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락비/피코] 해를 품은 달 06
아저씨, 어떻게해요.
날 감싸주고 안아줄 것 같은 향을 지닌 사람과, 내 온몸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사람이 동시에 내 앞에 나타났어요.
…안 돼요. 정말 안 돼요, 아저씨.
내가 한껏 세우고 있는 이 하얗고 차가운 얼음 손톱조차 녹여 낼 것 같은 따뜻한 사람들은, 절대 안 돼요.
아저씨도 아시잖아요…게다가 지금의 나는 정말 안 돼요. 이 사람들을 뿌리칠 힘이 조금도 남아있질 않아. 오히려 그들의 품에 파고 들지도 몰라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이 사람들, 내 욕심 때문에 위험해 질수도 있는 거잖아. 나는 그런 운명을 안고 태어났잖아요….
아저씨… …아저씨….
얼음, 겨울 이런 감각적인 차가운 것은 워낙 날씨나 온도에 민감한지라 극도로 꺼려지지만 혼자, 독방 이런 추상적인 차가운 것에는 금방 익숙해지곤 했다.
이외에도 외로움, 차가움, 어두움, 막막함, 불행, 먹구름 같이 회색빛을 띈 그것들….
그리고,
내가 하얗고 찬 운명을 품고 태어났다는 걸 받아들인 그 순간, 미치도록 외롭고 눈물나던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당연해지기 시작했다.
내 머리칼에 잘게 스미던 표지훈의 손가락이 떠나갔지만, 한동안 엎드린 자세를 계속 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냥, 피곤해서.…는 거짓말.
실은, 머리칼 사이를 햇살처럼 비집던 그 손가락이 문신처럼 떠나가질 않아서, 고개를 들면 아까처럼 녀석과 눈이 마주쳐버릴까봐.
눈이 마주치면, 몰래 대답한 이유를 물어올까 겁이나서, 그래서 숨소리조차 죽인 채 침묵을 지켰다.
대신에, 감은 눈 속으로 상상을 해본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교실에서 표지훈이 잠이 든 내 머리칼을 쓰다듬는 상상.
상상속에서 따뜻한 녀석의 손길에 베시시 잠이 든 나는, 연한 파스텔톤 하늘을 맘껏 맛보는 나른한 봄날의 흰 나비가 되어 있었다.
너무나도 눈부실정도로 흰 날개를 팔랑이는 나비가 되어서는, 내 발밑으로 무수히 녹아 쏟아지는 하얗고 찬 달빛가루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만큼 몽실몽실 기분좋은 구름을 가득 베어물고 음, 음….
그 노래…
그 노래를 부르며 나는….
˝너도 나 잠 자는데 말했으니까 나도 너 잠 자는데 말할래.˝
˝…˝
˝…왠지 듣고있는 것 같은 기분은 뭐지. 무튼! 치켜 올라간 눈꼬리, 빨간 입술. 나 기억났어.˝
˝…˝
˝생각해보니, 나. 널 본 적이 있어.˝
˝…˝
˝저녁이였는데, 어떤 편의점 옆 골목에서 네가 울고있던 걸 봤어.˝
울고 있었다. 너무나도 서럽게.
˝온몸을 잔뜩 움츠리고 흑흑거리면서 음, 음 하는 이상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
˝내가 몇 발 다가가니까 뚝 그치는거야.˝
˝…˝
˝그래서 뭐지, 하고 내 갈길 가려했는데….˝
˝…˝
˝갑자기 푸스스- 웃는거야, 네가.˝
˝…˝
˝따뜻해…기분좋아…하면서. 그래서 이제 괜찮나, 싶어서 몇 발 물러나니까 다시 추워…너무 추워…하면서 울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그냥 와버렸는데.˝
˝…˝
˝궁금하다. 왜 울고있던거야? 아니, 그보다.˝
˝…˝
˝그 노래, 무슨 노래야?˝
눈이 먹먹해지고 목울대가 답답하게 막혀온다.
…노래, 그 노래는 말이야.
˝그 노래를 듣고있으려니까 막 눈이 부시더라.˝
˝…˝
˝너한테서 빛이나는 것 같았어. 하얗고 찬데…˝
˝…˝
˝…묘하게 예쁜.˝
그 노래는, 세상이 까맣게 물들었을 때 부르는 노래야. 아무것도 안 보이면 난 무지 겁을 먹거든. 태어날 때부터 병 적으로 어둠이 무서웠어.
그럴때마다 나랑 꼭 닮은 달빛의 품에 파고들고 싶어서, 따뜻해지고 싶을 때 부르는 노래야.
ㅡ괜찮아.
