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은 복잡한 머리를 흔들었다. 너무도 눈에 익어 지겹지도 않을 정도가 되어 버린 네온사인들이 속눈썹 끝에서 일렁였다. 서서히 싸늘해지기 시작하는 바람이 얇고 굽슬거리는 머리칼을 자비 없이 흐트러뜨렸다.
"미미? 오랜만이네."
바늘로 콕 찌르면 툭 터질 것 같은 붉은 입술을 가진 남자가 입꼬리를 주욱 끌어당겨 웃었다. 반짝이는 눈매가 눈동자를 가렸다. 어, 간만이야. 손을 들어 그에게 순순히 호감 표시를 한 태일이 시가를 물고 주저앉아 있는 남자의 앞에 멈추어 섰다. 차가운 시멘트 난간 위에 궁둥이를 붙였다.
"웬일이야, 네가. 쫓겨나서 도망 다닌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니었나? 그런 것치곤 상한데 하나 없이 말짱한데? 피부도 더 좋아진 것 같고.... 내가 항상 말하지만, 미미는 계집애 같이 생겨서 몸에 흉터도 하나 없으니 마음만 먹으면 쉽게 대성할 수 있을 거야. 지금도 뭐... 대성하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긴 속눈썹이 한쪽만 나풀대듯 접혔다. 미미. 여우같은 년이란 뜻이었다. 사춘기가 일찍 끝나 성 정체성이 확실했던 태일은 여우 같거나 계집애 같은 행동은 맹세코 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는 얼굴선이 부드러웠을 뿐이고, 그들의 무시에 무관심 또는 웃음으로 일관했을 뿐이었다. 이제 미미라는 호칭은 비하보다는 애정 표현에 가까웠다. 그를 명확히 알고 있던 태일이 차분히 앉아 유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으나 검은 눈동자 아래서는 온갖 욕설이 스쳐지나갔다. 태일의 팔목을 들어 이리저리 뒤집어 보는 손은 하얗고 가늘다. 그의 창백한 낯짝에 만연했던 미소가 약간 비틀어졌다. 이제는 왼쪽 입꼬리만 길게 올라가 있다. 안구 안쪽에 작은 꼬마전구라도 박혀 있는 걸까. 어두운 공간 안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눈매가 재수 없다. 그 눈을 가지고 키라키라, 라고 했던가. 차게 달라붙어 오는 손가락을 귀찮다는 듯이 잡아 떼어낸 태일이 웃음기 하나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엿이나 처먹어, 유타. 계집애처럼 예쁘장한 건 나보다 네가 아닌가 싶은데."
"하하하. 여전하구나. 부러워서 그렇지. 미미는 귀엽잖아? 나는 귀여운 게 좋단 말이야. 그래서 여기까지 온 이유는?"
"문제가 좀 생겼어."
"으음. 내가 도와줄 일인가?"
"......."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 일이냐고 묻는 거야, 미미. '내' 도움이 필요한 거야, 아니면 '우리'의 도움이? 아니, 애초에 도울 일이기는 한 거겠지?"
겨울 이후 처음으로 재회한 그는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다. 사태의 진상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눈을 가졌다. 키라키라. 반짝이는 눈은 긴 갈색 속눈썹 아래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따갑게 태일을 응시한다. 그 화려한 미소의 기저에는 시선만으로 태일을 옭아매기라도 할 것 같은 날카로움이 깔려 있다.
"그냥 사실대로 말해. 내가 도와줄 수 있다면 도울 테니."
"숨겨 줘. 덫에 걸렸어.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지난 번엔 네가 내게 목숨을 빚졌으니......."
"아아, 알았어. 알았어. 뭘 그렇게 거창하게까지. 그냥 해 본 말이었어, 당연히 돕지. 역시 미미는 귀엽다니까."
말을 끊으며 웃는 하얀 피부 아래서 묘하게 꿈틀거리는 근육이 신경질적인 느낌을 풍겼다. 마디가 조금 튀어나온 손가락이 차분하게 내려와 있던 갈색 앞머리를 마구 헤치고 다시 정리했다.
