너무 오래 서있는다 싶었어. 게다가 한참을 뛰다시피 걸었잖아. 가엾게 주저앉은 내게 세운이 다가왔다. 그는 영민과 달리 날 다루는데 아직 익숙치 않은 터라, 내가 땅에 급히 주저앉을 때까지 아무 모션도 취하지 않았다. 그 생기없던 눈동자가 동공지진하듯 이리저리 움직일 뿐.
"어, 어떡해. 순간 까먹었어요. 누나 아픈거."
"저도 3년 째 제 몸 하나 제대로 못 가누는데, 어떻게 바로 잡겠어요. 괜찮아요."
"아픈데, 설 순 있겠어요?"
여기 딱딱한데, 다쳤겠다. 세운은 무릎을 꿇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날 걱정해주는 사람, 영민이 말고는 처음인데. 그래서일까. 나를 끌어올리며 제 몸에 기댈 수 있게 내 허리를 끌어당긴 세운에게 묘한 감정이 들었다. 영민이가 아닌 다른 남자의 손길. 그 낯선 손길에 알 수 없는 쾌감과 희열이 느껴졌다. 아까의 들뜬 기분이 아직 남마있는 듯 했다. 아직 걸을 힘이 돌아오지 못한 난 세운에게 기대며 그의 귀에 작게 중얼거렸다.
"나 한 번 절면 하루종일 못 움직이는데."
이는 거짓말이었다. 다리의 힘이 풀리는 건 그 순간이며, 주저앉고 나서 한 몇분 후면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었다. 그저 그가 날 안쓰럽게 쳐다보는 게 좋았을 뿐.
"아, 그럼 방까지 못 가겠네."
"아무래도 세운 씨가 나를 방까지 데려ㄷ...."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운은 나를 번쩍 들어안았다. 안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발칙한 상상을 했는데, 정말 이뤄지다니. 그의 품에 안겨있는 이 촉감이, 느껴지는 나른한 향이 내 숨결을 자극했다. 가슴 한 쪽이 저리고, 간질거리는 느낌. 아프다. 다친 건 몸이 아픈게 아니라 맘이었다. 그의 목을 감고있는 내 두 팔이 살며시 떨렸다.
-
저택 안은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컸다. 내부는 복도를 걸치고 여러 개의 방이 미로처럼 펼쳐있었다. 집 안에서 길을 잃는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이 수많은 방을 지나치며 나를 안고 있는 그가 정말 대단한 사람임을 다시 한번 체감했다.
스물 한 살에 이렇게 좋은 집을 가지다니. 이런 남자를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약았게도, 나는 세운에게 안겨 방에 가는 동안 그것만을 바쁘게 계산하고 있었다. 그렇게 십 분 정도가 흐른 뒤 집 안 깊숙이까지 들어왔을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임시로 지낼 방에 도착했다. 방은 되게 아늑했다. 물론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큰 방이었지만, 어렸을 적부터 지금껏 꿈꿔온 단아한 방이었다.
"방 괜찮아요?"
"...지금 내가 꿈 꾸는 건 아니죠?"
"그럴리가."
그의 말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이게 그 사람의 품에 안겨있어서 뛰는 건지, 단순히 방이 예뻐 그런 건지 분별되지 않았다. 아까 처음 이 곳에 도착할 때처럼 너무 들떠버린 나는 안겨있는 세운의 품을 끌어당겼다. 왜 안았는지는 나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냥 끌림으로 안아버렸으니깐. 세운은 움찔하다가 이내 내 포옹을 받아주었고, 그의 쳐진 눈가는 미소짓듯 더욱 휘어졌다.
"내려줄게요."
그의 품에 안겨있는 날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는 성큼성큼 걸어 그 푹신한 이불 속에 나를 포근히 내려놓았다. 새 이불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고, 그 향에 취한 듯 나는 눈을 감았다. 그에게서 나는 향이 여기서 왔구나. 이불 속에서 시원한 포카리 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정신없이 취한 내게 세운은 침대에 앉아 다정스레 물었다.
"아까 다치지 않았어요?"
"멀쩡해요. 조금 아프긴 하지만"
"미안해요. 다음엔 꼭 잡아줄게요"
사실 아프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계속 그의 걱정을 사고 싶어졌다. 나 때문에 안달난 고양이처럼 만들고 싶었다.
"세운씨, 그거 알아요?"
"어떤 거요?"
"저는 잠을 혼자 못 자요."
