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각몽
W. 달 월
-간만입니다 너무 늦었어요ㅠㅠ 평소 자각몽 양보다는 쫌 적은 편입니다 브금 두개 정도!!ㅎㅎ
-오늘도 한번 가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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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브금입니다. 꼭 들어주시시기!!
02.
"애들아, 나 여자 소개받았다. "
태형이와 내게 다짜고짜 핸드폰을 내밀며 사진 보여줄까? 하는 석진이 형의 말에 됐다 하고는 읽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큰둥한 내 반응에 입이 대빨 나온 형을 가만히 두면 단단히 삐질 것 같아서 간단히 잘해봐요, 하고 말해 주니 그새 풀려서는 잘 되면 그 친구를 나에게 소개해준다며 조잘거리는 형에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소개는 무슨. 한참을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형이 내가 보고 있는 책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온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읽어? "
"그냥 소설책인데, 제목부터가 안 읽어 볼 수가 없더라고요. "
"제목이 뭔데? "
"Lucid dream. "
제목을 들은 형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어쉬고는 내 어깨를 두어 번 정도 토닥여준다. 그리곤 예의 상으로 어제는 태형이랑 성공했냐며 묻는 질문에 아직 잘 모른다고 오늘 확인해 볼 거라고 답했다. 옆에 앉아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던 태형이에게 어제 꿈 아직 기억나냐고 슬쩍 물어보니 이젠 신기할 정도로 전혀 기억이 안 난다며 머리를 긁적인다. 그래도 햄버거는 사줄거지? 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표정에 한숨이 절로 났다. 알겠다 하니 베시시 웃는 태형이다. 자꾸만 불안해진다. 어제 그 디스맨을 만난 탓에 그녀를 만나지 못할까 불안한건가? 하지만 지금은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마저 책을 읽으려 시선을 책에 고정했지만 단 한 글자도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득해서 머리가 복잡했다. 자꾸만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그렇게 한 페이지도 채 읽지 못하고 책을 덮고는 책상에 엎드렸다. 고개로 팔을 괴고는 보고 싶다라고, 답답할 만치 가슴속을 가득 채웠던 말을 조그맣게 입 밖으로 내뱉어봤다. 이러니까 더 보고 싶어지네. 주책이다.
그렇게 하루 종일 해가 저물기를 기다렸고, 어느새 캄캄한 어둠이 뒤덮였다. 창밖을 내다보니 안개가 자욱이 껴서 달조차도 흐릿하게 보인다. 정말 이상스러운 하루다. 내 기분도 그렇고. 오늘은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어떤 끝으로 나를 먹먹하게 하려고 날씨조차 이런 걸까. 어떤 상황에서도 너무 좌절하지는 말자는 마음가짐으로 이불을 목까지 끌어 덮고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누가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떤 학교 정문 앞이었다. 내 모습을 내려다보니 나 또한 이 학교 학생인가 보다. 학교 안으로 우르르 들어가는 학생들과 같은 교복에 가방까지 매고 있었으니.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찾아야 하나, 하며 천천히 학교 안으로 발을 내디덨다. 종일 학교에 있었는데, 꿈에서 마저 학교에 있는 건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녀를 볼 수 있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 교문을 거쳐, 계단을 올라 1-7반에 들어가 앉았다. 만일 누군가 내게 그 많은 반들에서 굳이 왜 7반이냐고 묻는다면, 행운의 숫자 7이어서 라고 답할거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속설 하나하나에 희망을 걸어야 할 정도로 나는 간절했다. 이곳에 그녀가 있기를 바라면서 교실로 들어섰다. 하지만 교실 가장 뒤에 위치한 창가 옆 책상 앞까지 올 때까지 그녀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허탈한 한숨을 내뱉으며 책상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수돗가 앞에 보이는 조그마하고 동그란 뒤통수를 발견하고는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에 미소가 천천히 번졌다. 찾았다. 다행이다. 줄곧 불안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황급히 교실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곤 그녀가 있는 수돗가로 달려갔다. 숨을 천천히 고르며 운동장 끝에 보이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그녀에게 다가갈수록 그녀의 뒤로 보이는 풍경들이 흐릿해져갔고, 그녀와 내 사이의 거리가 채 열 발자국 정도도 안되었을 때는 그녀의 바로 뒤에 있는 수돗가도 천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꿈을 꾼지 얼마나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꿈에서 깰 때가 됐다고? 급한 마음에 목소리를 냈다.
