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시작을 알리는 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가로등에 불빛은 들어오지 않아 골목은 어두웠고, 또 잔잔했다. 벽에는 온갖 낙서 투성이었고, 담배꽁초 가득한 골목에 한 남자가 발을 들였다.
말끔히 차려입은 정장, 검은색의 구두, 손에 들린 검은 우산, 그리고 입에 물려 타고 있는 담배까지 이질적인 모습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남자가 골목에 서서 담배를 벽에 지진 후 골목에서 빠져나가려 했으나, 골목 안쪽에서 보이는 형체에 지나치지 못하고 골목 안쪽으로 향했다. 골목은 점점 어두워졌지만 형체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람이고, 여자라는 것을. 남자는 골목에 앉아있는 여자를 툭툭 건들였다.
"저기요, 뭐 하시는 거예요?"
남자의 건들임에 여자는 힘겹게 두 눈을 떴다. 그 자리에 꽤나 오래 있었는지 온 몸이 다 젖어 있었고 입술은 파랬다. 남자는 혀를 차고는 여자에게 우산을 건넸다. 처음보는 여자에게 자신이 이렇게 잘해주는 이유는 그 여자의 눈동자가 너무 깊기 때문이라고 저 스스로 세뇌시켰다.
"이거라도 쓰고 계세요. 감기 걸릴 것 같으니까 얼른 집에 가세요."
남자가 우산을 건네었지만 받지 않고 빤히 남자를 쳐다보기에 머쓱해하던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아 우산을 움켜쥐게 했다. 여자의 두 눈동자는 위태로워 보였다. 그리고 우물처럼 깊었다. 남자는 굽혔던 무릎을 피고 자리를 떠나려고 했지만, 여자가 남자의 옷깃을 잡는 바람에 그 행동은 무용지물 됐다. 남자는 물음표가 가득한 얼굴로 여자를 쳐다보았고 여자는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저씨."
"……."
"저 좀 재워주세요."
그것이 윤기와 탄소의 첫만남이었다.
무제(無題)
"다녀왔습니다."
교복을 입고 집에 돌아온 탄소는 늘 그랬듯이 집을 둘러보았다. 역시 오늘도 윤기는 없다. 익숙하게 2층으로 올라가 가방을 내려놓은 탄소는 교복을 벗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 집에 온 지도 3년이란 시간이 지나있었다. 탄소의 나이는 19살이 되었고, 윤기는 32살이 되어 있었다. 시간은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 책상에 앉아 책을 핀 탄소는 방금 학교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 윤기를 위해. 윤기에게 좋은 성과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공부에 집중을 하기 위해 스탠드를 켰거만, 1층에서 들리는 경쾌한 도어락 소리에 탄소는 펜을 내려놓고 느긋하게 1층으로 내려갔다.
"오랜만이네요."
"집에 와 있었네."
"없었으면 했어요?"
"아니, 그건 아니고. 너 몰래 맛있는 거나 준비하려고 했지."
두 손에 들은 검은 봉다리가 윤기의 말을 증명해 주었고, 탄소는 실소를 터트렸다. 그럼 이제 없는 사람 치고 맛있는 거 해 주세요. 탄소의 말에 윤기가 웃음을 지으며 알았다고 대답을 했고, 탄소 역시 윤기를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탄소를 뒤에서 껴안은 윤기 때문에 헛웃음을 지어냈다.
"나 오랜만에 왔는데."
"아저씨는 가끔 저보다 애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탄소의 어깨를 감싸안기에 탄소도 웃으며 윤기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윤기의 스킨 냄새, 향수 냄새, 담배 냄새, 그리고 사람의 피 냄새. 모든 것이 어우러져 환상의 조합을 만들어낸 냄새는 탄소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다. 주머니에서 만져지는 총이 더 그럴싸한 분위기를 지어냈다. 윤기는 나라에서 지원하는 비밀요원, 탄소는 윤기의 집에 얹혀사는 사람. 둘의 관계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
이번에 성적표 나왔다며. 탄소가 깎는 사과를 먹으며 묻는 윤기의 말에 탄소가 건성으로 네. 라며 대답했다. 몇 점인데? 묻는 모습이 영락없는 아빠처럼 보였다. 올 A 요. 덤덤하게 내뱉는 말에 윤기도 잘했네, 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시선을 다시 티비로 고정시켰다. 티비에서는 화려한 액션 영화가 방영 중이었고, 잔인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탄소와 윤기는 사과를 먹으며 만화영화 보듯이 시청하고 있었다. 윤기가 제 옆자리를 툭툭 치기 전까지는.
"이리와서 좀 앉지? 누가 보면 너 잡아 먹는 줄 알겠다?"
"잡아 먹을 거잖아요."
"진짜 잡아 먹는다."
윤기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본 탄소가 낄낄 웃으며 윤기의 옆으로 자리 잡았다. 덕에 윤기의 품에 쏙 들어간 탄소는 윤기의 배를 통통 두들기며 물었다.
"이번에는 며칠 있다가 가요?"
"몰라. 연락 오면 바로 가야 해."
"그런 회사가 어딨어."
"사람 죽이는 회사는 특별해서 그래."
윤기의 대답에 탄소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할 때마다 둘의 사이가 이질적으로 느끼기 때문이었고, 지금 느낀 기분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괜스레 짜증이 나서 윤기의 배를 더 세게 두들기는 탄소에 윤기가 기침을 하며 탄소의 손목을 붙잡았다. 누구 죽일 일 있어? 짜증을 내는 윤기의 목소리에 탄소가 거칠게 윤기의 손을 뿌리쳤다. 짜증나요. 탄소의 말에 윤기가 탄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왜 또 그러냐며 물었다.
"저 아저씨 좋아해요."
"알아."
"근데 아저씨가 사람 죽인다는 말을 하면 이질적으로 다가와."
"……."
"근데도 아저씨를 좋아하니까, 뭐 어쩔 수 없죠."
난 이제 자러 가야겠다. 빈 접시를 들고 윤기의 품에서 벗어난 탄소가 부엌으로 가 싱크대에 접시를 담았다. 아무리 덤덤한 척 해도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은 어쩔 수 없는지 심장을 부여잡으며 심호흡을 했다. 나름 괜찮아진 심장 상태에 아무 일도 없던 척 부엌에서 나와 2층으로 향하려 계단에 올라서니 탄소야, 저… 라며 운을 떼는 윤기에 뒤를 돌아 윤기를 바라봤다.
"왜요?"
"오늘 나랑 같이 잘래?"
나름 용기 내서 말한 걸 알지만 탄소는 윤기를 약올리는 것을 즐겨한다.
"아저씨."
"어?"
"저 아직 19살인데요."
"……."
"1년만 참으세요."
잘 자요. 손 키스를 날린 탄소가 재빨리 2층으로 올라가 제 방문을 꼭 잠궜다. 벙 쪄 있던 윤기의 반응에 즐거운지 키득키득 웃으며 침대로 몸을 던진 탄소가 바디 필로우를 끌어안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오늘은 구름이 가리지 않아 환히 빛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온화한 밤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