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Complex
01
1
어렸을 때 부터 나는 유독 주목받는 걸 싫어했다. 반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도 버거웠고, 자랑할만한 일이 있어도 먼저 나서는 법이 없었다. 뭐, 예를 들어서 어제 친 수학 시험에서 90점 이상 받은 학생들만 손 들어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해당이 되는데도 가마니처럼 가만히 앉아있다던가, 등등. 그렇게 사는게 편했다. 누가 나한테 관심을 가지는게 꺼려졌고 부담스러웠다. 중학교에서 사건이 한 번 크게 터졌던 걸 제외하고는 내 인생은 조용히 흘러가고, 앞으로도 그럴 줄 알았다. 헌데 뜬금없이 고등학생이 되어서야이 잔잔한 파도같던 일상에 쓰나미가 휘몰아칠 줄은 몰랐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사귀자."
얘가,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거야?
진짜 나한테 하는 소리가 맞나 싶어 주위를 여러번 훑어보아도 나를 제외한 다른 여자애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르며 우리를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우, 우리라는 말을 써도 되는건가?
"...왜?"
그래도 학창시절 나름 남고생에게 처음 받아보는 고백이라는 건데, 돌아간 내 대답은 허무했다.
말을 뱉은 나도 어이가 없는데, 전정국은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건지 대놓고 헛웃음을 치더라.
왜긴, 좋으니까.
불도저같이 거침없는 한마디 한마디에 이미 내 얼굴은 불타는 고구마 꼴이 되어있을게 뻔했다.
어떡해... 이럴 땐 어떡해야해.
흰색 무지티에 체육복 차림으로 여고 수돗가 앞에서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폭탄발언을 한 전정국은,
나와는 상반되게 너무나 평온해보였다.
까만 눈동자에서부터 느껴지는 자신감에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난 그럴 수 없다고.
2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솔직히 놀랐다. 생각보다 예쁜 여자애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여고라서 다들 편하게 하고 다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완벽한 오산이었다. 우리 학교 바로 맞은편에는 남고가 붙어있었다. 우리 여고랑 그 남고 가운데에 매점이 있었고 매점에서 각자 학교로 연결되는 통로가 따로 있었다. 덕분에 점심시간마다 매점에는 커플충들이 득실거렸다. 짝이 없어도 그저 남자의 체취를 느끼러 가는 애들도 많았다. 난 전혀 그런 쪽으로 무관심했지만 말이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건지는 알아?"
알아, 나도 안다고...
남고에서도 잘생기기로 유명해서 게이를 만들어낸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인기 존나게 많은 전정국을,
우리학교는 물론이고 옆동네 학교 애들도 여기까지 찾아오게 만드는 전정국을,
방금 내가 찼단 말이지. 생긴 것 부터가 별 볼 일 없는 김여주가.
"넌 이쯤되면 멍청한거야, 생각이 없는거야?"
"난 걔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데 뭘 보고 만나라는거야."
"바보야. 누군 뭐 걔가 돌잡이 때 뭐 잡았는지부터 지금 몸무게가 몇 키로인지 다 알아서 사귀자고 매달리냐?
다 익숙해지면서 알아가는거지."
교실에 올라와서도 여전히 내 주위는 시끄러웠다.
도대체 왜 그랬냐며 다그치는 내 친구들과, 날 보고 귓속말을 하며 지나가는 여러 무리들.
하... 이래서 싫었던거야.
한 순간에 조용하던 내 삶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아까 장소희 표정 봤냐?"
"어, 존나 무섭던데."
장소희라면... 옆반 반장인데.
쌤통이라며 자기들끼리 깔깔대길래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 넌 모르지? 하도 그런거에 관심이 없다보니.
어리둥절한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조용히 속삭인다.
"장소희 걔 작년부터 전정국 엄청 쫓아다녔거든.
근데 네가 오늘 크게 한 방 먹였잖아-"
그,그런 비하인드가 있었어?
순간 짙은 아이라인이 칠해진 사나운 눈이 나를 째려보고 있는 모습이 상상됐다.
시발, 앞으로의 학교 생활은 시궁창이겠구만.
3
"헐..."
할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우리 학교 교문 옆 담벼락에 기대어 서있는 전정국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같이 나오던 친구들은 내 등짝을 수십번 갈기며 좋겠다면서 빠져주겠다는 핑계로 자기들끼리 하하호호 거리며 떠나간지 오래다.
내가 아까 한 말 뭘로 들은거야? 분명 싫다고 했을텐데.
"생각해봤는데,"
"..."
"이유는 들어야겠어서. 내가 왜 싫은지."
아니, 네가 싫다기보다는...
사실 이유야, 뭐. 간단하다.
첫째, 나랑 너랑은 너무 안 어울리고
둘째, 난 조용히 살고싶은데 너랑 엮이는 순간 인생이 피곤해 질 것 같으니.
근데 이 얘기를 해줘봤자 얜 이해 못 할 게 뻔하지.
