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락비/피코] 해를 품은 달 05
아저씨, 이상한 녀석을 만났어요.
그냥 바라만 봤을 뿐인데 내가 솜사탕처럼 녹아 내리는 기분이에요.
아저씨가 다가오지 말라고 해주세요. 버스정류장 의자에 하염없이 앉아있던 날 혼내시던 것처럼, 다가오지 말라고 호통쳐주세요.
아저씨…아저씨…
무서워요.
따뜻해서, 볼에 닿은 손가락이 너무 따뜻해서, 나 너무 무서워요….
얼음, 겨울 이런 감각적인 차가운 것은 워낙 날씨나 온도에 민감한지라 극도로 꺼려지지만 혼자, 독방 이런 추상적인 차가운 것에는 금방 익숙해지곤 했다.
이외에도 외로움, 차가움, 어두움, 막막함, 불행, 먹구름 같이 회색빛을 띈 그것들….
그리고,
내가 하얗고 찬 운명을 품고 태어났다는 걸 받아들인 그 순간, 미치도록 외롭고 눈물나던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당연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부터 너희 담임을 맡게 될 담당과목 수학, 김유권이라고 한다.˝
정수리에 스며들 것처럼 따스하게 내 머리칼을 부비는 햇살에 부스스 뜬 눈에 보이는 것은, 아까와는 달리 느슨하게 세워진 표지훈의 등과 언제 온건지 반을 꽉 채운 새로운 아이들, 그리고 교탁에 서서 사람좋게 웃어보이며 자기 소개를 하시는 젊은 남자 담임선생님이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녀석의 새근대는 숨소리를 듣다가 슬며시 따라 잠이 든 것 같았다.
따라 잠이 든다라. 뭔가 여유롭네.
…겁도없이 무슨 자격으로.
탁탁, 어느 새 많이 길어 눈을 살짝 가리는 앞머리를 털어내며 슥, 허리를 일으켰다.
˝너네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다. 여기 놀기 잘하게 생긴 녀석들 몇 눈에 띄는데, 너네 담임 학생부거든? 짤 없어, 짤 없어, 머리 내일까지 싹 다 원상복귀 해와.˝
아아아아-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져나왔지만 담임선생님은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 돼. 내일까지 안 해오면 남자 여자 안 가리고 바리깡으로 머리 싹 다 민다. 장난 아니야, 이것들아.
짐짓 무서운 표정으로 말을 하시는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낯설지 않아 가만히 머릿속을 헤집어보니, 교무실 때문에 1학년 복도를 몇 번 오가면서 가끔 마주친 적이 있는 분이였다.
아.
그리고 정말이지 잊을 수 없던,
˝…향기.˝
살짝 목례를 하고 스쳐지나갈 때마다 선생님의 몸에서 나던 은은한 향.
향수같지는 않고 자연스레 가지고 있는 체향같던,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포근한 느낌을 가진…코 끝에 아롱아롱 보드라운 춤을 추며 머물다 가는 것처럼, 참 좋았는데.
사람한테 되도록 '호감'을 갖지 않도록 노력하는 나였지만, 그 향의 잔잔한 파급력 때문인지 선생님이 웃으실 때마다 나까지 기분이 간질거린다.
한 번 더 맡고싶지만 멀리해야지, 저 사람. 내 호감을 가져간 사람을 내 운명에 다치게 하긴 싫으니까.
슥, 다시 책상에 왼쪽 뺨을 붙이고 엎드렸다. 그 상태로 눈만 깜빡깜빡.
열고 닫히는 눈 사이로 저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앉은 아이들 틈으로 자꾸만 햇살이 스미는게 보인다.
내가 있는 운동장 쪽 창문을 통해 내려오는 그 얇은 햇살을 손가락을 들어 죽- 따라가다가 순간 멈칫. 숨을 들이켰다.
…손가락.
「˝…어.˝」「˝…˝」
「˝너…그…˝」
「˝…˝」
「˝볼…되게 하얗고 차갑다. 모, 모찌같아.˝」
모찌.
햇살 줄기를 따라가던 손가락으로 나도 모르게 내 볼을 살금살금 쓸었다.
˝…이상해.˝
´뽀얗다´도 아니고,
´말랑말랑하다´도 아니고,
ㅡ하얗고 차다니.
왜 이상한 표현을 해가지고 계속 생각나게 만들어.
▒▒▒
대충 예상은 했던대로 임시실장은 표지훈이 되었다. 표지훈은 원치 않는 듯 했지만 친구들의 추천이 워낙에 거셌다.