내가 있잖아.
여기 이렇게, 널 안아주고 있잖아.
내 운명의 잔혹함에 위로받고 싶을 때. 세상에서 제일 사랑받고 싶을 때.
그 때 부르는 노래야.
˝그리고 제일 궁금한게 있어.˝
˝…˝
˝그 때 너를 어떻게 위로해줘야 했던거야?˝
▒▒▒
새로운 선생님들이 들어오셨지만, 모두 수업은 하지 않으시고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셨다. 그 덕에 표지훈은 앞을 보고 있었고, 나도 자는 척 하던 허리를 일으킬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들 자기소개와 시시콜콜한 이야기, 앞으로의 학교생활에 대해 짤막하게 말씀을 하신 후 금방금방 나가시는 바람에 다시 재빨리 엎드려 자는 척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엎드리자마자 정수리에 곧바로 느껴지는 표지훈의 시선에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왜 울었냐고 묻지마.
내 노래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마.
다가오지마.…눈 마주치지 말자, 우리.
안 그러면 너 다쳐.
너 다치면, 나는 죄책감에 죽어.
그렇게 4교시는 날개를 단 듯 빠르게 날아가 사라지고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기 직전, 떠들썩한 교실에 누군가 들어오시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 조용. 어후, 목소리 큰거 봐, 이것들.˝
은은한 체향만큼 간지러운 목소리의 담임 선생님이다.
이어 아까 나가실 때처럼 들어오시자마자 출석부로 탁탁 교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에 슥, 표지훈이 앞을 돌아보는 인기척이 느껴져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눈이 마주쳤다.
표지훈 말고, 담임 선생님이랑.
눈이 마주치자 담임 선생님의 눈꼬리가 고운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여기 지호라고 있나? 우지호.˝
왜 그랬는진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모르겠어.
˝아, 네가 우지호구나.˝
왜 그의 말에 기다렸단 듯 번쩍 손을 치켜든건지.
담임 선생님과 마주하고 있어 보지는 못했지만, 옆얼굴로 앞자리 표지훈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을 느끼며 손을 든 채 얼빵한 얼굴로 고개만 두어번 끄덕끄덕.
˝점심먹고 2층 교무실 들려서 잠깐 나 좀 보고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끄덕. 내 고갯짓에 담임 선생님이 싱긋 웃더니 가지고 온 출석부를 챙겨들고 휙 나가셨다. 그가 나가면서 작게 인 바람에 은빛 가루가 사르르 나뒹군다.
살짝 손을 뻗어 그것을 쥐는 손모양을 해보지만, 잡히는 건 없다.
은은하고 짙은 군청색이 섞여 든 은색 안개빛을 닮았어.
안개, 그리고 달….
그래, 내가 노래를 부를 때 찾아오는 달빛하고 비슷한 향이야.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 텅 빈 손을 펴 킁킁, 냄새를 맡아본다. 아무향도 나지 않아. 그래서일까. 멀리하자고 다짐했던 것이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나…부정하고 있었지만, 기다리고도 있었던걸까. 선생님 체향 말이야.
정말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맡아볼까. 그리고 잊는거야.
그냥 '위로가 되는 향이 나는 사람'으로 묻어두는거야.
▒▒▒
아저씨.
나, 나약해졌다는 것을 핑계로 오늘 하루만 욕심부려봐도 될까요.
피하려고 애써도 자꾸만 가슴이 쏠리는 따뜻한 햇살에 잠깐 몸을 부비고, 지친 마음이 새근새근 기분 좋은 꿈을 꿀 수 있게 만드는 은은한 향에 살짝 코를 맞대고.
오늘 하루만, 정말 딱 하루만.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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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시간 대에 올리는 건 처음 같네요 :) |
그러하다....! 그런데 독자분들이 헷갈려 하시는 게 있는 것 같아요! 해/달/밤안개. 이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요! 모두 한 명 뿐입니다. 누가 누군지 다 눈치 채셨을 것 같은데...지호가 달인 것은 처음부터 아셨을거고, 다른 인물들은 각자 해와 밤안개에 맞게 묘사를 하려고 노력했거든요! 아..아실거라...ㅁ...믿어요.... ^-^;;;;;땀땀땀;;;;;;;;;하...부족한 묘사력...ㅁ7ㅁ8 |
* 암호닉 :)
쵸코/이불/달/솜사탕/낙서/루팡/오이/쌀알/나의 왕자님/현기증/달토끼/쨔응/새주/꿀/용구리/우샤론/쿠우/초코푸딩/뀨/회색빛 하늘색/부적금화 님 감사합니다 !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