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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즈드/정세운] 빨간 맛 | 인스티즈


네 입술엔 피가 묻어있어. 빨갛게 뭔갈 잡아먹은 것 같이.

그게 내 입술일 줄이야.








(이번 화는 BGM 필수입니다)









빨간 맛
w. 슈가링








그를 처음 본 날은 끈적이게 더운 날씨였다. 비가 오려는 듯 하늘은 흐릿했고, 습기 때문에 손만 닿아도 불쾌할 만큼 꿉꿉했다. 그 때 누군가가 내 곁을 스쳤다. 청량한 향이 내 코끝을 강하게 자극했다. 사람의 향이 이렇게나 치명적일 수가 있을까. 1초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는데 그 잔향이 아직도 남아있다니. 그렇다고 신경을 세울 만큼 센 향은 아니었다. 비릿한 비냄새와 사람들의 땀냄새가 가득한 이 거리를 정화시켜주는 그런 향이었다. 

나는 이미 멀리 가버린 그의 뒤통수를 보았다. 말끔하게 정돈된 뒷머리와 캐주얼한 옷차림. 어디 하나 흠잡을 수가 없는 뒷태였다. 아, 아름답다. 저멀리서 군중 속을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용기가 없었던 나는 그대로 그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습관이 생겼다. 하루 중 백 번도 넘게 그의 생각을 하는 일. 그 일이 있은 후 벌써 7일이나 지났지만, 내 머릿속은 그를 만났던 그 장소에 멈춰있었다. 겨우 몇 초 봤다고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그가 신기했다. 마성의 남자. 그를 두고 하는 말일까. 어지럽다. 그의 향을 떠올리면 그랬다. 그가 입었던 복장마저 사진으로 박은 것처럼 완벽히 기억해냈지만, 이상하게도 그 날 미치게도 끌렸던 그의 향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가슴 속에 메말랐던 감정을 꿈틀대게 만든. 그를 보고 싶다. 이름조차 모르지만.





한참을 그에게서 헤엄치며 정신을 못차리다가 더이상 이렇게 못 살겠다 생각한 나는 다시 그 거리로 향했다. 그 때 그를 마주쳤던 카페 앞 테라스에, 나는 아메리카노 한 잔만 덜컥 시켜놓고 앉아있었다. 무작정 기다렸다. 내 목적은 순전히 그를 한번 더 보는 것이었다. 아니,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리자면 이름 세 글자 정돈 알고 싶었다. 그를 보지 않아도 계속 그를 찾아볼 수 있게. 그를 향한 감정이 너무 컸기에 말 걸 용기는 내게 충분했다. 그러나 4시간 정도 앉아있고 나서야 그 욕심을 과분했음을 느꼈다. 아냐, 그를 한번만이라도 다시 볼 수 있다면 아무것도 원치 않아. 그냥 제발 내 앞에 나타나줘. 그러나 그 날은 그는 커녕, 비슷한 또래의 사내 한 명 보지 못했다.




그렇게 그가 내 마음 속에 저장만 돼있는 채로 한 달이 흘러갔다. 이쯤되니 그를 향한 감정은 많이 식었다. 처음부터 스치기만 했던 그를 이렇게 애타게 생각했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더위에 지쳐 청량했던 그 향에 잠시 심취되었을 뿐이야. 그렇게 그는 잊혀져가는 줄 알았다. 우연히 그와 마주치기 전까진, 그럴 줄 알았다.




.

.

.





다시 마주친 날은 비가 어마어마하게 내려 폭우주의보가 발령된 날이었다. 번개도 쳤고, 하늘은 종잡을 수 없이 새커맸다. 이런 날엔 집에만 갇혀있는 게 상책이지만, 일이 많이 밀렸던 나는 카페로 향했다. 며칠 간 계속된 야근 때문에 몸이 많이 지친 상태였고, 이에 더 정신차리라고 아메리카노에 2샷을 더 추가해 먹었다. 그 떄문에 머리는 더 지끈거렸지만 이내 각성이 되어 빠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하, 지친다. 


일을 시작한 지 시간이 한참 지나고 피로함이 몸을 지배했을 때, 난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라도 하나 피워야지, 안되겠어. 비는 격렬하게 내렸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밖엔 사람들이 득실댔다. 둔탁한 빗소리와 사람들의 발걸음이 내 머릿속을 바삐 돌아다녔고, 이에 난 인상을 찡그렸다. 피곤함이 극에 달은 탓이었다. 이미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잠시라도 쉬고싶어 눈을 지그시 감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술에 물리는데, 어떤 강한 향이 날 자극했다.

새롭고 낯설지만 익숙한 향. 훅 들어오는 향기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그의 향이다. 날 지독하게 떨리게 했던 그의 향이 틀림없다. 그렇게 눈을 떴을 땐 난 입을 틀어막을 수 밖에 없었다. 내 바로 앞에 그렇게도 기다렸던 그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무려 나를 쳐다보며.