"뭐 조만간 개죽음을 당한다고 해도 별 일은 아닌데, 내가 죽으면 너에게도 손해잖아."
"그럼. 우리 미미가 죽으면 내가 어떻게 살겠어? 그러고 보니, 그럼 덫에 걸린 미미는 예쁜 사슴이고 나는 멋진 나무꾼 형님인 거야? 오랜만에 이런 일도 나름대로 재밌겠는데."
"시끄러워. 변태 같은 놈. 한다는 소리마다 가관이야. 그 시가, 후리와로 넘어갈 물건이지? 자주 보던 물건이 아닌데. 계속 들고만 있는 거 보니까 별로 마음에는 안 든 모양이네."
"아니, 꽤 괜찮은 것 같아. 근데 이게 좀 심하게 사람을 풀어 주거든. 힘이 쫙 빠져서 사람이 종이인형처럼 나풀댄다니까. 그래서 아주 조금씩만 맛보고 있지. 미미와 대화하는데 종이가 돼버릴 순 없잖아."
찬바람에 하얗게 흩어진 연기가 두 사람의 머리칼에 묻어났다가 사라졌다. 태일은 눈으로 연기의 끝과 그 시작을 좆았다. 시가의 끝에서 빨갛고 하얗고 까민 색의 점들이, 아주 느린 속도로 번갈아 빛났다.
ROTTEN BABY
W. 보풀
"너 담배도 펴?"
"뭐야! 아, 깜짝 놀랐네. 말 좀 하고 다니지."
"그거 줘."
"왜."
"몸에 안 좋잖아. 기껏 안 좋은 것 다 치워 놨더니 이번엔 담배야?"
"뭐 어때. 이미 장수는 물 건너 갔어.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숨 좀 쉬고 살아야 될 것 아니야."
동혁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도톰한 입술에 물린 하이얀 종이 막대 끝에서, 빨갛고 하얗고 까만 점들이 느린 속도로 반짝였다. 흐린 날씨였다. 두터운 구름에 햇빛이 가려져 거의 검은색으로 보이는 하천의 수면이 일렁였다. 동혁은 잠시간 여주를 향했던 시선을 내려 아까처럼 하천이 일렁이는 방향을 향했다. 다 죽어 누렇게 된 잔디를 깔고 앉은 채였다. 세운 무릎 위에 턱을 괴고 말없이 흐르는 물줄기를 응시하던 동혁이 고개를 뒤로 꺾어 여주를 보았다.
거꾸로 마주친 검은 눈동자 위로 넘실거리며 뿜어져 나온 짙은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전부 덮었다. 잇새로 새어나오는 먹구름이 강변에 잔뜩 설치된 공장의 굴뚝 같았다. 손을 뻗어 동혁의 입에 물린 담배를 빼앗아 든 여주가 그의 뒤편에 주저앉았다. 그 움직임을 따라 몸을 조금 일으킨 동혁이 빠른 속도로 고개를 돌려 뒤에 앉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치켜뜬 눈으로 어깨 너머를 응시하던 동혁이 이내 짙은 눈썹을 찡그렸다. 부르튼 입술 새에 제 담배가 물리는 장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눈동자가 하얀 담배 끝에서 입술로, 천천히 이동했다. 삼백안이 된 눈은 동혁을 평소보다 더 냉정하고, 조금은 우수에 찬 것처럼 보이게 했다.
내가 못 피울 거라고 생각하겠지. 부르튼 부분마다 발갛게 된 입술이 바싹 마른 하얀 막대의 끝을 깊게 빨아들였다. 후, 하늘을 향해 뭉글뭉글 피어오른 연기가 순식간에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
연기의 마지막을 빤히 지켜보던 동혁이 찡그렸던 눈썹을 펴고 웃었다. 왠지 조금 마음을 놓은 표정이었다. 담배는 그렇게 피는 게 아니야, 꼬맹아. 혀를 내어 마른 입술을 축인 동혁이 팔을 뻗어 아까의 그와 같은 눈으로 동혁을 응시하는 여주의 입술에 의미 없이 장식처럼 물린 담뱃대를 빼앗아 갔다.