"저기요! "
생각보다 커다랗게 나온 내 목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가 놀란 눈을 하고 뒤돌아 나와 눈을 맞추는 순간, 내 시야는 새하얗게 번졌고, 눈을 뜰 수 없는 정도의 밝기의 빛이 나를 뒤덮었다. 그 빛에 눈을 질끈 감았다.
천천히 눈을 뜨니 고요한 내 방이었다. 벽면의 시계를 올려다보니 고작 30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에 뭔가 잘못되었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창밖에서는 요란하게 비가 내리며 창문을 적시고 있었고, 추적거리며 내리는 빗소리에 맞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설마 이제 매번 이렇게 만나지도 못하는 걸까,라는 애써 감춰놓았던 불안감이 눈덩이처럼 커다랗게 변해 내 가슴속을 꽉 메웠다. 그 커다란 눈덩이 때문인지 가슴 전체가 시렸다. 아닐 거야, 오늘만 그런 걸거야,라고 나를 다독여봤지만, 내 불안감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내 예감은 틀림이 없었고, 두 달 이라는 긴 시간동안 그녀를 제대로 만날 수가 없었다. 두 달 동안의 정보들로 한가지 알 수 있던 것은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면 난 늘 잠에서 깨어난다는 점. 그래서 확인은커녕, 그 어떤 말도 그녀와 나눌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내게 다가온다면? 더는 지금까지 행해온 방법으로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야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공간에서 눈을 떴다. 그래봤자 그녀의 꿈속 하나의 공간에 불과하겠지만.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번화가가 아닌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방이었다. 꿈 속이니까, 차근차근히 내가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고 싶다 생각을 하며 잠들었더니 이곳에 오게 되었나 보다. 어떤 걸 만들고 싶었더라. 막연하게 내가 만들어보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확실하게 정해놓진 않아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최근에 본 것들을 토대로 만드는 게 낫겠지, 싶어 기억을 되짚어보니 엊그제에 버스가 신호에 걸려 서있을 때 창밖으로 보았던 장미공원이 떠올랐다. 자세히는 못 봤었지만 휘양찬란하게 새빨갛게 피어난 장미들이 가득하니 꾸며져있던 풍경이 인상 깊었다. 그곳을 보면서도 그녀와 저런 곳에 함께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장미공원, 그게 좋겠다, 하고 생각을 한 순간 주위가 온통 화려한 빨간 장미들로 장식되었다. 내 생각보다 자세히 살펴봤었나 보다. 중앙에 분수대를 축으로 산책로를 빼고 빼곡하니 들어선 모습이 내가 봤던 그 공원과 아주 흡사했다. 공간은 어느 정도 꾸며 놓았는데 가장 중요한 게 빠졌다. 함께 할 그녀가 없었다.
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 시도는 해보려 한다. 내 몸은 분수대 뒤에 숨긴 채로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녀가 이 공원으로 걸어들어오게 해주세요, 하고.
내 되뇌임이 무색하게 그 어떤 변화도, 인기척도 없는 이 공간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내가 한심했다. 그래, 이게 될 리가 없지, 하고 한숨을 내뱉으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으려는데 저 멀리에 이쪽으로 걸어오는 흐릿한 실루엣이 보인다. 설마, 하고 다시금 분수대 뒤로 몸을 숨기고 그 옆으로 고개만 살짝 빼서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그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내가 찾던 그녀가 맞았다.
이게 될 줄이야.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적잖이 당황했다. 곳곳에 피어난 장미들을 둘러보며 살포시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 햇살을 머금고 빛이 나는 빨간 장미들 사이에서 피어난 백색의 장미 같다고나 할까. 독보적이었다. 장미들 따위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그녀는 해사했다. 그런 그녀를 쫓는 내 얼굴 만연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다가가고 싶었지만 괜히 그랬다가 또다시 사라져 버릴까 봐서 오늘은 그저 먼 발치에서 지켜보고 있기로 했다. 이렇게 잠시 동안이라도 볼 수 있단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지난 두 달간은 채 오분도 못 봤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느낀 건 꿈 속에서도 규칙이 있고, 그걸 어기면 안 된다는 점. 아마 태형이와 내가 그때 무언가를 잘못했단 건 확실히 알았다.
