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은 파멸이, 빛은 좌절이 되는 세상.
너를 보아서도, 나를 보아서도 안 되는 세상.
너는 나의 파멸이 되고, 나는 너의 파멸이 되는 세상.
우리는 그런 세상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 세계 속에 몸 담고 있었다.
처음부터 선택권이 주어진 적이 없었다. 우리에겐 선택지도 없었다. 알지 못하는 그 세상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게 전부라고 받아들이며,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
우리의 숙명이었다.
La Couleur
너는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나와 말 한 마디를 나누기 전에 쓰러져버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나약하게 쓰러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이 곳 그 어디에도 나를 지켜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나의 엄마처럼, 그렇게 유약하게 바스라지고 싶지는 않았다.
심호흡이 필요했다. 눈을 감고 숨을 쉬었다. 익숙한 어둠이 나를 감싸고, 익숙한 흑이 내게 펼쳐졌다. 그럼에도 내가 아주 약간의 힘으로 내 눈꺼풀을 들어올린다면 결국 나는 수만가지의 색을 감싸안아야만 할 것이다. 결국 나의 파멸도 감싸안아야만 했다.
고개를 떨어뜨렸다. 적어도 한 가지만 본다면 덜 어색한 색이겠지, 생각하며. 아니, 어쩌면 눈을 떠도 흑백일지도 몰랐다. 이 세상의 모두는 흑백이니까. 색을 보는 자는 죄악으로 취급되니까. 그저 모든 것이 흑백으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아저씨는, 엄마의....파트너야."
"...그게 뭔데요?"
"엄마의...세상."
토악질이 나오는 상상이었다. 그 빌어먹을 군복이 뭣 같았다. 그는 너무도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 덕분에 엄마는 끌려갔고, 그는 멀쩡히 살아남았다. 아, 그런 새끼가 제 발로 걸어다닐 수 있었던 건, 내게 당부를 할 수 있었던 건, 이 지옥같은 파멸을 가르쳐줄 수 있었던 건, 그가 색을 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는 뜻이겠지.
강자들은, 색을 보면서도 끊임없이 살 수 있었겠구나.
그런 생각에 도달했다. 마침내 눈을 뜨기로 결심했다. 나의 파멸의 날을 마주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이었다.
"....생각보다....훨씬....."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짜릿한 것이었다. 색을 본다는 건, 내가 만지는 모든 것이 제각기 다르게 숨 쉬고 있다는 걸 깨닫는 건. 그제서야 깨달았다. 엄마가 그렇게 내 얼굴을 감싸 안고 울었어야만 했던 이유를.
그럼에도 용서할 수는 없었다. 결국엔 남은 건 나 뿐이었으니까.
"하, 이렇게 죄다 색을 입혀서..."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빌어먹을 윗대가리 놈들은 본인들 눈에 만족스러운 것을 추구했던 모양이었다. 죄다 다른 빛으로 휘감긴 물건들이 그의 반증이었으니까. 굳이 돈을 들여서까지 이렇게...
"으,"
단말마의 신음이 느껴졌다. 내게 파멸을 이끈 그 아이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생각보단 빨리 일어났네."
"..."
"토할 것...같지 않아?"
아이는 눈을 감은 채 끄덕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채 맞이한 색이었으니, 그럴만했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
아이는 적당히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높낮이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내게 태연함을 묻는 것 치곤 본인도 꽤 태연한 축에 드는 목소리였다.
"너도 이미 태연하게 묻고 있잖아."
"...."
"...익숙해져."
"...어디에?"
"..."
"너한테, 아니면 색한테?"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내가 그와 뭔가가 있다는 게, 태어나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지만 둘 사이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게 느껴지는 것은.
"...색한테."
일단은 거짓말을 해두기로 했다. 실은 나도 아는 것이 없으니 해줄 말이 없는 것도 맞았지만, 아주 조금 알고 있는 지식으로 구태여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에게 시선을 두자, 어느 새에 그는 눈을 떠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김재환."
"...응."
"3학년 4반."
"...응."
"너, 김여주지?"
"...응."
"...그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이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마치 내가 그를 태어날 때부터 알았던 것처럼, 처음부터 우리가 엮인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생경하지 않은 모든 것이었다.
"...이상하네."
"..."
"나는 너를 안 적이 없는데."
"..."
"왜...다 알고 있었던 것 같지."
어느 새 그는 나를 올곧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 속에는 혼란스러움과 확신이 함께 가득했다.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싶지만, 정말로 그랬다. 그 시선에 제대로 답을 해줄 수는 없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대답해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엄마의...세상."
그 빌어먹을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머릿 속에 울려퍼졌을 때,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그 끔찍한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흑백이 색으로 가득 채워졌다. 색을 얻은 세상은 이제서야 공기를 처음으로 맛 본 것처럼, 그렇게 상기되어있었다. 존재감을 열렬히 드러내며, 그렇게 나에게 펼쳐져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 마냥, 그렇게 내게 펼쳐져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처음부터 내 곁에 있었던 것 같은 세상에 익숙해지기 위한 방법이었다. 잔뜩 숨을 들이쉬고 바라본 나의 세상은, 여전히 내게 펼쳐져있었다. 여전히 올곧게, 혼란과 확신을 안고, 그렇게 펼쳐져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책 속에 있는 그 단어들이 무슨 뜻이었는지. 계절의 이름은 무슨 뜻이었는지. 왜 수많은 사물들에 이름을 붙였던건지. 하필이면 왜 그런 이름을 붙였던건지.
그제서야 알았다. 나의 세상은 여름이라는 것을.
나의 세상은 눈이 부시도록 초록빛의 파란 하늘 속의, 여름의 중간이었다.
아아, 한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