아까에 비해 끝이 살짝 올라간 소년의 입술에서는 하천을 향해 주욱 뻗어 가는 연기가 만들어졌다. 둘의 시선이 반투명한 연기를 따라 그 뒤편의 물살에 닿았다. 죽은 잔디에 담배를 비벼 끈 동혁이 상체를 돌려 여주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한테서 담배 냄새 나? 당연하지, 너 지금 냄새 진짜 별로야. 뭐야, 너도 폈잖아. 니가 그렇게 피는 거 아니라며. 그럼 난 안 핀 거지. 그렇다 치자, 그냥 계속 피지 마. 너나 피지 마. 난 이미 틀렸고.
여주가 가자미눈을 하고 한마디도 지지 않는 동혁을 째려보았다. 입꼬리를 씩 당기고는 재미들린 듯이 여주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민 동혁에게서 알싸한 담배 냄새가 풍겨 왔다. 그 아래로 싸구려 풍선껌 향기가 났다. 재현이 가게에서 가져온 샴푸였다. 얼굴이 약간 붉어진 여주를 보고 말가니 웃던 동혁이 황금빛 잔디밭에 보란듯이 드러누웠다. 바람이 불었다. 동혁의 머리카락이 잔디 위에 쏟아졌다. 부스럭대며.
"좋다."
"넌 이런 데가 뭐가 좋다고 그러냐. 저 을씨년스러운 저수지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장소가 중요한가?"
툭 내뱉은 동혁이 저수지를 쳐다보던 눈을 돌려 흘깃 여주를 바라보았다. 타버릴 듯이 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날이 선선해지기 시작하면서 동혁은 종종 그런 말을 뱉곤 했다. 별다른 생각도 없어 보이는 단순한 단어들의 배열이었지만 여주는 그 별 뜻 없어 보이는 문장을 들을 때마다 묘하게 땀이 나는 손바닥을 쥐어야 했다.
이동혁은 그런 사람이었다. 늘 배려 없고 지나치게 솔직한 말들을 뱉어서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 앗, 벌레. 양팔을 펴고 드러누운 동혁의 손바닥 위로 조그만 벌레가 기어올라왔다.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감고 누워서 실실 웃고만 있는 동혁을 가만히 지켜보던 여주의 손끝이 살금살금 다가갔다. 천천히, 눈치채지 못하게. 다가오는 위협을 느낀 건지 순식간에 달아난 벌레가 손바닥 끝에서 다시 잔디밭으로 툭 떨어졌을 때, 동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긴 손가락으로 여주의 손끝을 감싸쥐었다. 꾹 쥐었던 손이 조금 풀렸다가 다시 파고들어 손바닥을 맞댔다. 고쳐 쥔 손바닥이 뜨거웠다. 이동혁은 또 그랬다. 갑작스럽게. 실실 웃던 얼굴 그대로 손에만 힘을 주어서. 아까 그 벌레가 잔디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걸 지켜보며 여주도, 이제 가야 돼,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느릿느릿 일어난 동혁이 바닥에 있는 잔디 이파리들을 손아귀 한가득 집어들었다. 그리고 둘의 머리 위로 뿌렸다. 야! 뭐 하는 거야. 여주가 쏟아지는 잔디 조각들을 향해 허공을 휘휘 저었다. 동혁은 정말이지 온몸에 잔디가 묻은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여주를 보고 그냥 웃고 있을 뿐이었다.
잔디투성이의 둘은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하수구로 돌아왔다. 해가 저물기 시작할 즈음의 골목은 평소보다 적막했다. 곧 또다른 하루가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찬바람이 등을 떠밀 때마다 둘의 걸음이 빨라졌다. 골목의 코앞에 와서야 문득 아, 하고 탄성을 내지른 동혁이 무언가를 기억해냈다. 재현이 형이 자기 나가기 전에 들어오라고 했는데. 종잇장처럼 얼굴이 팍 구겨진 동혁이 임시로 경첩을 달아 둔 철문을 열어젖히고 계단 아래로 빠르게 뛰어내려갔다. 벽에 쿵 부딪힌 문이 쇳소리를 내며 도로 닫히기 시작했다. 문 또 망가지겠네. 닫히기 전에 붙잡은 손잡이가 차가워서 목 뒤에 약간 소름이 돋을 때였다.