"아, "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데 단발마의 작은 신음이 들려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디 갔지. 시간이 꽤 지나긴 했지만 이렇게 한순간에 사라진 건 처음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장미들도 흐릿해져갔고 잠에서 깰 때가 되었다는 느낌과 함께 천천히 눈이 감겼다.
눈을 뜨니 해가 뜨기 직전인 푸른빛을 내는 하늘이 창밖으로 보였다. 이번엔 생각보다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내가 직접 꿈을 만들어내서 그런 건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었다. 잠을 잔 건데 통 잠을 잔 것 같지가 않네. 뻐근하고 멍한 머리에 기지개를 쭉 폈지만 피곤함은 여전했다. 하지만 피곤한 게 뭐 대수겠는가. 간만에 오랫동안 본 것만으로도 감사하는데. 이런 방법이 통할 줄 알았다면 진작에 이렇게 할 걸 그랬다. 여전히 두근거리는 느낌에 숨을 한 번 크게 내어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계속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두번째 브금입니다. 마지막 까지 꼭 들어주시시기!!
03.
'꿈속 세계는 황홀했다. 현실인 듯했지만, 현실에서는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는 아름다운 광경들이 시선을 두는 모든 곳에 펼쳐져 있었다. 깨어나기 싫을 만큼. 그냥 이곳에 갇혀도 좋다는 생각이 들 만큼 찬란했다. '
얼마 남지 않은 책의 페이지를 슥슥 빠르게 넘기며 읽었다. 이 책은 지금껏 읽어왔던 꿈, 자각몽 관련 책들 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이 될 거 같았다. 마치 내가 작가가 되어 한자 한자 적어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황홀하고 찬란해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는 부분이 특히 그랬다. 그녀와 함께라면 꿈속에 갇혀도 좋을 것 같았으니까. 오늘 잠들기 전에는 다 읽을 거 같은데. 시계를 올려다보니 아홉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적당한 시간에 오늘 밤 꿈속에서의 그녀를 보기 전에 다 읽고 자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마음먹으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양이었다. 빠르게 읽으면서도 단어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페이지를 훑었다.
'하지만 내게만 이 광경이 특별하고 새로운 건지 이곳의 사람들은 시큰둥하게 반응하고 제 갈 길을 갔다. 마치 내가 현실에서 길을 걷는데 지는 노을을 보고 멈춰 서서 감상을 하지 않는 것과 같아 보였다. 아마 이 사람들에겐 이 꿈속이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게 확실해 보인다. 이곳에서 '꿈'이라는 단어를 말하면 이렇게 갈길을 가던 이들 모두 멈춰 서 나를 노려봤던 기억이 있으니. 그들은 부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곳이 누군가에겐 꿈이란 사실을. 우리 또한 그렇지 않을까? 우리가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이 누군가의 꿈이라면, 또는 커다란 세계의 먼지 같은 한 부분일 뿐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
고개를 끄덕이며 한 줄 한 줄 읽어내려갔다. 나는 줄곧 꿈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 밖으로 이게 꿈이구나, 하고 내뱉은 적은 없었지만 맞는 말이었다. 나는 차라리 요즘, 현실이 꿈이고, 꿈속 세상이 현실이었으면 하는 오만한 생각에 잠긴다. 그녀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매개가 꿈이었으니까. 현실에서도 그녀가 있었으면, 하고 되뇌면 뿅, 하고 그녀가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런 생각마저도 내겐 과분했다. 현실에서 분명히 기회가 있었음에도 놓친 내가 바보였다. 누굴 탓하겠어. 착잡해진 마음에 숨을 작게 내어쉬고는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 이게 단지 누군가의 꿈속에서 만들어 내는 하나의 장면일 뿐이더라도 이 사람들에겐 소중한 하루일 뿐이었다. 내가 악착같이 살아가는 현실처럼. 오늘 내가 이 꿈속에서 만들어낸 이 거리를 더 밝게 빛나게 해줄 저 조명들과 몽환적인 느낌을 더해줄 반짝이는 눈이 내리는 거리를 둘러보니 만족스러운 웃음이 샌다. 내가 만든 이 반짝이는 거리가, 지금 꿈을 꾸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기억, 행복한 꿈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금세 잊혀지겠만 잠시나마 정말 황홀한 꿈이었다고 기지개를 펴며 생각할 수 있는.... 자, 이제는 내가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는 책을 천천히 덮었다. 이 책은 내 예상대로 지금껏 읽어왔던 책들 중 단연 최고라 말 할 수 있다. 