그럼 우리반 임시실장은 지훈이가 하도록해. 말을 마치고 슬쩍, 표지훈을 쳐다보는 담임선생님의 표정이 이상하게 조금 무거웠고, 그런 그를 무표정으로 응시하는 표지훈의 시선 또한 묘했다.
둘의 이상한 기류를 눈치챈 건 아무래도 나 뿐인 것 같았다. 궁금하긴한데 별로 알아내고 싶진 않았다.
˝…개학 첫 날이라 야자는 없다. 워워, 소리지르지마. 시끄럽다. 방방 떠서 놀고 떠드는거 이해하는데, 시간표라도 외워두도록해. 이상.˝
간단한 조회를 마친 담임선생님이 출석부를 교탁에 두어 번 두드리신 후, 빠르게 교실을 나가셨다.
살짝 소란스럽던 교실은 담임선생님이 나감과 동시에 시끌시끌한 시장으로 변했다. 썰렁한 것보단 시끄러운게 낫다는 심정으로 책상에 왼쪽 뺨을 붙이고 엎어져있던 그대로 팔을 끌어올려 그 위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임시실장 표지! 왜 한줄 짜리 자리에 앉냐. 일로와, 같이 앉게.˝
˝왕따 티내냐, 골라 앉아도 꼭. 빨리와, 내 옆자리 빈다.˝
문득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팔 위에 얹고 가만히 감고 있던 두 눈을 번쩍 떴다.
교실의 책상은 총 여섯줄로 되어있는데, 창가와 복도의 줄은 모두 한 줄이고 그 외엔 모두 두개씩 짝꿍식으로 붙어있는 형식이였다.
생각해보니, 나와 표지훈의 줄은 운동장 창가 쪽의 한 줄 짜리.
음, 앞자리가 비겠구나.
「˝내가 워낙에 역마살 낀 것 마냥 발발거리면서 돌아다녀서 웬만하면 모르는 애가 없는데…아무리 생각해도 처음보는 얼굴이야.˝」
「˝…˝」
「˝이름이 뭐야?˝」
우지호.
너는 못 들었겠지만, 아까 말했었는데.
내 이름은 우지호야.
네가 친구들에게 가버리고나면, 두번 다시 내 이름따위 물어 볼 일 없을테니까 오늘만큼은 속으로라도 수백번, 수천번 대답해줄게.
내 이름은…,
˝지호.˝
…!?
˝뭐?…뭐래, 이 병신이.˝
˝우지호.˝
거짓말.
거짓말 같은 상황이 일어났다.
더 거짓말처럼, 엎어져있는 정수리 쪽으로 표지훈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짐과 동시에 내 볼을 찔렀던 녀석의 손가락이 살풋살풋 내 머리칼 틈에 장난스럽게 얽히었다.
˝지호? 지호가 뭐야. 사람 이름인가.˝
˝여기 자고있는 애. 니 새끼들하곤 다 친하니까, 새 친구 좀 만들어볼란다. 불만있는 새끼는 물도 가져오도록.˝
˝아…아 씨발, 저 새끼 또 오지랖…벌써 이름까지 물어봤냐?˝
˝뭐, 그런 셈이지. 대답을 좀 늦게 듣긴 했지만.˝
˝어휴, 새끼 무튼 오지랖은 존나게 넓지. 니 맘대로 하세요.˝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와 다르게 내 심장소리는 심장을 꺼내어 귀에 댄 것 마냥 미친듯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
아저씨, 어떻게해요.
날 감싸주고 안아줄 것 같은 향을 지닌 사람과, 내 온몸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사람이 동시에 내 앞에 나타났어요.
…안 돼요. 정말 안 돼요, 아저씨.
내가 한껏 세우고 있는 이 하얗고 차가운 얼음 손톱조차 녹여 낼 것 같은 따뜻한 사람들은, 절대 안 돼요.
아저씨도 아시잖아요…게다가 지금의 나는 정말 안 돼요. 이 사람들을 뿌리칠 힘이 조금도 남아있질 않아. 오히려 그들의 품에 파고 들지도 몰라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이 사람들, 내 욕심 때문에 위험해 질수도 있는 거잖아. 나는 그런 운명을 안고 태어났잖아요….
아저씨… …아저씨….
▒▒▒
어이쿠 전편 댓글에 답글 달아야는데 깜빡하고 글부터 올리네요. |
내일 달아야징....☆ ^-^ ☆ 지금부터 스토리전개를 빠르게 하려고해요! ㅠ_ㅠ.......지루하실거 같아서... |
* 암호닉 :)
쵸코/이불/달/솜사탕/낙서/루팡/오이/쌀알/나의 왕자님/현기증/달토끼/쨔응/새주/꿀/용구리/우샤론/쿠우/초코푸딩/뀨 님 감사합니다 !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