"야."
찬바람 부는 골목 안에서, 따뜻한 손 하나가 여주의 팔목을 감싸쥐어 아래로 잡아당겼다. 벽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민형이었다. 제 앞에 똑같이 폭 주저앉은 여주를 보며 웃을 듯 말 듯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린 민형이 잡고 있던 손목에서 손을 떼었다.
"들어가지 마."
"깜짝이야. 왜?"
"그냥. 심심해서. 어디 갔다 왔어?"
"잠깐 저수지에. 심심한데 왜 혼자 나와 있어, 들어가면 되지."
"......저수지?"
"응. 왜? 산책도 좀 하고 바람도 쐴 겸 갔다 왔는데."
"이동혁이랑 둘이?"
다정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게 굳은 얼굴이 되물었다.
갑자기 바람소리가 멈추었다. 올곧게 쳐다보는 민형의 눈빛과 목소리가 지나치게 여주에게로 집중되었다. 주변에 장막이 세워져 있는 것 같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라고 하면 오해할지도 모른다.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하기엔 아까의 이상했던 분위기가 떠올라서 그럴 수 없었다. 별 것 아닌 질문에 한참을 고민하는 동안 줄곧, 뚫어지게 쳐다보던 민형이 천천히 팔을 뻗어 여주의 머리에 묻은 잔디를 하나씩 떼어냈다. 조금 전 팔목을 감싸 잡았던 것보다도 훨씬 조심스러운 몸짓이엇다.
"아무도 없는 곳에 둘이 있는 거, 피하는 게 좋아."
"......."
"그게 누구든. 나도 마찬가지고. 딱 지금."
"......."
"이런 거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건데, 알아들었나 모르겠네."
마른 잔디를 든 손이 공중에 멈추었다. 아까부터 저수지 물처럼 깊이 가라앉아 있던 눈매가 여주의 눈동자를 거쳐 바람에 삐걱대는 문을 향했다.
"지금 이런 거."
"그래, 이런 거. 이해한 것 같아서 다행이네."
미묘하게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린 민형이 여주의 볼 근처에 머물러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손에 쥐어져 있던 잔디 끄트머리가 조금씩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와 목덜미와 쇄골을 아주 약하게 간질였다.
"사람을 너무 믿지 마. 생각보다 사람들은 너한테 차가워. 그렇게 쉽게 마음을 줬다간... 믿던 사람한테 총 맞아서 가슴 한복판이 뻥 뚫려도 할 말 없는 거야."
무릎을 짚고 일어난 민형이 손가락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잔디를 시멘트 벽에 대고 주욱 그으며 느릿느릿 걸었다. 잊지 마.
물을 잔뜩 먹인 해초처럼 눅눅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비처럼 쏟아졌다. 어딘가 애처로워 보이는 뒷모습이 거의 닫혀 있던 철문을 열고 사라졌다. 그런 표정과 말투는 오토바이 사고가 났던 날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민형의 손이 지난 자리를 따라 남은 연녹색의 끊어질 듯 말 듯한 선 아래에는 동혁의 담배꽁초처럼 절반 정도가 닳아 없어진 잔디 이파리가 바람에 잘게 들썩였다.
어쩌지.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여주는 민형이 가 버린 자리를 보고 그냥 앉아 있었다. 민형의 손에 절반이 으깨어지고 남은 잔디 잎이 바람에 쓸려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느지막이 해가 저물어 하늘에 단 한 조각의 노란 빛도 사라진 후에 여느 때와 같은 차림의 재현이 나올 때까지. 문 옆에 황망히 앉아 있는 여주를 보고 재현은 말했다.
"무슨 일 있었어?"
"아... 오빠.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심심해서."
여주의 입에서 민형이 흘리듯이 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심심하니까 들어가지 말라던 말도, 지금처럼 툭 튀어나온 말이었을까. 하나도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풀죽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일도 없어요.