내용이 내가 쓴 것처럼 와닿는 것 외에도 작가의 자각몽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지금껏 봐오지 못했던 정의라던가 접근 방법이 새로웠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설득력도 있고. 간단히 설명해 보자면, 자각몽을 꾸는 건 내 맘대로 내 꿈을 조정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꿈속에서 그 꿈을 만들어 꾸게 만드는 거라는 말이었다. 한 줄로 말하려니 좀 어려운데, 예를 들어 내가 꿈속에서 괴물을 만들어냈다고 치자. 그리고 그 괴물이 뛰어다니게 설정을 했다 하면 이 꿈의 주인인, 즉,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괴물에 쫓기는 꿈을 꾸게 되는 거다. 결국은 내가 누군가에 꿈속에 들어와 꿈을 만들어주고 있다 하면 이해가 좀 가려나. 이런 정의라면 지금껏 내게 일어난 일들이 말이 된다. 내 소유가 아닌 누군가의 꿈 속이기 때문에 어떠한 규칙이 있을 것이고, 그 선을 넘는 자를 규제하는 게 '디스맨' 이라는 존재이고. 앞뒤가 착착 맞아떨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 정의를 믿어보기로 했다. 내가 지금껏 겪어온 상황이 그녀의 꿈 속이고, 내가 조금씩 만들어낸 상황이,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정말 내가 첫눈에 반한 그녀의 꿈 속이라면, 그녀는 분명히 짧게라도 기억을 할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지 버틸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이게 다 내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면, 나 너무 불쌍하잖아.
복잡한 생각들은 마음 속 저편으로 밀어버리고 침대에 풀썩 누웠다. 오늘은 그녀에게 한번 다가가 보려 결심했다. 어제처럼 갑자기 사라지기 전에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졌다.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덮고는 눈을 감았다. 빨려 들어가듯 깊은 잠 속으로 잠겨들었다.
가라앉는 느낌이 사라지고 또렷해지는 정신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어제의 연장선인가. 어제 내가 만들어 낸 새빨간 장미공원의 모습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도 있단 건가? 오늘도 저 멀리에서부터 걸어오려나. 여전히 나는 분수대 뒤에 몸을 숨긴 상태였다. 오늘은 없을까봐 겁이 나는 탓에 감히 고개를 빼서 주변을 살필 엄두도 못 내고 귀만 쫑긋 세우고 있었다. 곧 조용하기만 한 이 공원을 울리는 작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내 심장소리도 점점 커졌다. 오늘도 볼 수 있는 걸까, 하는 기대감이 솟아오른다.
"아, "
어제와 같은 상황이다. 어젠 이 소리가 들리고 그녀가 사라졌으니. 급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피니 다행히도 제 손가락을 붙잡고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도 장미 줄기를 쓸다가 손을 베었나 보다. 살짝 찡그리고 있는 얼굴에 걱정이 되어 아무 생각도 못하고 급하게 그녀에게 다가가 그 손을 낚아챘다.
"어떡해요, 나 지금 약도 없는데, 조심 좀 하지. "
하얀 손가락 끝에 맺혀있는 핏방울에 속이 상했다. 괜히 장미를 만들어가지고. 이왕이면 가시 없는 꽃으로 공원을 꾸밀걸 그랬다. 그런 꽃들도 많은데 왜 하필 장미로 해서 이렇게 피를 보게 만드나. 지금 약도 없고. 마음속으로 약이랑 밴드가 있었으면, 하고 천천히 되뇌었다. 그러고는 이 모든 게 다 내 탓 같아서 자책하고 있는데, 아무 말없이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진다. 어, 생각해보니 지금 내가 그녀의 옆에 서있는데도, 더구나 이렇게 손을 만지고 있는데도 꿈에서 깨지 않았다. 뭐지? 두 달 만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서있는 것이. 그리고 처음이었다. 저런 묘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손가락에서 시선을 떼고 그 맑은 눈과 눈을 맞췄다, 당혹감은 섞여있었지만 지금껏 봐왔던 경계심 가득 한 눈빛이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내 눈빛과 닮았다고 느꼈다. 슬프면서도 애틋한 눈. 그리고 그 속에 내가 가득 담겨있었다. 알아보는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벅찬 감정이 속에서 휘몰아쳤다. 놀란 맘에 그녀의 손에서 손을 뗀 내 손이 살짝 떨려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 어. 나 알죠, 지금 나 알아보는 거죠? "
다소 바보 같은 목소리가 떨리는 입술 사이로 빠져나왔다. 정말 알아보는 걸까? 내 착각일까? 답을 낼 수 없는 질문들이 내 속에 차곡차곡 담길 때쯤 그녀가 작게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로?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지금 꿈 속에서 또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몇 개월간의 고생이 없었던 일처럼 녹아내려가는 느낌이다.
