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금필청)
"검사님! 형사님 깨어나셨다면서요?"
탄소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호석에게 전해들은 태형이, 제가 더 기쁜 마음으로 노크도 없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윤기의 얼굴도 활짝 펴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태형은 문을 엶과 동시에 그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대체 왜?
그렇게도 걱정하던 형사님이 깨어나셨는데?
"하아..."
긴 한숨을 쉬는 윤기의 얼굴은 죽상이 다 되어 있었다. 어째 탄소가 혼수상태였을 때보다 더 얼굴이 안 좋아보이기까지 했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태형이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눌러 방문을 잠갔다.
태형은 목을 큼큼 가다듬고서는, 소파에 등을 기대 길게 늘어져 팔을 눈가에 올리고 있는 윤기에게 다가가 그 옆에 앉아 분위기를 살피다 운을 띄웠다.
"...윤기형."
"태형아."
"어?"
"나 진짜 병신인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려 했던 태형은 두서없는 윤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고, 윤기는 말을 입 밖으로 꺼냄과 동시에 다시 한숨을 쉬며 그 날 있었던 탄소의 표정을 떠올렸다.
.
.
.
.
"좋아해요, 검사님."
덤덤하고 또박또박하게 제게 고백해오던 탄소의 말, 그리고 방금 전의 제 입술에 닿았던 온기까지.
윤기는 머릿속이 멍해졌다.
분명 자신도 탄소에 대한 마음이 있고, 이 여자가 나를 걱정하는 걸 눈치챘으면서도 직접 확인 받고 싶어서 떠보기까지 했다. 탄소에게 신경 써가며 다정하게 대했고 충분이 마음을 표현한 행동들도 여지껏 해왔다. 그랬는데.
막상 고백을 들으니 머릿속이 새햐얗게 변해 버렸고 뒤이어 질문 하나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내가 이 고백을 받아들이면, 그 다음은?
내가 이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되어도 오래갈 수 있을까? 안 싸운다고 보장할 수 있는 걸까?
나도 모르게 상처를 주게 되면 어쩌지? 지금과 다른 내 모습에 실망한다면?
질문 하나가 던져지자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들이 머릿 속에서 번져갔다.
무수한 상념 안에서도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했던 건,
이 사람이, 그리고 내가.
서로를 같은 마음으로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한 때는 연인이었던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넌 변했다고.
처음엔 이러지 않았는데.
다들 그렇게 헤어진다.
지금은 누구보다 더 좋아하고 사랑하더라도 결국은 나도, 상대방도 변해버릴까봐.
익숙해져서 소중함을 잃고 그 사람이 제 옆에서 사라진 뒤에서야 후회하면서 다시 찾을까봐 두려웠다.
윤기가 머릿속으로 한참동안 생각과 걱정들을 늘려가는 동안, 윤기의 생각을 알리 없는 탄소는 당연히 저한테 마음이 없다고 생각했다. 거절하기가 미안해서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고 있다고, 이 사람은 끝까지 착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단정지어 버렸다.
하지만 머리와는 다르게 마음은 너무 쓰라려서, 계속 윤기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는 울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서로가 불편한 이 자리를 만든 장본인은 본인이라고 생각한 탄소는, 이 일을 마무리지어야겠다고 결심했고 곧 입술 사이로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검사님."
"...네."
한참 자신의 생각에 빠져있던 윤기가 탄소의 부름에 조금 뒤늦게 대답했다.
"대답을 바라고 말한 건 아니예요."
"......"
"그러니까 부담스러워하지 마세요."
"......"
"그냥, 제 마음은 이렇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나름 표정관리를 한다고 한 얼굴이었지만 탄소의 씁쓸한 미소를 눈치빠른 윤기가 몰랐을리 없다. 그런 탄소의 표정이 깊숙히 윤기의 눈동자에 담겼다.
"검사님 내일도 일 있지 않으세요? 시간 많이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보세요."
"...네."
잠깐의 정적 끝에 탄소가 먼저 윤기의 품에서 나와 걸터앉았던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온기가 빠져나가 허전해진 제 품은 바깥에 휘몰아치는 겨울 바람으로 채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저를 부르는 탄소의 목소리에 천천히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와 병실문 입구에 섰다.
"바깥에 추워서 저는 여기까지만 배웅해드릴게요."
"......"
"차 가지고 오셨을테니까 조심해서 가시고 저 퇴원하면 그 때 사건조사 이어서 하는 걸로 해요. 괜찮으시죠?"
"네. ...저, 형사님 퇴원하시면,"
"제가 김 비서님 통해서 연락드릴게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말을 자르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탄소가 먼저 선수를 쳐서 비서를 통해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다. 분명히 안 괜찮을 거니까. 그런 어색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건 싫다.
그 원인이 나 때문이라면 더더욱. 내가 조금만 더 괜찮아질 때까지만 그렇게 하겠노라고 탄소는 속으로 생각했다.
.
.
.
.
윤기의 입을 타고 흘러 나온 이야기들과 윤기의 속마음을 모두 전해들은 태형은 가만히 있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병신 맞네."
태형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지만 윤기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맞는 말이니 뭐라 덧붙이진 않았다.
"그래도 뭐라고 말이라도 해줬어야지."
"...뭐라고."
"조금 갑작스러워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던가, 아니면 내가 보기보다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런 일들이 우리 사이에도 닥쳐올까봐 겁 나서 그렇다고. 적어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는 거잖아."
"......"
"내가 형사님이라면 벌써 상처받고도 남았겠다, 차인 거나 다름없는데. 그리고 나서는... 마음을 정리하고 있겠지?"
"뭐?"
"그렇잖아. 이미 고백은 해버렸는데 상대방은 고백에 대한 대답 한 마디 없고. 그럼 당연히 상대방이 나한테 마음이 없다고 단정지을 게 뻔한데. "
"......"
"나만 마음 정리하면 모든 게 없던 일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겠어?"
태형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일어나 차키와 휴대폰만 챙겨서 다급하게 나가는 윤기를 태형이 붙잡았다.
"어어- 형, 잠깐만. 빨리 가고 싶은 건 알겠는데 추우니까 겉옷 좀 입고 가."
"아, 어."
"그리고 형이 형사님 많이 좋아해서 그러는 것 같으니까 말해주는 건데,"
"......"
"이럴 땐 마음가는대로 하는 거야. 형이 왜 그런 생각하는지, 왜 그렇게 신중하게 생각하는 지 나야 잘 알지만, 그걸 모르는 상대라면 시간이 길어질 수록 지치고 멀어져버리니까."
"...그래. 고맙다."
"그러니까 형사님을 형수님으로 부를 수 있게 화이팅!"
그제서야 피식 웃음 짓던 윤기는 뒤돌아 문고리를 돌리고 밖으로 다급하게 뛰쳐 나갔다.
사무실에 혼자 남은 태형은, 급한 것을 나타내기라도 하는 듯 미쳐 닫히지 못한 문을 보며 곧 제가 입고 있는 두꺼운 코트를 벗을 때가 머지 않아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필로그 |
병실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지자마자 다리가 풀려 병실에 기대어 앉은 탄소의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상처 받은 건 분명히 나인데, 마치 당신이 상처받은 것처럼 그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이 마음을, 어떻게 사그라들게 만들 수 있을지 나조차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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