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입술엔 피가 묻어있어. 빨갛게 뭔갈 잡아먹은 것 같이.
(이번 화는 BGM 필수입니다)
"그거 하나만 줘요"
그의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그 땐 그저 스치기만 했었으니깐. 차분한 듯 잠긴 그의 목소리는 내 귀를 간지럽혔다. 이에 난 홀린 채로 멍하니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은 조각 같았다. 나른하게 쳐진 눈꼬리, 그 밑에 애교있게 자리잡은 눈가 주름부터 이마부터 내려오는 콧대까지 완벽, 그 자체였고. 아, 입술. 핑크빛으로 물들인 도톰한 입술. 잡아먹고 싶게 생긴, 그 입술까지 완벽했다. 하, 이러면 반칙이지. 하나하나 다 완벽하면 헤어나올 수가 없잖아. 그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탐스러움'이랄까. 계속 봐도 질리지 않을 얼굴을 소유한 그였다. 더불어 그의 강렬한 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 맑고 서늘한 향은 이미 내 신경을 마비시킨지 오래였으니. 계속 감탄해도 모자랄 그였다.
내가 멍하니 있자, 그는 고개를 갸웃대다 씩 웃으며 내 입술에 물린 담배를 제 입에 가져다댔다. 잠깐 빌려가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이던 그는 곧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찰칵 불을 붙였다. 그렇게 반듯하게 생긴 그가 담배를 피니 현기증이 났다. 타락한 아름다움. 그의 퇴폐미에 앞이 흐릿해지는 기분이었다. 한 입을 야무지게 빨아들인 그는 하얀 숨을 내쉬며 날 바라보았다. 가늘게 뜬 그의 눈매는 날 훑듯 날카로웠다.
"입술이 예쁘시네요"
"......"
소름이 끼쳤다. 그가 던진 저 말, 내가 방금 그에게 하려던 말이었다. 어째서 내가 하려던 말을 그가 내뱉고 있는 거지. 환각을 보는 것일까. 카페인과 니코틴이 엉켜붙어 환각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보길 바랬던 그가 내 눈 앞에 있고. 그것도 모자라 그와 간접키스를 하고 있으니. 게다가 지금 내 속까지 읽고 있잖아. 그러나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도 그는 내 눈 앞에 있었다. 분명 존재하는 인간이었다.
"고마워요"
내가 벙찐 사이, 그는 이미 한 개비를 다 피웠다. 아득하게 빨리도 가는 시간이 원망스러웠다. 목적이 끝났으니 그냥 이대로 떠나는 걸까. 그를 더 보고 싶다. 이대로 놓쳐버리면 더이상 못 살 것만 같았다. 그를 다시 본 순간, 이미 그에게로 극도로 빠져버렸으니깐.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떠나려는 그를 붙잡았다. 가지마요. 내 떨리는 목소리에 그는 그럼요? 라고 반응했다. 너무 저돌적이었다. 무슨 이유라도 대고 가지말라고 했어야 했는데, 무작정 가지말라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카페인이든 그의 향이든 중독되어 있었다.
"...이름을 알려주세요"
"정세운"
그를 붙잡기 위해 생각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래, 원래 목적은 이름이었어. 이대로 떠나더라도 그를 추적할 뭔가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획득했다. 그도 정말 존재하는 인간이었다. 현실에 없을 법한 그에게서 정세운이라는 인간적인 이름이 나오니, 그제야 난 안심했다. 정세운. 곱씹을수록 이름마저 완벽하다.
이제 그를 보내줘야 하는 걸까. 이름까지 알았는데 더이상 그를 붙잡을 명목이 없었다. 그에게서 번호까지 따는 대범함은 보일 수 없었다. 이제와서야 내 꼴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있고 초췌해졌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꾀죄죄한 모양으로 그의 번호를 묻고 싶지 않았다. 그건 민폐였다. 뭐, 물어봐도 줄 리 없을 그였지만. 그러나 흥미롭게도 세운은 떠나지 않았다. 내가 이름을 물은 그 순간부터 계속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내가 그를 훑은 것처럼 그 또한 날 탐색하는 것 같았다. 세운의 시선에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내 두 뺨은 이미 벌겋게 물들어갔고, 심장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바삐 뛰었다.
"괜찮으시다면"
"......"
"잠깐 빌려주시겠어요?"
어떤거요? 라고 되묻기전에 난 잡아먹혔다. 역시나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와 스칠 때부터 감지했어야 했는데.
세운이 빌려달라고 한 것은 입술이었다. 비에 젖은 듯한 촉촉한 그의 입술이 메마른 날 흠뻑 적시고 있었다. 말랑한 그의 혀는 날 끈적이게 감싸안았다. 더운 숨이 왔다갔고 그럴 때마다 그의 향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그는 사람이 아니야. 역시 환각이야. 그렇지만 난 점점 더 진득히 그를 붙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치는 거리 한복판이라는 건 전혀 방해될 게 없었다. 이미 내 눈코입은 그의 것이었다. 그와의 키스로 모든 걸 끝내고 싶었다. 살살 날 쓰다듬던 그의 손은 어느새 내 목 근저리에 머물렀고 이내 움켜쥐었다. 그의 손길에 난 숨이 막혀왔지만 키스를 멈출 순 없었다. 오히려 더 갈망하듯 그를 껴안을 뿐이었다. 내 반응에 그는 잠시 입술을 떼 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잡았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린뒤 다시 내 목덜미를 잡고 키스를 이어갔다. 내 목을 움켜쥔 그의 손에는 점차 힘이 들어갔고 도무지 키스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 버렸다. 그 힘은 인간이 내는 힘이 아니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 난 혼이 빨리듯 정신이 혼미해졌다. 호흡이 가빠졌고 이내 난 살려달라 그의 소매를 물고 늘어졌지만, 그에게 잡혀있어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끙끙댈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표정변화도 없이 내 숨을 거두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 혼이 다 빠져나가 정신을 잃었을 때, 그는 죽은 듯 몸에 힘이 빠진 날 한껏 끌어안았다. 수고했어요. 그의 속삭임은 악(惡)에 취한 자의 숨소리였다.
그리고 이내 그는 목적이 끝난 듯 이미 죽어버린 그녀를 바닥에 팽개쳤다. 그리곤 살기 위해 자신의 소매를 잡고 몸부림쳤던 그녈 떠올리며 사악한 웃음을 지은 채 제 소매를 입으로 잡아당겼다.
사실 그에겐 이름따윈 없었다. '정세운'은 잠시 인간에게 먹혀들어갈 가명이었을 뿐. 그는 혀로 제 입술을 빠르게 훑었다. 아름답던 핑크빛 입술은 붉게 변질돼있었다. 생기를 되찾은 듯 검붉은 피로 물들인 그는 그렇게 또다시 자신에게 취할 여인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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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쓰기 시작해서 아침이 되었네요...하핳
데이즈드를 보고 생각나서 써봤어요. 왜 세운이는 치명적이어서 절 아프게 하는 걸까요.
세운이 보고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