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친 박우진
05 그날은 펜션에 와서도 쉬이 잠들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자 둬야지, 싶어서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서 박우진이 했던 말이 둥둥 울려서. 온갖 곳에 심장이 있어서 파닥파닥 뛰는 느낌이었다. 결국 동이 트는 것을 보고 나서야 잠드는 걸 포기했다. 다음 날이 되어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박우진과 둘만 있을 시간은 무조건적으로 피했다. 별 이상한 핑계를 만들어가며 그늘 아래 앉아 바다에 들어간 박우진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박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며 눈을 채 피하지도 못해 허둥거리고 있자 박우진이 먼저 고개를 돌려 바닷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우진이 내가 좋다고 한 것도 아닌데, 나 왜 이렇게 유난이냐. #남사친 박우진 여차여차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최대한 박우진을 보지 않으려 집에만 있었다. 어딜 나가도 마주칠 것 같아서. 영화 보러 가자는 박우진의 톡도 이리저리 둘러대며 거절했다. 마지막엔 조금 화난 것도 같았는데. 침대 위로 힘없이 늘어지며 한숨을 쉬었다. 왜 이리 어렵냐, 진짜. 하루하루를 쓸데없이 보내다 보니 안 그래도 짧은 방학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서 바로 내일이면 개학이었다. 박우진하고 같이 등교할 텐데... 이거 진짜 어떡하냐. 안 볼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답답해서 팔다리를 파닥거리고 있는데 머리맡에 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길게 울렸다. 생각 없이 핸드폰을 들었다 그대로 얼굴 위로 떨굴 뻔했다. ' 박우진 '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얘가 왜 전화를? 이 저녁에? 여전히 징징 울려대는 핸드폰을 침대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면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버둥대는 사이에 전화가 끊겼다. 아... 잘 된 일인가, 싶어서 핸드폰을 들자 다시 맹렬하게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또 박우진. 문자를 하면 했지 전화는 잘 걸지 않는 박우진이라 이 정도면 아마 받을 때까지 하겠다 싶어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 ' 김여주. ' " 어, 왜? " 밖인가. 화장실? 박우진 목소리가 조금 울리게 들렸다. ' 나 지금 너네 집 앞으로 갈 건데. ' " ...에? " ' 영화보러 갈 거니까 준비해서 나와라. 10분. ' 핸드폰 너머에서 엘리베이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전화가 뚝 끊겼다. 미친 거 아니야? 핸드폰을 침대 위로 던지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박우진이 지금 엘리베이터를 탔으면 우리 집 앞으로 오는 건 2분도 안 걸리는데. 10분이면 나름 준비할 시간을 준 셈이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아침에 씻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세수를 하고 칫솔을 입에 물고 나와 옷장을 열었다. 치마...를 들었다가 이건 아니지 싶어 다시 내려놓았다. 그래, 너무 꾸민 것 같잖아. 이것저것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하다 결국 제일 무난한 반바지에 반팔을 입었다. 다시 화장실로 가 양치를 마치고 화장대에 앉았다. 기본만 하자, 기본만. 그마저도 시간이 없어서 정신없이 이것저것 두들기고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서 집 밖으로 나왔다. 등 뒤에서 어디 가냐는 엄마의 물음에 박우진! 이라고 대답하며.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숨을 고르고 있다 문이 열리자 냅다 뛰었다. 박우진은 공동현관 앞에 비스듬히 기대어서 서 있었다. " 이제야 나오냐. " " 야, 진짜 예고도 없이, 어후 힘들어... " " 예고를 했더니 안 만나 주길래. " " 아, 그거는... " 내가 잘못했네...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박우진에 괜히 미안해져 입술을 잘근 씹었다. 박우진은 말없이 그런 나를 보다 먼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걸어가려나. 하긴 영화관이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니까.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걷자 박우진은 조금 틈을 두고 걸으며 잔소리처럼 타박했다. " 방학 전부터 개봉하면 꼭 보러 가자고 떼를 쓰더니, 보러 가자니까 별 핑계는 다 대고. " " ...그 때는 진짜... " " 계속 구라 쳐라. " " ...미안. " 왜 그랬냐고 물으면 어쩌지. 왜 피하냐고. 혹시나 그런 물음이 되돌아올까 전전긍긍했지만 예상외로 박우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말 없어 보여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야 하는 애라 분명히 물을 줄 알았는데.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며 할 말을 찾는 듯싶던 박우진은 들리지 않게 혼잣말로 짧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틀어 나를 빤히 쳐다봤다. " 왜, 뭐... " " 김여주. " " ...... " " 지금 불편하냐. " " ...어? " " 아니다, 됐어. 대답하지 마. " 그리곤 자기 혼자 고개를 세차게 젓더니 몇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 걸었다. 