그에게서 나는 포카리 향이 사랑에 빠지는 묘약인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침대에 겨우 십 센티 떨어져있는 그에게 이런 도발적인 말을 할 리가 없다. 이 말은 영민이에게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내 자극적인 말에 세운은 희미하게 웃었다. 생각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 그의 한 쪽 눈썹이 들썩였다. 사실 그가 당황할 줄 알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태연하네. 오히려 생각치도 못한 말로 내게 되받아치는 그였다.
"그럴까봐,"
"......."
"침대도 일인용 치고는 꽤 큰 걸 갖다놨는데"
어때요, 재워줄까요? 라고 능청스럽게 묻는 그를 보며 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내가 졌네. 처음부터 느꼈지만 그는 본래의 날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맘 속을 이미 훑은 것 같달까. 눈치가 빠른 사람이면 조심해야 하는데, 경계해야 하는데. 능구렁이 같
은 그를 피해 도망가야 하는데. 왜 오히려 그 속에 숨고 싶을까.
나는 여우였다. 지금 저 능구렁이에 못지 않을 정도로 뻔뻔하게 그를 원하고 있었으니깐. 어릴 적에 고아원 동기들이 했던 행동들을 그대로 따라하는, '여우' 였다.
.
.
.
내가 지내던 고아원은 그리 좋은 시설이 아니었다.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었고, 아무 도움없이 방치해놓은 참으로 위태로운 곳이었다. 그 내부는 더욱 치열했다. 입양을 할 목적으로 고아원을 찾은 사람이건 다른 불순한 의도로 찾은 사람이건 상관없이 그게 누구든, 어린 우리들은 달라붙었다. 일단 그들의 곁에 착 붙어서 돈이 많은 양반인지 아닌지 체크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었다.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는 사람이면 그에게 달라붙어 아양을 떨었고, 어떻게든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받아내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날 저녁은 또 굶어야하니깐.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돈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아양을 떠는 친구들 가운데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던 고고한 여자아이였다. 이에 원장은 내게 많이 혼을 냈던 걸로 기억한다. 그녀는 한 몇십 대씩 내 종아리를 치셨고, 이 후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하곤 했다.
"여주야"
"....네"
"네 친구들이 밥 빌어먹는 모습이 하찮니?"
"........"
"너는 예쁘니깐 가능할 텐데.
돈 많은 부모 찾거나, 아님 돈 많은 남잘 무는 일.
그런데 과연 네가 할 수 있을까?"
나를 19년동안 지켜보며 날 꿰뚫던 원장도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다. 내가 아무리 고고한 척을 한다고 하더라도, 마음까지 고고하진 않다는 걸. 내 마음 속의 욕망은 고아원에 있었던 그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컸다는 걸. 그녀는 이런 내 탐욕스런 속내를 몰랐다.
그리고 지금, 내 속에 숨겨져있던 욕망이 서서히 베일을 벗고 있다. 돈도 많고 넘치는 사랑을 선물할 것만 같은 이 남자에게.
"그럼 재워주세요. 첫 날이라 악몽을 꿀 거예요"
"...진심이예요?"
"영민이는 늘 내 곁에 있어줬어요. 영민이 대신이잖아요"
"........"
그는 말없이 누워있는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미 져버린 해는 방 안을 어둑하게 만들었다. 잘 보이지 않는 탓에 그가 입고 있는 하얀 셔츠가 새하얀 이불과 겹쳐보였다. 지금 저 품에 파고든다면 이불 속 향이 그대로 날까. 아까 느꼈던 따뜻한 온기까지 다시 느낄 수 있겠지. 그래, 이미 난 포카리 향에 취한 상태였다. 그리고 세운 또한 점차 어둠에 취해가는 것 같았다. 그의 나른했던 표정이 퇴폐적으로 변해가고 있었으니깐.
"형이 나보면 죽일려 들겠네요"
"..자고 싶어요"
"같이 죽어버릴까요?"
세운은 그 섬섬옥수같은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도 제법 눈가가 풀려보였다. 그렇게 점차 둘의 사이가 가까워지는데, 갑자기 영민이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도망가, 김여주. 정세운에게서 도망가. 아무나 따라가지 말라고 했잖아. 도망가.'
지금 내가 하는 짓은 영민이에게 못할 짓이다. 하지만 그의 말을 지킬 것이었다면 애당초 세운을 따라나서지도 않았다. 이미 날 놓은 상태였고, 중독처럼 몸 안에 퍼져가는 세운의 향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그에게 만취된 나는,
"여기에 눕혀보고 싶었어요"
그가 지금 내게 건넨 말이 얼마나 수상쩍었는지 전혀 생각치 못한 채, 그와 깊은 잠에 빠졌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