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조심하라고. 넘어졌으면 어쩔뻔했어.
많이 기다렸냐며 빙글 웃으며 그녀가 다가오는데 아무 대답을 못했다. 흩날리는 눈들 새로 보이는 환한 웃음에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이때 처음으로 인정을 했던 것 같다. 내가 여주를 좋아하는구나. 내게 이렇게 웃어주는 걸 좋아하는구나, 하고.
"첫눈이네. 좀 갑작스럽다, 그치."
그러게.
이날도 나는 그러게, 하고 답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올줄 몰랐던 이른 첫 눈처럼 내 첫사랑이 조용히 내렸다. 소복하고 따뜻한 느낌이 좋았다. 매년 이렇게 여주와 첫눈을 맞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그때 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아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니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첫사랑이라 해도, 이렇게 오래 좋아할 줄은 나조차도 몰랐다. 그리고 정말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듯, 이렇게 엇갈려만 간다는 게 맘이 쓰렸다. 그래도 눈은 여전히 예쁘네. 핸드폰을 꺼내 이 풍경을 담았다. 지금 이 감정, 이 기억들을 사진으로 나마 기억하고 싶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핸드폰과 두 손을 코트 안에 푹 집어넣고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세번째 브금입니다 꼭 들어주시기 ㅎㅎ
띵동- 띵동-
네, 네. 간다고요. 저놈의 벨은 몇번이나 누르는 건지. 바쁜 거 뻔히 알면서. 내가 일하는 곳은 학교 근처에 있는 한 술집이었다. 아무래도 대학 근처이다 보니 사람이 북적북적하니 끊이질 않았다. 연신 울리는 벨 소리에 투덜거리다가 애써 웃음을 띠곤 주문을 받으러 테이블로 향했다.
정말, 이건 또 무슨 우연인지. 살짝 취한 듯한 전정국과 눈이 맞았다. 옆엔... 박지민인가. 친하다더니 정말 인가 보네. 올려놓았던 입꼬리가 절로 내려가는 걸 느꼈다. 그래도 주문은 받아야지. 주문서만 빤히 보며 뭐 더 주문하시겠어요, 하고 질문을 던지니 한참을 말이 없다. 뭐 하자는 거지.
"저기, 형."
"... "
"그렇게 한다고 뭐 달라질 거 같아요? 나 보라고 일부러 그런 거 다 알아요."
뭐?
도발하는 듯 가시가 잔뜩 돋친 말에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꽤 마셨나 보네. 테이블을 쓱 둘러보니 이미 소주병 4병이 올려져 있었다. 이걸 그냥 무시하고 갈까, 하다가 그러기는 싫었다. 나도 이제 물러서지 만은 않을 거라.
"... 너, 진짜 어리네. 나이에 비해 성숙하다 생각했는데 내가 사람 잘 못 봤나 봐. "
"허, 형 나랑 얼마나 차이 난다고 그래요, 한 살 차ㅇ ... "
"일하는 사람 붙잡고 이러는 거도 어린 행동이고. 그리고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야. 늦었다는 거. "
한 살 차이가 얼마나 큰 지는 모를 거다, 너는.
정국이의 말을 싹둑 잘라먹고는 정곡을 찌를 말을 하니 아무 반박 못하고 나를 노려보는 꼴이 꽤나 우습다. 괜히 옆에 앉아 있던 박지민은 난감한 표정으로 우리 둘을 보고 있길래, 뭐 더 주문 할 거냐 물으니 미안하다며 오뎅탕 가져다달라는 지민의 말을 듣고는 뒤돌아섰다. 그리곤 승리의 미소를 띠었다. 나도 참 아직 어리다. 저런 어린애 한 번 이기고 뿌듯해하는 게. 그래도 기분은 좋은 걸 어쩌나.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점은 전정국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변했다는 점. 전엔 신경 쓰이지도 않는 듯 당당하고 흔들림 없었다면, 근래에는 나를 좀 많이 의식하고 내 말 한마디에도 크게 흔들리는 것 같다. 불안하겠지. 엇갈렸다는 걸 알고, 내가 여주 옆에 계속 붙어 있단 걸 아니까. 한편으로는 측은했다. 이렇게 시간 날 때마다 옆에 있어도 불안한데, 전정국도 어지간히 힘들겠다, 싶었다. 너도 나도, 그리고 여주도. 우리 셋 다 불쌍하다, 참.
-마지막 브금입니다! 꼭 들어주세요 ><
아, 드디어 종강이다.
시험을 마치고 나오면서 뻐근한 몸에 목을 한 바퀴 돌리니 머리가 띵하다. 알바랑 공부를 병행하는 건 조금 무리였나. 그래도 복학 후 첫 학기여서 무리하지 않고 짠 시간표였길래 망정이지 꽉꽉 채워서 들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여주도 오늘 끝났을라나? 전화를 걸려다가 혹시나 시험을 보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경영과 과사 앞에 붙어 있는 시험 시간표를 확인했다. 어디 보자, 3학년... 3시에 끝나네. 시계를 확인하니 2시 50분이다. 지금 딱 강의실 앞에 가면 마주치겠다, 싶어 걸음을 빨리했다.
