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극(異人劇)
w. 스며드는 문달
어느날 죽은 내 남자가 살아 돌아왔다.
그의 이름은 정윤오였다.
죽은 그이의 이름은 정윤오이다.
00. #1997 (과거)
재현은 몸이 약했다. 대개 쌍둥이 중 먼저 나온 형이 동생보다 훨씬 튼튼하고 힘이 세서 형 자리를 꿰찬거라고 하지만, 늦게 나온 윤오보다 젖을 물렸을 때 살려고 빨아대는 기 같은게 없었다.
쌍둥이 엄마는 그래서 조금 더 재현을 신경썼다.
윤오는 똑같이 생겼지만 혈색이라곤 하나 없이 파리한 인상의 재현을 보며 자랐다.
거울을 보면 윤오 앞에는 윤오의 얼굴이 있었지 재현은 없었다.
윤오는 재현이 자기의 친 형은 맞을까 이따금씩 생각했다.
재현의 입에는 항상 한약이라든지가 물려있었다.
햇빛을 보지 않아 징그러울정도로 허연 팔 안쪽의 여린 피부결엔 주사 바늘이 불같이 쑤시고 들어갔다 나왔다. 그러다 피멍도 점박이처럼 군데 군데 찍혔다.
윤오가 또래 친구들과 유치원에서 만나 놀고 자랄 동안 재현은 집 안에서 거의 죽은 듯이 지냈다.
한창 자랄 나이라 온 몸이 근지러울 법도 한데 의자에 가만 앉아 차를 마시다가 그 자세 그대로 몇시간을 창문 밖만 바라보는 날이 많았다.
재현은 특히나 윤오의 분홍 젤리같은 동그란 입술을 진득하게 잘 쳐다보았다. 얼마나 쳐다보았으면 윤오 본인조차도 재현이 자기의 얼굴은 몰라도 입술 모양은 세상에서 제일 잘 알거라고 여겼다.
윤오의 입은 재현에게 있어서는 큰 하나의 세상이었다.
이 집 밖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절대 꿈으로도 상상 못하는 일들이 윤오에게는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이었으니. 재현은 윤오의 입을 통해서 세상과 교류했다.
재현은 살짝 서러웠다.
자기 입은 약을 먹는 것과 토를 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게 없었다.
심지어 재현은 한글도 다 못뗐다.
더디게 기역 니은을 겨우 발음하는 재현을 두고서 쌍둥이 엄마는 한숨이 늘었다.
기역..니..은. 디귿...시옷.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하며 터졌다. 답답해져서 벌개지는 가슴을 두들기며 쌍둥이 엄마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따사로운 봄의 햇살을 받으며 윤오가 마당에서 리트리버와 뛰어놀고 있었다.
제프리- 이거 물어와 이거--
먼데서 경쾌하게 울리는 윤오의 웃음 소리와 가까이서 더듬거리는 재현의 목소리가 엇갈렸다.
01. #정윤오(현재)
정윤오는 죽었다.
나는 그가 몇초에 숨을 거두었는지까지 적어놓았다.
아무렇게나 찢은 종이에 모나미 검은펜으로 흘려 쓴 글씨로 그가 죽은 날을 써놓았다.
사고였다.
터널에서 역주행으로 달린 트럭에 제대로 들이박고 숨만 간당하게 붙어서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도중에 가버렸다.
빈소를 지키면서 눈물 한 방울을 흘리지 않았다.
나를 붙잡고 늘어지시는 어머님 앞에서도 가만히 영정 사진 속의 반반한 그 얼굴만 보았다.
장례를 완벽하게 치르고 나서 혼자 남게 된 집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쓰다만 원고를 열었다.
인준이 당분간은 쉬엄쉬엄해도 괜찮다고는 했지만 글을 쓰며 시간을 소비하지 않으면 머릿속에 정윤오가 넘칠 것 같았다.
미칠까봐 손을 까딱거렸다.
내가 당신을 이번 내 책의 주인공으로 올려주겠다 했잖아.
하필이면 쓰고 있는 부분이 딱 거기였다.
사랑해.
나 후쿠오카에서 너 있는 여기까지 입 한번 벙긋 안했다. 내 입에서 나오는 첫말은 누구 안 주고 너에게 바치고 싶어서.
영아, 사랑해.
하필이면 한글자 한글자 너무 소중해서 꼭꼭 기억하고 있다 그대로 옮겨 적고 싶었던 부분이었다.
나의 주인공이 죽어버렸다.
02. #TOUCHING(현재)
나는 네가 아직도 살아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범위는 내 손이 지어내는 글이라든지,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머릿속이라든지 온전히 내가 다룰 수 있는 바운드리에서만 적용했던 것이지
계산 불가능한 영역에 네가 뻗쳐 있는건 아무리 나라도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다.
내가 필요한건 네가 여기 왜 있는 것인지이다.
너인지 너를 똑닮은 누군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너의 얼굴을 한 그가 나와 한공간에 있다.