언듯언듯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마다 붉어진 박우진의 귓바퀴를 쳐다보며 걷다 보니 순식간에 영화관 앞에 도착해 있었다. 속도를 늦춰 내가 제 옆으로 붙을 때까지 기다리던 박우진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 대뜸 눈앞으로 폰을 들이밀었다. " 이거 맞지. " " 응... 헐, 이미 예매 한 거야? " " 어. " " 나 안 나왔으면 어쨌으려고... " " 나왔잖아. " " ........ " " 그럼 됐지. " 이미 예매 완료된 영화권 두 장. 그건 박우진 말대로 예고편이 떴을 때부터 내가 줄곧 꼭 보러 가야 한다고 했던 영화이기도 하고, 동시에 박우진이 자기랑 안 맞는 장르라며 한사코 거절했던 영화이기도 하다. 설마 그걸 자기 손으로 예매하고 보러 가자고 할 줄이야. 같이 보더라도 '내가 살 테니 넌 그냥 몸만 와라' 하는 쪽은 나일 줄 알았는데. " 팝콘... 은 내가 살게. " " 너 이맘때에 용돈 다 쓰고 없잖아. " " 야, 그래도 팝콘 정도는 괜찮거든! " " 됐어. 다음 영화는 니가 사던가. " 사준다니까! 내가 산다고. 티켓부스까지 가는 짧은 거리 동안 투닥거리다 결국은 박우진이 팝콘을 사고, 다음번엔 내가 풀코스로 사는 걸로 합의를 봤다. 이래놓고 또 자기가 사거나 귀찮다고 영화를 안 보러 와서 무산될 게 뻔해 지금 산대도 박우진은 한사코 거절했다. 결국 예매권을 발급받고 박우진이 팝콘과 콜라를 살 때까지 애써 들고 온 지갑은 무용지물이 됐다. 입장시간을 기다리면서 박우진은 옆에 앉아서 연신 핸드폰을 두드렸다. 누구랑 톡을 저렇게 하나. 문득 궁금해서 티나지 않게 슬쩍 눈을 굴렸더니 용케도 그걸 알고 눈을 댕그랗게 뜨며 핸드폰을 자기 쪽으로 기운다. 치사하게 진짜. 고개를 돌려 입술을 쭉 내밀고 콜라 빨대를 입에 물자 박우진 쪽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고개를 휙 돌려 박우진을 보자 여전히 내 쪽을 보고 웃는 박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재미있는 것이라도 보는 듯 한껏 말려 올라간 박우진에 입꼬리에 당황해서 뭐냐고 물으려는 찰나에 입장하라는 안내 방송이 울렸다. 앉아있던 박우진이 벌떡 일어났다. 핸드폰 화면은 이미 까맣게 변해있는 상태였다. " 가자. " 그리고선 앞서 걷는 박우진의 뒷모습이 너무 들떠 보여서, 웃느라 봉긋 솟은 광대가 신나 보여서.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냥, 그냥. #남사친 박우진 영화는 기대만큼 재미있었다. 평소 좋아하던 장르였고, 좋아하는 배우도 나왔고 평점 또한 완벽했다. 하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질 않는 건, 역시 옆에 앉아있는 박우진 때문인가. 11년 동안 봐왔을 때 얘가 이런 영화를 좋아할 리가 없는데. 괜히 초조한 마음으로 보이지도 않는 옆자리의 박우진에게 안 그런 척 온 신경을 쏟았다. 그리고 예상외로, 박우진은 영화를 즐기고 있었다. 뭐지. 취향도 바뀌나? 이렇게 갑자기? 혼자 눈을 굴리며 당황스러워할 때 박우진에게서는 벌써 네 번 째 웃음이 터졌다. 어... 그렇게 웃긴 장면도 아닌데. 한참을 생각하다 이내 작게 머리를 젓고는 영화에 집중했다. 잘 보면 좋은 거지, 뭐. " 재밌었다. 그치? " " 어. 재밌었어. " 영화가 끝나고 나와 집까지 걸어가며 박우진과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딱히 주제를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고, 그냥 전처럼 실없는. 이쪽에서 운을 떼고 시작한 얘기가 끊기면 박우진이 다른 얘기로 이어갔고, 그렇게 걷다 보니 아파트 단지 안까지 들어와 있었다. 우리 집 공동현관 바로 앞까지. 박우진의 집은 여기서 두 동이 더 떨어져 있었다. " 내일 학교, 같이 갈 거지? " " 당연한 걸 묻냐. " " 내일은 안 늦을게... " " 못 지킬 거면 말하지 말고 그냥 늦어라. " " 야 그래도 나는, " " 김여주. " 공동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다 말고 뒤를 돌자 낮은 난간에 기대듯 앉아 이쪽을 보는 박우진이 있었다.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으로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는 건 아마도 초등학교 때부터 있었던 박우진의 버릇 아닌 버릇이었다. 할 말이 있을 때나, 뭔가 속으로 말없이 고민하고 있을 때. 문득 박우진의 초점이 내 눈빛과 얽혔다.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손은 어느새 박우진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박우진은 그 모양새와는 다르게, 툭 내던지듯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 피하지 마. " " ........ " " 들어가. 이모 걱정하시겠네. "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더운 한여름밤인데도, 오죽하면 더위를 잘 타지 않는 박우진도 덥다며 반팔 티를 펄럭이는 날씨였는데도 팔에 소름이 돋았다. 말하는 법을 잊기라고 한 것처럼 입술만 달싹거릴 뿐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박우진은 여전히, 여전히 나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엉거주춤 뒤를 돌아 마저 비밀번호를 눌렀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 자동문 열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굳은 채로 천천히 들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때까지도, 박우진은 움직이지 않고 깜빡거리는 불빛 아래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시야에서 박우진이 사라지자마자 풀린 다리에 쭈구려 앉아 밋밋한 바닥을 보며 생각했다. 박우진을, 예전처럼 대할 수 있을까.*암호닉 신청해주신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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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왔지요ㅠㅠㅠㅠ 죄송합니다 쓰차를 먹어서 늦었어요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