"내가 매일 하는 일이 뭔 줄 알아?"
"네?"
"섬세한 언니들 기분 풀어 주는 일이야. 기분이라는 게... 말로 풀리기도 하고, 다른 방법으로 풀리기도 하지만."
낮고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재현 특유의 조곤조곤한 말투는 그냥 마주본 거리에서 말해도 귓가에 속삭인 것처럼 들렸다. 무릎을 짚은 채로 여주의 얼굴을 조심스레 들여다 보던 재현이 웃었다. 볼에 깊게 보조개가 패이는 게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골목 안에서도 보였다.
"농담이야. 여자들은 너무 섬세해서 어렵더라. 조금만 건드려도 상처받고 울고 하니까 뭘 할 수가 없다. 사랑해 줘도 울고, 눈 앞에서 꺼져줘도 울고. 너도 그런가."
"전 아니에요. 눈물 별로 없어요."
"예쁘네. 눈물 별로 없다는 거, 방금 되게 설렜는데. 알아?"
"자꾸 장난치지 마세요. 저도 다 알거든요. 장난인 거."
"누구 맘대로 장난이래. 내가 뭐만 하면 다 장난이라고 그러더라. 넌 이게 장난으로 보여?"
입이 찢어져라 웃던 게 조금 사그라들었다. 가로등을 등지고 섰던 재현이 꽉 쥐고 있던 손바닥을 내밀었다. 여주를 다 덮을 정도로 긴 그림자가 내민 손바닥도 가려 버렸다. 어둠 속에 가려졌던 손바닥을 그림자 밖으로 내밀어 보이면서 재현은 또 웃었다. 이제 보이지. 불빛을 받아 주홍색으로 물든 손끝이 조금 떨렸다. 하얀 손바닥 위에 방금 생긴 듯한 손톱 자국이 네 개 나 있었다.
"방금 전에 정말 설렜는데. 네가 고백한 줄 알고 깜짝 놀라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는데 몰랐지. 거 봐, 그래 놓고 나한테 장난치지 말라고 하고. 괜히 애매하게 말해서 나 갖고 장난친 건 너잖아."
"그런 거 진짜 아니에요!"
"그래. 아니겠지. 너는 아무 뜻 없었고, 나만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설레발 친 거지 뭐. 괜찮아, 나는 좋으니까 계속 해 줘. 너 하고 싶은 대로 가지고 놀아도 돼."
"진짜, 그런 거 하지 마세요."
"손 잡아도 되고, 끌어 안아도 되고, 뽀뽀해도 되고, 키스해도 되고, 다 해도 돼.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웃기지만 여자를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내가 좋아서 이러고 있네. 좀 헤퍼 보이나."
"오빠도 알잖아요. 저는 누구랑 그럴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근데 나 괜히 많이 버는 거 아니다. 원래 맘에 안 들면 눈길도 한 번 안 줘서 비싼 거야. 그러니까 오해하면 안 된다. 진심으로, 네가 날 좋아했으면 좋겠어."
"......."
"다른 애들처럼 말고, 연애 감정으로."
"......."
"넌, 어때."
가로등 불빛이 얼굴에 다 비쳐들어왔다.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조금씩 다가온 재현의 발이 여주의 발 사이사이에 놓였다. 알아챌 수도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굳어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질끈 눈을 감은 여주가 숨을 들이쉬는 순간, 재현의 입술이 귀 아래의 동맥이 뛰는 자리를 스쳤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목덜미와 귀 사이, 그 어딘가에 머물러 있던 재현의 입술이 짙은 미소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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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독자님덜 ;ㅅ;
폭풍같은 현생을 해결하고 제가 도라와씀니다!
제목이 달라져서 헷갈리셨겠지만 이것은 고인 물 2부가 맞구요옹^~^
이제부터 나올 얘기들도 즐거이 읽어 주십사,, 합니다~^^*
아 참 가끔 독방에 고인 물 보일 때마다 짜릿... 눈물 줄줄... 다들 감사합니다...
+ 2부 시작과 함께 암호닉 다시 받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