"아, 여기서 얘기하긴 좀 그런가?"
"...조금?"
"그럼 집에 가면서 듣지, 뭐."
뭐?
마침 우리 앞에 도착한 23번 버스에 올라타는 전정국을 멍하게 쳐다봤다.
안 타냐며 턱으로 버스 안을 가리키는 전정국.
이 새끼 이거, 내가 이 버스 타고 집에 가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알고보면 스토커 뭐 이런 거 아니야?!
왜, 은근히 잘생긴 애들중에 정신이 이상한 애들이 많다고들 하잖아.
얘가 지금 딱 그 관데.
일단 집은 가야하니 전정국이 서있는 버스 입구 쪽으로 쭈뼛쭈뼛 걸어갔다.
나를 먼저 태우는 놈의 세심한 배려.
그런다고 누가 넘어올 줄 알고?
"잔액이 부족합니다-"
아, 시발
오늘은 그냥 재수가 더럽게도 없는 날인가보다.
버스에 탄 사람들 전부 나를 한 번씩 돌아보는데, 그 때의 창피함이란 정말...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지갑은 들고 왔는지 확인해봐야겠다 싶어 가방을 막 뒤지려고 할 때,
등 바로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며 카드찍히는 소리가 났다.
"학생 두 명이요."
젠장.
최선을 다해 피해야 할 상대한테 빚까지 지게 되다니.
고마워... 갚을게.
모기같은 목소리로 중얼중얼거리니 '그러던지,' 하는 무심한 말투가 들려왔다.
빈자리가 꽤 있는 버스안을 스캔하다가 재빨리 혼자 앉을 수 있는 1인용 좌석에 착석했다.
켈켈켈, 네가 내 옆에 앉도록 내가 허락해줄 것 같냐?
하지만 뒷쪽에 자리가 많이 남았으니 그리로 가 앉겠지, 하던 내 예상과는 달리 전정국은 내 옆에 멀뚱히 서있기만 했다.
그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아니 얜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거야...
버스가 출발하자 전정국은 내 앞좌석 의자의 손잡이 부분과 내 뒤쪽 기둥을 동시에 잡았고, 얼떨결에 나는 전정국에 의해 갇힌듯한 모양이 됐다.
부담스러워 죽겠네 진짜.
버스가 덜컹거리거나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 마다 내 옆머리에 닿는 전정국의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에서 열이 내려갈 줄 몰랐다.
"다 왔다. 내리자."
어, 그래... 잠시만.
이 새끼 진짜 스토커 아니야?
내가 어느 정류장에서 내리는지까지 알고 있잖아?!
...일단 집에는 가야하니까. 전정국을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시원한 밤공기에 후끈 달아올랐던 두 볼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 했다.
"그... 너는 집이 어디야?"
도대체 어디 살길래 나를 이렇게 졸졸 따라오냐고.
내 물음에 드디어 자기에 대해 궁금한 게 생긴거냐며 얼굴에 화색이 돈다.
...또라이가 분명해. 정상은 아니야.
"이제 말해줘."
가로등이 밝히고 있는 좁은 골목길에 다다랐을 때 전정국은 걸음을 멈췄다.
뭐, 뭘...?
애써 모르는 척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보지만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전정국과 결국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저기, 나는...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연애같은거...해본 적도 없고..."
하, 김여주 진짜 왜 이렇게 찌질하냐.
살면서 저런 킹카를 차보는 날이 또 언제 온다고 이런 순간마저 이 찌질미를 숨길 수 없는건지...
응, 그리고?
좋은 얘기 하는것도 아닌데 녀석은 금방이라도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게 다라며 말을 얼버무리자 전정국이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운다.
"연애 한 번도 안 해봤다는 건 핑곗거리도 안 되니까 패스."
"..."
"나에 대해 모르는 건 당연하지. 나도 너 잘 몰라."
웃기고 있네. 스토커 주제에.
내가 몇 번 버스 타는지부터 집이 이 근처라는 것 까지 알고 있으면서?
"너야말로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이러는 게 뭐 어떤건데?"
어째 점점 대사가 싸우는 그림으로 오해할 만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
오해 말아라.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녀석의 목소리는 눈빛만큼 다정했다.
"...내가 왜 좋냐고."
차마 스스로 하기 민망한 질문이다.
괜히 장난 한 번 쳐보는건가 싶어 슬쩍 떠보려고 했던 질문인데, 놈은 꽤 진지하게 생각하더라.
그래- 이유가 없겠지. 그냥 만만해보여서 한 번 찔러본
"예뻐서."
"뭐?!"
헉, 목소리가 너무 컸다.
자동반사하듯 소리치는 내 모습에 전정국이 바람빠지게 한 번 웃었다.
그러더니 예쁘다는 말이 그렇게 놀랄 말이냐고 묻는데,
충분히 놀랄 만하지... 가족을 제외하고 남자한테 처음 들어본 말이니까.
