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눈 02
;eye of the storm
"누나, 형 오셨어요?"
"어, 우진아 마담 언니는?"
"지금 지하에 손님이랑 계세요."
또 어디서 다쳐서 온 건지 우진의 오른쪽 눈에 안대가 터줏대감마냥 자리를 떡하고 잡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오른쪽 눈을 가리키자 멋쩍게 웃으며 빨리 가보라며 마담 방으로 우리의 등을 떠밀었다.
말하기 싫을 때면 웃으며 떠미는 버릇은 어릴 때와 변한 것이 없었다.
그 아이의 다친 눈을 보고 있자 왠지 모르게 어린 시절 죽어가던 나를 구해준 성우의 모습이 생각났다. 누가 봐도 본인이 대충 감싸 피가 뚝뚝 베어 나오던 왼쪽 눈을 감싼 붕대와 남은 한쪽 눈으로 오롯이 나를 쳐다보던 그 강렬하던 오른쪽 눈이 갑작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네 몸 좀 아껴, 항상 걱정이야."
"모든 건 당신의 뜻대로."
"장난치지마. 그리고 창피하게 김재환 따라하지말고"
"걱정하지 마세요. 별일 아니었어요."
"너에게는 별일이 아니더라도 나한테 큰일이야."
"그래, 인마 우리 여왕님께서 걱정하시잖아"
재환이 장난스럽게 우진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차분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가 그의 손길 한번으로 폭탄을 맞은 듯 쑥대밭이 되었다.
"아 하지 마요. 머리 다 망가지잖아요."
툴툴거리며 손을 쳐내고는 자신의 머리를 섬세하게 정리하는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내 동생이 살아있다면 딱 이만할 나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는 새침하게 자신은 할 일이 있어 바쁘다며 우리를 방으로 밀어 버리고 뒤돌아가는데 뒷모습 사이로 그의 야들야들한 볼살이 보였다.생긴 건 아기 같은데 왜 저리도 힘이 센지,
어릴적 앞니가 뽑기 싫다며 찡찡거리던 우진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진이 귀엽지?"
"당연하지 우리 동생인데."
우리 동생, 우리는 벌써 이렇게 가족으로 엮여 있었다.
우리에게 흑혈단이라는 개념은 어쩌면 어릴적 모든 가족을 일제에 잃고 무기력하고 비참하고 외롭게 살아가던 우리가 모여 만들어낸 마음속의 작은 방공호 같은 것이였다.
마담 방으로 통하는 비밀의 지하방은 인공모피로 된 카펫 아래에 자리잡고 있었다.
재환이는 항상 그 카펫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매일같이 마담에게 바꾸라며 찡찡거렸다. 그럴 때 마다 성우는 그에게 알 수 없는 새끼라고 말하며 자신의 그 카펫을 거두고는 문을 열었다.
지금은 성우가 없으니 문을 여는 것은 내 담당이였다. 카펫을 거두고 문을 열자 조금 부실해 보이는 나무계단이 나왔다. 그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가자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문이 보였다. 이 나무문 뒤에 우리의 새로운 동료가 기다리고 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젊은이인지 늙은이인지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오직 나의 뒤를 맡길 수 있는지 그것 하나만이 가장 중요했다. 신뢰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재환이 문을 열었다. 고즈넉이 몇 개의 호롱불에만 의지해 서로의 얼굴 실루엣만 슬쩍 보일 정도였다. 나무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담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남자의 멀끔한 뒷모습이 보였다.
"우리 왔어요."
"왔어? 오늘 귀한 손님이 오셨어."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희미한 빛 속에서 빛보다 뚜렷하게 빛나는 눈을 가진 그가 우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재환이만큼이나 축 처진 눈꼬리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처럼 순한 강아지보다는 늑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성우의 눈빛과 비슷하였다.
서먹서먹하게 웃으며 서로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아 있으니 정적이 맴돌았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웃는 것이 더 이상하리라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나는 역설적이 되게도 웃음이 나왔다.
공허한 웃음, 그것이 우리의 웃음이다.
몇분간의 침묵이 계속되자 남자가 어색했던지 눈치를 보며 말을 꺼낸다.
"우리 사진 안 찍어요? 거사를 치르기 전에 다 하나씩은 찍던데..."
"아직 한 명이 안 왔어요."
"아..."
또다시 정적
이번엔 마담이 말을 꺼내었다.
"그럼 우리 아가씨랑 재환이가 경성 구경 좀 시켜주고 있으면 되겠네, 다니엘씨가 어릴 때부터 만주에서 활동했다고 하더라."