이젠 가물가물했었는데, 그를 보자마자 마치 어제 본듯 익숙했다. 큰 키에 날 내려다보던 그의 시선이 내 심장을 뚫는 듯 아찔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숨이 가빠졌다. 날 그윽이 바라보던 그는 입술을 떼어 내게 말을 걸었다.





[데이즈드/정세운] 빨간 맛 | 인스티즈

"그거 하나만 줘요"



그의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그 땐 그저 스치기만 했었으니깐. 차분한 듯 잠긴 그의 목소리는 내 귀를 간지럽혔다. 이에 난 홀린 채로 멍하니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은 조각 같았다. 나른하게 쳐진 눈꼬리, 그 밑에 애교있게 자리잡은 눈가 주름부터 이마부터 내려오는 콧대까지 완벽, 그 자체였고. 아, 입술. 핑크빛으로 물들인 도톰한 입술. 잡아먹고 싶게 생긴, 그 입술까지 완벽했다. 하, 이러면 반칙이지. 하나하나 다 완벽하면 헤어나올 수가 없잖아. 그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탐스러움'이랄까. 계속 봐도 질리지 않을 얼굴을 소유한 그였다. 더불어 그의 강렬한 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 맑고 서늘한 향은 이미 내 신경을 마비시킨지 오래였으니. 계속 감탄해도 모자랄 그였다.


내가 멍하니 있자, 그는 고개를 갸웃대다 씩 웃으며 내 입술에 물린 담배를 제 입에 가져다댔다. 잠깐 빌려가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이던 그는 곧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찰칵 불을 붙였다. 그렇게 반듯하게 생긴 그가 담배를 피니 현기증이 났다. 타락한 아름다움. 그의 퇴폐미에 앞이 흐릿해지는 기분이었다. 한 입을 야무지게 빨아들인 그는 하얀 숨을 내쉬며 날 바라보았다. 가늘게 뜬 그의 눈매는 날 훑듯 날카로웠다.  




"입술이 예쁘시네요"


"......"



소름이 끼쳤다. 그가 던진 저 말, 내가 방금 그에게 하려던 말이었다. 어째서 내가 하려던 말을 그가 내뱉고 있는 거지. 환각을 보는 것일까. 카페인과 니코틴이 엉켜붙어 환각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보길 바랬던 그가 내 눈 앞에 있고. 그것도 모자라 그와 간접키스를 하고 있으니. 게다가 지금 내 속까지 읽고 있잖아. 그러나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도 그는 내 눈 앞에 있었다. 분명 존재하는 인간이었다.




"고마워요"


내가 벙찐 사이, 그는 이미 한 개비를 다 피웠다. 아득하게 빨리도 가는 시간이 원망스러웠다. 목적이 끝났으니 그냥 이대로 떠나는 걸까. 그를 더 보고 싶다. 이대로 놓쳐버리면 더이상 못 살 것만 같았다. 그를 다시 본 순간, 이미 그에게로 극도로 빠져버렸으니깐.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떠나려는 그를 붙잡았다. 가지마요. 내 떨리는 목소리에 그는 그럼요? 라고 반응했다. 너무 저돌적이었다. 무슨 이유라도 대고 가지말라고 했어야 했는데, 무작정 가지말라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카페인이든 그의 향이든 중독되어 있었다.





"...이름을 알려주세요"

"정세운"


그를 붙잡기 위해 생각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래, 원래 목적은 이름이었어. 이대로 떠나더라도 그를 추적할 뭔가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획득했다. 그도 정말 존재하는 인간이었다. 현실에 없을 법한 그에게서 정세운이라는 인간적인 이름이 나오니, 그제야 난 안심했다. 정세운. 곱씹을수록 이름마저 완벽하다. 


이제 그를 보내줘야 하는 걸까. 이름까지 알았는데 더이상 그를 붙잡을 명목이 없었다. 그에게서 번호까지 따는 대범함은 보일 수 없었다. 이제와서야 내 꼴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있고 초췌해졌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꾀죄죄한 모양으로 그의 번호를 묻고 싶지 않았다. 그건 민폐였다. 뭐, 물어봐도 줄 리 없을 그였지만. 그러나 흥미롭게도 세운은 떠나지 않았다. 내가 이름을 물은 그 순간부터 계속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내가 그를 훑은 것처럼 그 또한 날 탐색하는 것 같았다. 세운의 시선에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내 두 뺨은 이미 벌겋게 물들어갔고, 심장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바삐 뛰었다. 




"괜찮으시다면" 


"......"





[데이즈드/정세운] 빨간 맛 | 인스티즈

"잠깐 빌려주시겠어요?"



어떤거요? 라고 되묻기전에 난 잡아먹혔다. 역시나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와 스칠 때부터 감지했어야 했는데.


