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몽[白日夢]
* * *
그 날 밤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종인일 것이라고 직감했고, 급하게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 옆으로 갖다댔다.
"……."
"어, 종인아."
말이 없었다. 어색함에 이름을 불렀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너 여기로 오라고 할 수도 없고."
"……."
"씨발, 좆같다고."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종인이었다. 살짝 술에 취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미국, 안 가면 어머니가 용돈 없대서."
"……."
"그건 너도 싫잖아. 그치?"
대답을 강요하는 말투였다, 그것은. 아닌 것처럼 슬쩍 내던지는 듯한 말투가 어색했다.
"…당연하지."
"……더러운 년."
그 욕을 끝으로 전화가 끊겨버렸다. 나는 이젠 아무렇지도 않았다. 거짓을 말하기도 싫었다. 종인이 하는 말은모두 다 사실이었으니까. 나는 오로지 돈을 위해 김종인과 만나고 굴복한다.이것은 하나의 거래였다. 나는 너에게 몸을 내어주고 돈을 받고. 너는 나를 탐하고 대신 돈을 주는 거잖아….
김종인은 자기밖에 모르는 새끼다. 그런데 더 우스운 것은 나도 나밖에 모르는 새끼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3년간 엮이게 하는 하나의 고리와 같았다.
어두운 거실 속 켜 놓았던 TV에서 여자 연예인 A모양의 성접대 관련 인터뷰가 흘러나왔다.
- 모든 사실이 밝혀져 그들이 죗값을 치뤘으면 좋겠어요…
속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TV를 껐다.
* * *
지각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엄마는 벌써 나가셨는지 없었고 식탁 위에는 식은 토스트가 올려져 있었다. 여유롭게 행동했다. 씻고 나와 옷을 입고 볼에 연고를 발랐다. 어제 자다가 베개에 쓸려 딱지가 떨어졌는지 살짝 덧나있었다.
집을 나와 학교로 향했다. 그냥 자퇴할까…. 생각을 하다가도 분명 화를 내며 자신을 때리려 들 종인을 생각하면 그러지도 못했다. 내가 학교에 나와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저 김종인의 눈 앞에 있어야 했다.
저 멀리 교문 앞에는 학주가 버티고 서 있었다.
고민했다. 지금 들어가나 조금 있다가 들어가나 혼나는 건 똑같을텐데. 혼나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이 들자 조용히 뒤를 돌아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구질구질하다. 차라리 학교에 김종인이라도 있으면 학교에 있을 이유라도 생기지. 그냥 집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뒤 발을 내딛었다.
"야."
"……."
눈 앞에 얼굴이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백현이 나를 멈춰세웠다. 지각이라고 뛰어온 모양이었다. 대꾸하고 싶지 않아 지나쳐 걸었다.
"야, 너 어디가!"
내 어깨를 잡은 백현이 나를 돌려세우며 말했다. 아침부터 기분이 상했다. 어제 말 몇 마디 나눴다고 이렇게 친한 척을 해오는 백현이 싫었다. 난 이제 이 아이한테서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었다.
"집."
용건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어깨를 잡은 백현의 손을 쳐냈다. 그러자 백현이 뒤돌아가는 나를 향해 소리쳤다.
"잘가라고…!"
* * *
왜 자꾸 변백현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집에 도착해 입었던 교복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짜증나…. 자기나 잘 할 것이지 쓸데없이 남 일에 참견하는 새끼들이 제일 싫었다. 변백현도 그런 류 중에 하나였다. 어제 괜히 같이 급식을 먹어가지고선 친구처럼 굴며 아는체 하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밥을 먹건, 집에 가건 자기랑 뭔 상관이야. 종인은 항상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오히려 그게 마음 편했다. 오히려, 그게.
'소리 더 내. 돈을 받아 쳐 먹었으면, 소리라도 더, 내야할 거 아냐.'
귓가에 종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이불을 얼굴까지 올려덮었다. 죽고싶다. 자살을 꿈꿨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내가 죽는 상상을 하곤 했다. 내가 내 목을 매달기도 했고, 손목을 긋기도 하였으며 지나가던 차에 치여 죽기도 했다.
'넌 쓰레기보다 더 더러워. 그거 알아? 내가 그런데도 너랑 섹스하는데 목 메는지.'
'너가 어디까지 더러워지나 구경하는 거…. 그거 무지 재밌거든.'
하지만 그 중 가장 환상적인 시나리오는 그의 손에 직접 죽임을 당하는 것일 거라고 자부했다.
* * *
어김없이 아침은 찾아왔다. 어제보다 일찍 일어났다. 저녁에 걸려 온 담임의 전화에 아팠다고 대충 핑계를 둘러대자 담임은 내일은 꼭 나와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했다.
나하나 오지 않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면서 우리 담임은 지나치게 자기 일에 열정적이고 참견을 좋아 했다.
씻고 나와 식탁 위에 올려진 식은 토스트를 꾸역꾸역 입에 집어 넣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은 든든히 먹어야 한다는 엄마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모순이다. 든든히 먹어야 한다면서 이런 빵조가리를 던져놓고 나가는 것은 염치없는 모순이었다.
학교에 일찍 도착해서인지 교실에 앉아있는 아이들은 몇 없었다. 그마저도 체육복을 베개삼아 잠을 청하고 있는 아이와 새로 산 핸드폰을 자랑하는 아이 주위에 몰린 아이들 몇 뿐. 자리에 앉아 오늘 시간표를 확인했다. 사실 수업을 제대로 들어본 적은 손에 꼽을 수 있을만큼 공부를 싫어했지만,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언제나 준비는 철저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아이들이 하나 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교실은 금새 시끌벅적 해졌다. 뭐가 저렇게 신나는 걸까, 저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 틈을 가르고 뒷문으로 백현이 나타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었다. 나는 눈을 피했다. 기분이 나쁘다, 저런 웃음.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
가방도 놓지 않은 채 내 앞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오늘은 왔네. 안녕."
"……."
"야, 치사하다. 진짜 이렇게 쌩 깔꺼야?"
내 얼굴 앞으로 손을 흔들었다. '야아, 정신 차려. 멍 때리냐…?'
날 없는 사람 취급 했으면 좋겠다. 그 날로 돌아가 급식을 같이 먹으러 가지 않았더라면, 후회했다.
"친한 척 하지마."
"……뭐?"
"더러우니까."
내가. 물론 마지막 말은 생략한 채말이다.
로션 |
안녕하세요....로션입니다! 글 읽고 댓글하고 암호닉 남겨주신 분들 모두 감사해요...S2.. 아직까지 종인이는 목소리하고 상상으로밖에 등장하지 못했네요.. 과연 다음 편엔 멀쩡히 등장할까요?.. 언제나 감사합니다! 사릉사릉!^~^ - 암호닉 - 우유 백똥 낭랑찬혤 횬이 님 감사드립니다! 하트하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