"아 그래 그러면 되겠네요!"
그가 이런 분위기가 어색했던지 말이 나오자마자 손뼉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강아지처럼 헤벌쭉 웃으며 내 손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산책가자고 때는 강아지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아까 본 사나운 눈빛이 아닌 너무나 순한 귀여운 강아지같은 눈빛이다.
그러나 내 손을 잡고 흔들던 그의 손이 순식간에 재환의 손에 의해서 만류 되었다.
"손까지 잡을 필요는 없죠, 만약에 손잡고 싶으면 제 손을 잡으세요."
"아,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다니엘이 재환을 손을 잡았다.나는 순간 재환이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았다. 진짜로 잡을 줄은 몰랐나 보다.
뻣뻣하게 굳은 체 손을 잡힌 재환이와 아무렇지도 않게 재환의 손을 잡고 흔드는 그를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여왕님 웃을 일이 아니야...
재환이 울음이 설인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 모습에 마담도 웃음을 터트렸다.이 지하에 난생처음으로 큰 웃음이 터진 순간이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다녀오렴."
엄마와 아들 같았다.
마담이 웃으며 손을 흔들자 그도 해맑게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한 쪽 손에는 여전히 재환의 손을 꼭 잡고있었다.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어지간히도 기쁜지 우당탕거리며 빠르게 올라갔다.
"여왕님, 빨리 오세요!"
"알았어요, 기다리세요!"
벌써 다 올라간 것인지 위에서 크게 소리를 지른다. 방까지 울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아가, 무리하지 말렴."
"네."
그녀의 걱정을 뒤로하고 뛰어나간 곳엔 그와 재환이 사이좋게 손을 잡고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왕님, 저의 오른쪽 손이 비어있어요."
"어쩌라고 그래서 내가 손잡아 줬잖아!"
"나 아직 여기 지리를 몰라서 양손을 안 잡아주면 분명 미아가 되고 말 거야."
"아 진짜 수작 부리지 마라."
"그럼 내가 그 오른손을 잡아드려야겠네요?"
내가 그의 손을 잡아주자 두 남자의 표정이 희비가 갈렸다.
절망적인 표정으로 내 손을 바라보는 재환, 그리고 우리 둘을 밖으로 이끄는 다니엘의 미소가 봄같았다. 아주 따스한 봄.
그런 그들을 보자 나는 그들이 아주 좋은 동료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 네 손으로 코 후벼도 돼?"
"되겠냐?"
"그럼 여왕님 손으로?"
"미친, 차라리 날 죽여라."
아마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말이다.
문을 힘차게 열고 나간 밖은 짜증이 날 정도로 정말 좋은 날씨다.둘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한참을 그 문 앞에서 서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아 빼앗긴 땅에도 가을은 오는구나.
나도 모르게 내씹었다, 빼앗긴 하늘은 슬프게도 아름답고, 빼앗긴 산의 단풍들은 서글프게 갸륵하다. 옆을 바라보자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고 있는 그들이 보였다.
"우리 장터 갈래?"
"좋지, 이 시국의 가장 밑바닥을 볼 수 있는 곳이잖아?"
"밑바닥이라면 밑바닥이지."
"그렇지, 양지의 가장 어두운 곳이잖아."
"장터가 어두운 곳이면 우리는 어디쯤인데."
내 질문에 다니엘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너희가 있는 곳은 음지의 가장 밝은 곳"
"그럼 니가 있는 곳은?"
"내가 있는 곳?"
재환의 비꼬는 듯한 물음에 그가 웃음기를 거두며 대답했다.
"내가 있는 곳은"
"..."
"비밀"
"뭐?"
"그만하고 장터나 가자, 성우 오기 전에 와야 돼"
나의 만류에재환이 투덜거리며 장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손은 꼬옥 잡고 있다. 아마 잡은 손이 벌써 익숙해졌나보다.
"자 잘봐, 니가 말한 양지의 가장 어두운 곳을,"
"네 여왕님, 명을 받들겠나이다."
가볍게 장난을 치는 듯 진지하게 말하는 그의 손아귀의 힘이 세졌다.우리 셋은 어린 아이처럼 손을 잡고서는 장터를 향하였다.
가장 밝으면서도 가장 어두운 곳을 향해서.
더보기 |
안녕하세요, 육월봄입니다. 기다리신 독자님께는 죄송합니다.시험과 부상이 겹쳐서 글을 쓰기 조금 힘든 상황이었습니다.앞으로는 글을 자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궁금하신 점은 댓글로 알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