시험 강의실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종강을 외치며 웃음 가득한 얼굴로 우수수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이 가득했다. 그 속에서 멍한 표정을 한 여주를 단박에 발견할 수 있었다. 표정은 왜 또 저 모양이야. 시험 잘 못 본 게 틀림 없는 표정이다, 저건. 한 두번 본 표정이 아니었다. 슬금슬금 다가가 여주의 목에 팔을 걸었다.
"야, 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아. "
"죽는다, 아파, 아파. 몰라- 망했어, 이번 기말 완전 말아 먹었어. "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팔을 떼어내고는 착잡한 표정을 짓는 여주다. 그 모습이 좀 귀여워서 볼을 살짝 꼬집으니 얼굴을 한껏 꾸기고는 강의실에 뭐를 두고 왔다며 급하게 교실로 뛰어들어간다. 하여간 덜렁거려요. 문 옆에 기대어 기다리고 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나와서는 찾았다며 웃으며 내게 건넨다. 뭔데, 이게. 하고 그 안을 들여다보니 어제 빌려준 패딩과 아기자기하니 포장해놓은 봉투가 보인다. 그 봉투를 꺼내보니 조금은 새까매 보이는 쿠키 두 개랑 작은 쪽지가 보인다. 쪽지가 궁금해서 그 자리에서 봉투를 푸르려하니 내 손을 제지하는 여주다.
"아, 집 가서 봐. 그냥 돌려주기엔 좀 그래서 어제 과자 좀 구워봤어. "
지금 보고 싶은데.
무뚝뚝하게 말하는 여주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봉투를 풀어내고 쪽지를 펼쳤다. 악, 하고 내 손에서 쪽지를 빼앗으려는 여주의 행동에 손을 높이 들고 실눈을 뜨고 큰소리로 안녕! 태! 형! 아! 하고 또박또박 쪽지를 읽으니, 안 들을래, 하고 제 귀를 꼭 막는 여주가 너무 웃기면서도 귀여웠다.
'안녕, 태형아. 매번 고마운데 늘 말을 제대로 못하네. 늘 너한테 미안하고 힘들 때마다 내 버팀목이 되어줘서 고마워. 어제도 그렇고, 늘 매 순간 생각해주니까 그럴 때마다 너무 고마운데 타이밍을 맨날 못 잡아서 이렇게 쿠키랑 같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늘 좋은 친구로 옆에 있어줄 거지?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 "
진심이 한가득 담긴 편지에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딱 한 단어만 빼고는 완벽한 내용이었다. 뾰로통해져가지곤 얼굴이 새빨개진 여주와 눈을 맞추며 고맙다고 말하고 봉투에서 쿠키를 꺼내 한 입 베어 물으며 입을 열었다.
좋은 친구, 그건 이제 잘 모르겠다. 술이나 마시러 가자.
어깨동무를 하고 여주를 이끌었다. 내 말에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하던 여주가 술이라는 말에 금방 그 표정을 걷어내고는 오늘 다 박살을 내겠다며 소리친다. 정말 말 그대로 박살을 낼까 조금은 두려워졌지만, 그래도 웃으니 얼마나 좋아. 간만에 여주와 마시는 술이다.
"야아- 태태. 나 지짜 힘든 거 알아? "
"응응, 알고말고. 야, 야 근데 그만 마셔. "
"왜. 나 오늘 내가 아주 다 박살을 낼 거야- "
그전에 네 위장이 박살이 나겠는데.
기껏 술병을 뺏어 놨더니 내 잔에 채워진 술을 한 입에 삼키고는 헤실 거리며 웃는다. 못 산다, 못 살아. 내가 또 업고 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얼마 마시지도 않았다. 많이 마셨다 해봤자 한 한 병정도 마셨을라나. 간만에 마셔서 그런지 훅 술기운이 올라왔나 보다. 나도 그런 것 같고. 살짝 취기가 오른다. 내 쪽에 내려놓은 술을 잔에 채우는 여주를 더 이상 말릴 힘이 없었다. 그래, 그냥 업고 가지 뭐, 하는 생각으로 내 잔도 채우고 나서 여주와 잔을 부딫쳤다. 잔을 비우고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는 나를 보곤 배시시 웃는다. 아, 제발 그렇게 웃지 좀 말라고. 훅 들어온 웃음에 저릿한 느낌이 가슴께에 퍼진다. 고개를 한 손으로 받히고는 잔뜩 뭉그러진 발음이 오밀조밀한 입에서 새어 나온다.
"태형아, 내가 왜 좋아? 나 진짜 좋아해? "
여주가 진짜 취했나 보다. 단도직입적으로 훅 들어온 질문에 빈 잔을 채우고 한 입에 머금었다. 연속으로 마시니 살짝 어지럽다, 이젠. 취기를 빌려 입을 열었다.