네가 생전에 좋아했던 디저트를 시켜놓고, 없으면 서운할 정도로 차고 다녔던 똑같은 디자인의 손목 시계를 간간히 들여다보다가, 나와 우연히 눈이 마주치면 나오는 눈을 찡그리는 버릇까지, 마치 보란듯이 내비치는 온통 정윤오 가득한 특징들을 다 가지고 있는 저 남자 좀 설명해줄래.
마침내 그가 다가오더니 자연스럽게 비어있는 내 앞자리에 앉았다.
나는 노트북을 덮고 긴장한 기색을 비치지 않으려고 커피잔을 들었다.
목구멍으로 넘기진 않았다. 식어서 차가워진 액체가 찰랑거리며 윗입술을 적시고 뒤로 밀려났다.
"정확하게 두시간 십사분. 두시간 십사분동안 여기 있었어요."
그가 손등뼈로 테이블을 두어번 두들겼다.
그 소리가 꽤나 발랄했다.
"자꾸 눈이 마주치니까 정이 가잖아요. 전 그래요. 오늘 처음봤는데 되게 친한 사람 같아요, 그쪽이요."
예전 같았으면 코웃음쳤을 작업 멘트에도 나는 굳어버린 얼굴을 필 수가 없었다. 시원하게 말려올라간 입꼬리가 미미한 내 반응에 민망해졌는지 서서히 처졌다.
"주저리 주저리 떠드는 타입 별로예요?그러면 바로 말할까요, 이름이 뭐예요?"
"..원래 소개는 안달 난 사람 먼저 하는거 아닌가."
내 말에 크게 찔렸는지 탄식 비슷한 소리를 내며 눈을 내리깔고 웃었다.
그러더니 내 눈을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가 제일 중요한 대목이었다. 그리고 뻑뻑해져서 기름칠이 필요한 녹슨 내 운명이 듣기 싫게 뒤틀린 소릴 내는 구간이었다.
"정윤오입니다."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자기 이름을 말하고 아까보다 한결 여유로워진 표정의 그가 이제 저가 원하는 걸 달라는 듯 턱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당장에 진통제를 입안에 털어놓고 싶어졌다.
약 대신 오래 놔두어 침전된 커피가 씁게 닿았다.
03. #그 애(과거)
윤오는 자라면서 구사하는 어휘도 의젓해졌다. 재현은 외국인이 한국의 영상물로 한국어를 깨치듯이 윤오가 쓰는 말투로 말을 익혔다.
윤오는 또래 애들치고 거칠지 않은 편이었다.
좋은 쪽으로 영악한 면이 있어 바깥에서는 똑같이 말해도 집으로 돌아와 재현과 엄마에게 학교에서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얘기할 때면 자기 선에서 나쁜 것들은 선별해 내는 것일 수도 있다.
요새 윤오의 입에서는 '영' 이라는 명사가 주를 이루었다.
쌍둥이 엄마는 윤오가 말하는 '영' 이라는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지 흐믓한 표정을 짓고서 아들의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영' 과 오늘 무얼 했는지 묻기도 했다. 그 옆에서 소외되지 않으려고 열심히 머리를 들이미는 재현은 그 '영' 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재현이 아는 '영' 은 숫자 0 뿐이었다.
어제 영이 머리 잡아당긴거 미안하다고 엄마가 준 초콜렛 줬더니 영이가 웃으면서 고맙다고 했어.
잘했어. 영이가 사과 받아줬구나. 앞으론 영이 머리 그렇게 잡아당기면 안돼. 영이 엄마가 그러는데 집에 와서 영이가 많이 아파했대.
응. 나 이제 영이 머리 안 잡아당길거야.
윤오 친구인가봐.
재현은 그렇게 유추했다.
윤오가 말하는 '영'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미묘해졌다.
일단은 윤오의 입 밖으로 '영' 의 얘기가 나오는 횟수가 초등학생 때에 비해서 현저히 줄어들었다.
요새 영이 얘기 잘 안하더라. 싸웠어?
뭘 싸워. 난 공학 다니고 걔는 여중가서 안 만나니까 그래.
재현은 여중의 의미가 시급했지만 윤오가 피곤하고 예민해보였기 때문에 잘 자라고 밖에는 더 말하지 못했다.
'영'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건 윤오가 영과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때였다.
전처럼 자세하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가끔 영이 집으로 놀러온다는 말을 엿들었었다.
재현이랑 그때 어디 놀러 가 있어.
윤오는 재현이 '영' 을 만나는걸 못하게 막았다.
그것이 퍽이나 섭했지만 내색은 않았다.
윤오가 원하던 대학에 떡하니 붙었을때야 재현은 완전하게 알 수 있었다.
초등학교때부터 친구였던 '영'은 성별이 다른 여자 아이고, 고등학교를 같이 다니다가 엄마아빠처럼 사귀게 됐다는 것을.
재현은 처음으로 밝게 웃으며 엄마아빠의 칭찬과 쓰다듬을 받고 있는 윤오가 얄미웠다.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해서가 아니였다.
재현도 모르게 재현이 '좋아하게 된' 영을 가진게 윤오라서였다.
재현은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는 '영' 을 좋아하고 있었다.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ㅎ.. 언젠가 써보고 싶네요. 이름이 두개라 행복합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