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운수 나쁜 날 아침부터 저기압으로 인한 비가 내렸고, 우산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비에 옷이 쫄딱 젖었다. 가방 속에 들어있던 공책과 교재도 조금 젖었으며 가장 기분 나쁜 건 수성펜으로 쓴 노트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번졌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자습을 하던 중 아랫배가 묘하게 아픈 느낌에 화장실에 가보니 생리가 시작되었다. 약을 삼키고 다시 문제로 시선을 돌렸다. * "어, 아... 미안. 어떡하지." "... 괜찮아." 점심시간에는 같은 반 친구가 단어장에 식판을 엎었고, 청소 당번인 내가 뒤늦게 하교를 하기 위해 사물함 옆에 세워둔 우산이 없어졌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었고, 교장 선생님께 10분 동안 훈계를 받았다. 비는 아직도 추적추적 내렸다. 젖은 책은 아무래도 좋았다. 된장국 냄새가 나는 단어장도 괜찮았다. 전화를 받지 않는 엄마도, 아빠도 괜찮았다. 나는 괜찮았다. 자기 세뇌는 조금 괜찮은 방법이었던 거 같다. 비는 맞으면 되고, 책은 냉동실에 얼리면 복구할 수 있고, 단어장은 다 외웠으니 버리고 새 거 만들면 되고. 옷이야 빨면 되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내 가방을 당겼고 중심을 잡지 못했던 나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남자는 놀란 듯 손을 내밀었고, 난 잡지 않았다. "미안해요, 어떡해." 아프겠다... 하며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에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일어났다. 남자는 미안한 듯 우물쭈물거리다 내 손에 장우산을 쥐어주었다. "비 맞으면서 가려는 거 같아서 잡았는데... 정말 미안해요. 남는 우산이니까 편하게 써요." "야! 옹성우. 회의 시작했는데 빨리 안 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한눈에 봐도 눈에 들어오는 예쁜 여자가 양치 컵을 들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내 앞의 남자를 빤히 보고 있었다. "금방 가. 넘어지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나 미워도 꼭 우산 쓰고 가요. 먼저 갈게요." 잘 쓰고, 3학년 6반으로 가져다줘요. 눈을 찡긋하며 여자에게 다가가는 남자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생글 웃으며 남자와 함께 떠났다. 눈에 띄는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도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우산을 펼쳤다. * 집에 들어오니 소름 끼치도록 싸늘한 공기만이 피부 위로 느껴졌다. 그럼 그렇지,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식탁 위엔 식어버린 반찬이 랩에 덮여 있었다. 작은 쪽지에는 '오늘도 파이팅!' 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고, 나는 쓰게 미소지었다. 엄마, 난 힘을 낼 수가 없어요. 가방을 풀고 책상 위에 앉았다. 어젯 밤에 남긴 지우개 가루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무생물은 좋겠다, 항상 변함없이,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테니까. 날 위해서 일하는 부모님과 그 사이에 고독을 느끼는 내가 신물이 나도록 증오스러웠다. 그렇게 일방적인 공부를 하고, 어느새 나는 잠자리에 들어버렸다. * 학교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렸다. 우산도 빌려줬는데 뭔가를 줘야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사탕 한 봉지를 계산했다. 아, 언제 전해줘야 하지. 받기만 했던 게 늘 좋지만은 않은가 보다. 언제 줘야 할지를 모르겠다. 공부에 집중이 안 될 때 전해줘야겠다, 아니, 그건 예의가 아닌가? 고민을 하다 6반 교실 문 앞에서 멈췄다. 여학생들은 무엇을 보려는지 기웃기웃했다. 6반, 그 남자 반이지. 지금은 사람이 많으니까 조금 있다가 전해주자. 1교시 시작 전, 1교시 쉬는 시간, 2교시 쉬는 시간... 수없이 찾아갔다. 그런데, 늘 사람이 몰려있다. 하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유독 그 반 앞에서 많이 들린다. 나도 입꼬리를 살짝 올려보지만, 근육에 무리가 갈 뿐 쉽지 않았다. 부럽다, 소리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결국, 손에 쥔 우산은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다시 나와 같이 반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우리 반 앞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안녕." "어, 안녕."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어제 봤던, 그러니까 우산 주인의 친구였다. 여자의 시선이 우산에 닿자 손끝이 화끈거렸다. "저기." 동시에 입을 열자, 여자는 먼저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산... 좀, 옹성우한테 가져다줄 수 있을까?" "응, 당연하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우산을 내밀었고, 여자는 그런 내가 웃긴 듯 작게 웃으며 가져갔다. 고마워. 스쳐 지나가듯 남긴 여자의 고맙다는 말이 고막을 때렸다. * "김여주, 상담실." 야간 자율학습 시간, 내 앞 번호의 여자아이가 내 책상을 톡톡치며 속삭였다. 펜을 내려놓고 조용히 일어났다. "왔어? 자, 김여주. 잠깐 상담하는 거니까 20분 괜찮지?" 담임선생님의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했다. 곧 원서접수 기간이니까, 아무래도 피곤하시겠지. "김여주... 여주는 성적이 좋네, 모의고사 등급도 안정적이고. 내신도 괜찮네? 어느 대학 가고 싶니?" "잘 모르겠어요." "하하, 좀 힘든 결정이긴 하지. 그럼 가고싶은 학부는 있어?" 내가 대답하지 못함으로써 대화가 끊겼다. 선생님도 무언은 긍정이라는 뜻을 읽으셨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없이 내 생활기록부를 넘기다 선생님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동물 관련해서 독서 많이 해놨네. 수시는 서울대도 괜찮을 거 같고..." 근데 작년 합격자보다는 좀 모자라다, 응. 학교 생활 조금만 더 열심히 하지 그랬어. 내가 다 아깝네... "독서 말고는 볼 건 몇 개 없구나." "정시 쪽으로는..." 어떻게 대화가 끝났는지 기억이 안 난다. 다만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더 열심히 살았어야 한다는 것.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지금까지 쌓아온 게 뭐지. 무기력하다. 힘없이 반으로 들어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종이 쳤고, 아이들은 즐겁게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갔다. 나는 갑자기 모든 욕구가 사라졌다. 널찍하지만 텅 빈 운동장이 보였다. 내가 어딜 가든 이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예고해주는 것만 같다. 스탠드에 앉았다.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인기척이 느껴져 옆을 바라봤다. "아..." 우산 주인이다. - 안녕하세요! 우울한 게 땡겨서 써보는 학원물입니다. 지적은 언제든지 감사히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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