"응. 네가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좋아해, 많이. "
내 생각보다 침착한 목소리가 나왔다. 심장은 또 뜀박질을 해대고. 한순간도 나를 가만히 두질 않는다. 계속 뛰어대는 심장도 그렇고, 내 말에 씩 웃으며 입을 여는 여주 때문에 정신이 없다.
"그래, 태형이가 전정국보다는 훠얼씬- 훠얼씬, 낫지. 진짜... "
저 말을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말하면 내가 퍽이나 좋겠다. 계속해서 잔을 채우는 여주에 정말 안되겠다 싶어 그 손을 막고, 여주의 짐을 챙겼다. 이러다간 내일 힘들다며 징징거릴 게 뻔했다. 토하기 전에 집에 데려다주는 게 좋겠다 싶어 옷을 꼭꼭 여며주고 여주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다행히도 아직 걸을 수는 있는지 나름 똑바로 걷는 여주를 부축하고 술집을 나왔다. 업어줄까, 하고 물으니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여주다. 그나마 여주네 집 근처 술집이라 다행이지 조금 걸으니 집 앞에 도착했다. 시간을 보니 12시가 좀 넘었다. 아, 차 끊겼겠는데. 택시 타고 가야 하나. 일단 좀 눕혀놓고 가야겠다, 싶어 여주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았다.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이렇게 덜렁 열쇠만 들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내일 한 소리 해야지.
철컥, 문고리를 잡아 돌려 여주를 침대에다가 눕히고 이불을 끌어 덮어주었다. 잠시 침대 벽면에 기대앉아 집에 어떻게 갈지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런 내게 여주가 뭐라고 웅얼웅얼 거린다. 뭐라는 거야, 뭐라고? 하고 물으니 그제야 제대로 된 발음을 한다.
"지금 몇 시야? "
"12시 12분. "
'아, 머리 아파. 좀 깬다. 너 지하철은? "
"진작 끊겼지. 택시 타고 가던가 해야겠다. "
"한 삼 만원 나오겠네. "
"그러니까. "
"... 그럴 바엔 그냥 자고 가. "
뭐?
여주의 발언에 얼굴에 열이 잔뜩 오른다.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서슴없이 말하는 거야. 정말 너는 나를 남자로 보질 않는 걸까. 저번엔 자고 갔다고 뭐라고 하더니만. 왜 이젠 그러지도 않아.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그냥 뭐 별일 없을 테ㄴ... "
촉, 하고 짧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이게 무슨 일인지 눈만 껌뻑 거리던 여주가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는 제 입술을 어루만진다. 그리곤 뭐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이는데, 그 말을 막았다.
다시 한번 다가가 이번엔 조금 더 길게 입을 맞췄다. 술기운인가. 생각보다 능숙하게 입맞춤을 이어갔다. 숨이 찬지 중간중간 숨을 내뱉는 여주가 작게 앓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에 천천히 입을 떼고 눈을 맞추니 야릇한 공기가 우리 둘을 채운다. 자칫하다간 일을 칠 것 같았다. 그래서 짧게 이마에 입을 맞추곤 몸을 일으켰다.
"자고 가란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나 택시 타고 간다. 잘 자고. "
문 앞에 있는 스위치를 꺼주었다. 뒤에서 작게 어, 어. 잘 가, 하는 외침을 들으며 집 밖으로 나섰다. 나 무슨 짓을 한 거냐. 그제야 정신이 들어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제정신이냐. 애초에 내가 여주네 집에 들어간 것부터가 문제였다. 이제는 좀 더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을 새삼스래 했다. 나부터가 별일 없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나 보다. 입술에 촉촉한 감촉이 남아 있었다. 미치겠네. 일단 집은 또 어떻게 가야 하나.
크게 들이쉰 차디찬 공기가 가슴을 간지럽힌다. 더 좋아진 것 같은데 정말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hr>
안녕하세요 도짜님들!!! 달 월 입니다.
이번엔 나름 빨리 왔지요?아.. 이번편을 쓰는데 막 왜 심장이 간질거리는지 모르겠어요... 김태형 최고야... 그래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지!!!!!!!!!!!!!!
독자님들도 저와 같은 마음이실거라고 생각합니다 희희///
오늘도 역시 어남태 대란이 일어날 듯 하네요 어남꾹... 씨가 마르면 안되는데 말이에오....(불안)
음 이번에 키스신을 넣을 생각 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한 독자님이 태형이랑 키스신을 넣는 건 어떻겠냐고 해주셔서 어,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고 당장 노트북을 켜서 이렇게 왔습니다!!!!!!
꺄항 만족스러운 화네요 ㅎ... 왜 김태형이 키스를 하면 된다는 생각을 못했는지 역시 배우신 독자님이라구요~
히히 기분이 너무 좋아서 글이 술술 잘 써지네요
그래서 더더 자주 올 수 있을 거같아요 ㅎㅎ 너무 자주 온다고 실증내지 말아주세오....!
또 금방 다시 봅시다 사랑하고 또 사랑해요 ♥
-맞춤법 지적 감사히 받겠습니다.
- 혹시 보고 싶으신 리퀘있다면 마구마구 던져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