세운이 빌려달라고 한 것은 입술이었다. 비에 젖은 듯한 촉촉한 그의 입술이 메마른 날 흠뻑 적시고 있었다. 말랑한 그의 혀는 날 끈적이게 감싸안았다. 더운 숨이 왔다갔고 그럴 때마다 그의 향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그는 사람이 아니야. 역시 환각이야. 그렇지만 난 점점 더 진득히 그를 붙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치는 거리 한복판이라는 건 전혀 방해될 게 없었다. 이미 내 눈코입은 그의 것이었다. 그와의 키스로 모든 걸 끝내고 싶었다. 살살 날 쓰다듬던 그의 손은 어느새 내 목 근저리에 머물렀고 이내 움켜쥐었다. 그의 손길에 난 숨이 막혀왔지만 키스를 멈출 순 없었다. 오히려 더 갈망하듯 그를 껴안을 뿐이었다. 내 반응에 그는 잠시 입술을 떼 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잡았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린뒤 다시 내 목덜미를 잡고 키스를 이어갔다. 내 목을 움켜쥔 그의 손에는 점차 힘이 들어갔고 도무지 키스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 버렸다. 그 힘은 인간이 내는 힘이 아니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 난 혼이 빨리듯 정신이 혼미해졌다. 호흡이 가빠졌고 이내 난 살려달라 그의 소매를 물고 늘어졌지만, 그에게 잡혀있어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끙끙댈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표정변화도 없이 내 숨을 거두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 혼이 다 빠져나가 정신을 잃었을 때, 그는 죽은 듯 몸에 힘이 빠진 날 한껏 끌어안았다. 수고했어요. 그의 속삭임은 악()에 취한 자의 숨소리였다.



그리고 이내 그는 목적이 끝난 듯 이미 죽어버린 그녀를 바닥에 팽개쳤다. 그리곤 살기 위해 자신의 소매를 잡고 몸부림쳤던 그녈 떠올리며 사악한 웃음을 지은 채 제 소매를 입으로 잡아당겼다.





[데이즈드/정세운] 빨간 맛 | 인스티즈

"...하핳"



사실 그에겐 이름따윈 없었다. '정세운'은 잠시 인간에게 먹혀들어갈 가명이었을 뿐. 그는 혀로 제 입술을 빠르게 훑었다. 아름답던 핑크빛 입술은 붉게 변질돼있었다. 생기를 되찾은 듯 검붉은 피로 물들인 그는 그렇게 또다시 자신에게 취할 여인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


새벽에 쓰기 시작해서 아침이 되었네요...하핳

데이즈드를 보고 생각나서 써봤어요. 왜 세운이는 치명적이어서 절 아프게 하는 걸까요. 

세운이 보고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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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가링
'아가씨'는 오늘에서 내일 넘어가는 새벽에 올릴 예정이예요. 원래 이 화 대신에 올리려고 했는데...데이즈드의 세운이가 절 가만두지 않네요. 기다리실까봐 말씀드려요!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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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슈가링
포뇨하고싶은거다해 님 당연히 기억하죠!! 늘 고마워요❤️ 제 취향이 마이너인것도 있는데, 그런 것들 위주로 보다보니 밝은 걸 잘 못써요ㅜㅜ그렇지만 언젠가는 정말 청량한 세운이 쓰고싶긴 하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6년 전
독자2
와 헐 소매물어뜯는거 짤이랑 글이랑 너무 찰떡이어서 소름 .... 와 진짜 재밌어여 ...
6년 전
슈가링
왜냐면 저 짤들을 보고 글을 작성했으니깐요 ㅎㅎㅎㅎ 이 글은 완전히 데이즈드의 세운이만을 생각하면 쓴 단편이라서요. 그니깐 세운이가 다한겁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6년 전
독자4
바돌입니다.............어쩜 이렇게 치명적인지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세운이의 치명적인 모습과 슈가링닌ㅁ의 필력이 합쳐져서 엄청난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ㅜㅜ 항상 너무 좋고 감사해요ㅜㅜㅜ
6년 전
독자5
대박.. 저 청량보스인 짤이 이렇게 섹시하게 변할 수 있다니...
오늘 전 여기서 생을 마감하겠습니다 o-<-<

6년 전
독자6
[수토끼]입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신알신을 늦게 봐서 이제야 작가님 글을 읽었네요!ㅠㅡㅠ
작가님의 금 같은 글 정말 매우 사랑합니다 저는..,❤️ 글만 봐도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서 작가님의 글이라고 딱 맞출 수 있을 거 같아요 :) 그나저나 이번 글에서의 세운이는 왜 이렇게 치명적이고 뭐라 말할 수 없고.,, 그냥 세운이 찰떡 글이네요 완전 ㅠㅡㅠ 휴, 이번 글도 너무 잘 보고 가는 것 같아서 감사해요 ❤️ 아가씨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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