아빠한테도 초등학생 때 이후로 들어보지 못한 말을, 이제 겨우 말 좀 튼 남자 동급생한테 듣다니.
난 너처럼 잘생겼다는 말을 밥 먹듯이 들어서 이젠 감흥조차 없는, 뭐 그런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나 그런 입에 발린 소리 듣는거 안 좋아해."
"진짠데? 나야말로 맘에도 없는 말 하는거 질색해."
한 평생 살아가면서 남자한테 예쁘다는 소리 듣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일찍, 남들은 말 한마디 못 섞어봐서 안달인 인기남한테.
불빛이 약해 깜빡거리는 가로등 불에 맞춰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날 처음 알았다.
내가 예쁘다는 말 한마디에 생전 모르던 남자한테도 설레어버리는 그런, 단순한 여자였다는 걸.
4
"그 자식 이상해. 만나지 마."
집에 와서 씻지도 않고 옷 갈아입을 새도 없이 바로 전화를 걸었다. 자다 깬 건지 깊게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얜 지금이 몇 신데 벌써부터 처자고 있는거야? 고3 맞아?
민윤기한테 빠짐없이 얘기했다.
오늘 점심시간에 전정국이라는 너네 학교 남자애가 나한테 고백을 했고, 내가 그걸 걷어찼고, 방금까지 같이 있었다는 모든 이야기.
말하다보니 내 하루 일과를 읊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답도 없이 묵묵히 내 얘기를 듣고만 있던 민윤기는 내가 '이제 어떡하지?'하고 직접적으로 물어보고 나서야 답을 제시했다.
만나지 말라고.
"그치? 네가 봐도 좀 이상한 애 같지?
글쎄, 내가 타는 버스 번호부터 내 주소까지"
"아니. 난 그 얘기 하는거 아닌데."
딴 건 모르겠고 너한테 예쁘다고 하는거 보니까 정상은 아닌듯. 위험해보여. 만나지 마.
장난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진지한 민윤기의 말투에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 자식은 걱정을 해주는거야, 내 욕을 하고 싶은거야?
남자가 여자 꼬시는데 무슨 말을 못 하겠냐며 겨우 그 '예쁘다' 한마디에 넘어갈 생각말라는 민윤기의 따끔한 충고가 날라왔다.
민윤기 얘는 이게 싫다. 항상 너무 맞는 말만 해서 할 말이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 그것도 엄청 사람 열받게 하면서.
"아 좀 진지하게 생각해봐. 네 일 아니라고 대충 넘어가지 말고."
"야, 지금이 내 인생 19년 살면서 제일 진지한 순간이야.
너니까 웃음기 싹 빼고 말해주는 거라고."
아오, 저 허세가득한 말투.
별 도움도 안 되는 통화를 하면서 30분동안이나 핸드폰을 들고 있었더니 손이 저려오는게 느껴졌다.
자던 잠이나 마저 자라며 전화를 끊으려는데, '야야야, 잠깐만' 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 3년전 그 일 잊지마."
"..."
"신중하게 생각해, 신중하게."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다신 꺼내고 싶지도, 아니 생각조차 하기 싫은 기억이다.
그걸 제일 잘 아는 민윤기가, 그래서 내 앞에선 중학교 때 얘기는 일절 하지도 않던 놈이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진짜 내가 걱정되기는 한가보다.
그걸 내가 어떻게 잊냐, 이 놈아. 내 인생 최악의 시나리오였어, 그 땐.
홀로 서있는 거실에 정적이 흐르는 것도 잠깐, 곧 귀여운 카톡 알람음이 울렸다.
얘 진짜 뭐 있네.
번호를 알려준 기억조차 없는데 날라오는 잘 들어갔냐는 카톡 메세지에 이젠 황당해질 지경이다.
그래,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 번 해보자.
읽지도 않은 메세지를 뒤로하고 핸드폰을 내팽겨쳤다.
여전히 갈아입지 않은 교복차림으로 침대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수돗가에서의 일이 계속 떠올랐다.
'전정국이 김여주를? 왜?'
'그니까- 살다보니 별 걸 다 보네.'
'생긴 건 멀쩡해가지고 쟤 취향 존나 특이한가봐ㅋㅋㅋ'
내가 들을 줄 모르고 그랬다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아마 전정국도 다 들었을거다. 다 알고 있을거야, 걔도. 여자애들이 그렇게 놀랬던 이유가 결코 긍정적이지는 않았다는 점.
알면서도 이렇게 밀어붙이는 놈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원망스러웠다.
나를 힐끗거리며 귓속말을 하던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쁜 놈. 이기적인 놈.
넌 그렇게 네 할 말 다 하고 가버리면 끝이겠지만, 난 아니라고.
벌써 얄밉기부터 한 전정국의 얼굴이 천장에 두둥실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거기에 그대로 이불킥을 했다.
------------------
예, 그냥...
전정국이 너무 좋아서 써버린 글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