정말로 꿈속의 꿈인가 싶어 입술을 살짝 물었다. 아니다, 괜히 그랬다가 이 꿈에서 마저 깰까 봐 입술을 축이고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물었다.
"정말이죠, 맞죠? "
몇 번이고 되묻는 멍청한 나의 말에 웃으며 매번 고개를 끄덕여주는 그녀의 모습에 정신이 아득하다. 그래, 그냥 이게 꿈속의 꿈이라도 좋았다. 뭐든 간 좋았다. 단지 오늘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좋을 것 같았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그동안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정말 오래 걸렸는데. 그녀는 알까, 이렇게나 내가 간절히 바라왔던걸. 벅찬 감정이 눈가에 눈물을 고이게 했다. 애써 꾹 참고 있는데 그토록 듣고 싶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그쪽 알아보는 거 처음이에요? 우리 꽤 만났잖아요. "
아, 세상에.
참으려고 했는데 참을 수가 없었다. 고였던 눈물이 툭툭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만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었단 걸 증명하는 그녀의 말에 그간 참아왔던 감정들이 눈물로 쏟아져내렸다. 내 눈물을 보고는 당황하며 왜 우냐는 그녀 앞에서 운 사실이 부끄럽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너무 기쁜걸. 말로 표현하기엔 부족했다. 눈물은 흐르는데 가슴속은 벅차고 기뻤다. 기쁠 때 운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왜, 왜 울어요. "
"너무 좋아서요. 만나러 오기 너무 힘들었어. 늦어서 미안해요. "
두 달 만에 제대로 만나는 거였으니. 혹여나 그녀가 나를 기다렸을까 싶어 미안한 마음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그녀도 다 기억을 하고 있는 거라면, 나만큼이나 힘들었을거다. 여전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급하게 훔치고는 아까 상처가 난 그녀의 손가락이 생각나 입을 열었다.
"손, 잠깐 손 좀 줘봐요. "
"어, 아까 없다면서, 어디서 났어요? "
"이건 내 꿈 속이기도 하니까, 이렇게 할 수 있어요. "
아마도 그녀는 지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거 같았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니 아까 마음속으로 생각한 덕에 약과 작은 밴드가 손에 잡혔다. 천천히 약을 손가락에 발라주었다. 정말 속상하다. 그러면서도 지금 내가 이 손가락에 약을 발라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 좋았다. 지금 내 표정엔 바보 같은 웃음이 가득할게 뻔했다. 그런 나에게 말을 건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밴드를 천천히 붙였다.
"나, 근데 자신 없어요. 다음에 만나도 알아볼지는 모르겠어. "
"나도 알아요. 그러니까 이렇게라도... 됐다! "
정성을 가득 담아 최대한 꼼꼼히 상처 부위를 덮어내곤 만족스런 웃음을 띠었다. 그런 내 모습이 우습다는 듯 킥킥 웃는 그 웃음소리가 나를 간지럽혔다. 나도 알고 있었다. 매우 드문 경우라는걸. 왜 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지금 나와 같은 자각몽을 꾸고 있는 듯 했다. 전에도 만난 적 있지 않냐는 말은, 지금 이곳이 꿈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말이었으니까. 내가 밴드로 감싸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조금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그녀가 보였다.
"꿈에서 깨면, 그쪽 얼굴이 생각이 안 나. "
"자각몽. "
"네? "
"자각몽이에요.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는데, 그쪽이 지금 이게 꿈이라는 걸 알고 있는 상태인 거 같아요. "
"그럼, 다음번엔 만나면, 그땐 또 못 알아볼 수도 있단 거네요. "
"괜찮아요. 내가 알아볼 거니까. "
"... "
일단, 흔치 않은 기회니까, 우리 좀 걸어요.
지금껏 그래왔으니까. 앞으로 알아보지 못한다 해서 놀라울 것도 없었다. 오늘이 기적 같은 날인 거니까.
그래서 지금 이 소중한 시간을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있고, 너무 값진 이 시간이 가고 있었다. 조금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내게 전해져온다. 행복하다. 정말로. 손을 꼬옥 잡고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니 두 볼에 발갛게 홍조가 올라와 있다. 복숭아 같다는 생각에 웃음이 터졌다. 내 웃음에 고개를 갸웃, 하고 올려다보는 표정은 또 어찌나 애교스러운지 설렘에 온몸이 저릿하다. 내가 좋은 꿈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꿈에서 깨어나면 그녀보다 내가 더 행복할 것 같았다. 그렇게 가만히 손을 맞잡고 눈을 한참을 맞추니 부끄럽다는 듯 이내 시선을 피하고는 꼼지락대는 손가락에 웃음을 꾹 참으며 더 꽉 손을 잡고는 내가 만들어 놓은 장미공원을 걸었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며 연신 너무 예쁘다며 장미를 구경하는 그녀다. 그토록 한 번 쯤은 와보고 싶었던 장미 공원이었고, 내가 애써 만들어 놓은 공간이었지만, 그 장미들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그저 지금 내 손을 잡고 내 옆에서 걷는 그녀를 눈에 담기에도 바빴고, 장미가 눈에 들어올새가 없었다. 언젠가 했던 것 같은 비슷한 말이 나도 모르게 절로 나왔다.
"훨씬, 그쪽이 훨씬 예뻐요. "
내 말에 흠칫, 놀라서는 가만히 서서 벙찐 표정을 한 얼굴을 한껏 놀려주고 싶어 어, 빨개졌다, 하니 내 말대로 금세 얼굴이 이곳에 잔뜩 깔린 장밋빛 마냥 붉게 변한다. 어떡해. 너무 귀엽다, 정말로. 웃음이 번지는 걸 막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는데, 주변의 장미들이 슬슬 흐릿해져간다. 아, 벌써 깰 때가 됐구나. 그 사실을 알리가 없는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을 보고 있다. 너무 아쉽다. 어느새 반쯤 사라진 장미들의 모습에 안되겠다 싶어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장미향들이 가득했지만 그 속에서 그녀의 향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얼떨떨하게 안겨 있는 그녀를 더 가깝게 느끼고 싶어 꽉 세게 안고 입을 열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에요. 곧 봐요. "
안고 있던 그녀가 사라져가는 게 느껴졌다. 오늘은 더더욱 마음이 이상했다. 이제 이렇게 나를 알아볼 리가 없다는 생각 때문인가. 평소보다 더 마음이 허했다. 완전히 그녀가 사라지기 전에, 언제나 내가 마지막으로 하는 그 말이 그녀에게 닿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기억해줘요. 내가 내일도, 모레도 데리러 갈게요... "
이 말을 하자마자 확 환해지는 시야에 눈을 세게 감았다 뜨니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이었다. 시간이 엄청 지났구나. 근데, 잠깐만.
정말 꿈 속에서 꿈을 꾼 걸까? 내가 자각몽을 한 건 맞나? 여긴 내방이 맞고? 도무지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질 않아 몸을 급하게 일으켰다. 내가 누워 있던 이곳은 우리 집, 내 방 침대 위가 맞았고 몸이 뻐근한 걸보니 내가 자각몽을 꾼 것도 맞았다. 꿈속에서 꿈을 꾼 거였다면 이런 피곤함은 없을테니까. 그리고... 여전히 내 손에 남아있는 듯한 이 따스함.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 그리고 나를 올려다보던 그 눈빛이 생생하게 남아 정말로 그녀가 나를 알아봤단 걸 증명하고 있었다.
알아봐 줬어.
여전히 얼떨떨하지만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사실상 지금 당장 일어나서 학교갈 준비를 해야 했지만, 오늘은 이 기분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다. 학교는 아무렴 상관없었다. 지각하지 뭐. 그렇게 한참을 이불 속에서 꼼지락대며 그녀와의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다가 긴장이 풀려 가벼운 마음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예상했던 대로 지각을 해서 선생님한테는 꽤 혼났지만, 전혀 상관없이 행복했다. 그녀가 나를 기억해줬다는 게, 그리고 정말로 그동안의 꿈이 내 허상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해주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괜한 욕심을 부린 탓에.
늘 그래왔듯, 아니, 더 가슴이 쓰린 일들이 내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어둠을 만들어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