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분만 시점을 조금 다르게 해서 갈게요ㅠㅡㅠ 양해 부탁드려요)
브금 되게 좋아요! 틀기를 추천합니다.
빨간 얼굴. 늘 그렇듯 익숙한 갈색 더플코트와 청색 스키진이 눈에 띈다. 하필 타이밍도 더럽다 싶었다. 이건 누가봐도 드라마 속의 여주가 가장 엿같아 하는 나 너 뺏을거야 상황 아닌가. 김상균의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에서 드문드문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확실히 강력한 한파였다. 이 추운 날씨에 저를 기다려준 안쓰러운 고마움에도 여주는 누군가의 손을 들어주어야 했다. 마음이 찢어지게도 상균은 코트 주머니속에서 손을 빼지 않은 채 여주를 믿는다는 표정을 하였다. 어쨌든 먼저 약속을 한 건 김동한 아닌가. 여주는 동한이의 쪽 옆에 가서 그 신발 선에 맞추어 김상균과 마주보고 섰다. 거절의 의미였다.
"죄송해요 사장님. 먼저 약속을 했어요."
"....."
"죄송합니다. 선약을 먼저 해 놓아서."
여주는 생각했다. 김동한은 김상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느낌을 당최 모르겠다고. 확실한 건 좋은 감정은 아니라는 거다. 순둥함의 결정체라 불렸던 김동한이 저렇게 맹수를 상대하는 눈빛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한쪽만 끌어올린 김동한의 입꼬리는 상대방을 놀리는 어딘가 가살스러운 데가 있었다. 김상균은 그런 여주와 김동한 사이를 정확히 10초정도 번갈아보았다. 여주는 그 피튀기는 기싸움에 어깨가 움츠러 들었지만 괜찮았다. 성정상 되바라진 남자들처럼 제 손목을 끌고가진 않을것이라 생각했으니. 그녀의 예상대로 김상균은 일단 예의를 갖추기로 마음 먹었는지 허리를 조금 굽혔다.
"먼저 선약을 하셨다니 어쩔 수 없네요."
"....죄송해요 사장님."
"아니에요. 저 먼저 들어갈게요. 재밌게 놀아요."
아쉬움이 진득히 묻어나오는 눈빛으로 괜찮다고 끝까지 제게 웃음을 보여준다. 시발. 이럴 줄 알았으면 김동한하고 오늘 약속을 안 잡는 거였다. 안그럼 김상균의 저 폴인럽한 눈을 계속 맞추면서 걸어갈 수 있었는데 말이다. 여주는 손을 흔들며 김상균의 뒷모습을 곱씹었다.
***
동한과 여주는 아무 포장마차를 들쑤시며 가격을 가장 싼 곳을 찾았다. 오늘은 제가 산다며 비싼 곳을 찾아보라는 김동한의 말에 꽤 비싼 술집에 가서 자리를 붙였다. 안주와 술을 시키고 옷을 걸자, 수다쟁이 동한이 평소와 다르게 장황한 서론도 없이 바로 본론을 툭 내뱉었다.
"사장 좋아하냐."
그 말을 하는 김동한의 손이 조금 떨렸다. 긴장한 동한의 손이 익지도 않은 막창의 껍질을 아무렇게나 뒤집었다. 그도 그럴것이 10년이었다. 자그마치 10년을 그녀의 뒷 그림자만 몰래 밟아야 했다. 그녀가 고백을 받아오고 차이고, 거절에 울고 하는 그 십수년의 로맨스의 역사동안 김동한은 그 뒤안길에서 묵묵히 여주의 곁을 지켜주었다. 지금과 같이 술 한 잔을 기울이면서. 다행이도 지금껏 동한이 가만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한 번도 남자친구를 사귀지 못했던 탓이었다. 아니면 이상한 썸남들을 만나거나. 그 박복한 남자팔자에 동한은 은근히 실실 쪼개며 이 상태가 지속되길 바랐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누가 봐도 잘생긴 남자에 자상한 성격, 좋은 학력과 괜찮은 재력의 남자가 그녀의 짝남이라니. 모든것이 그를 질투의 수렁에서 헤엄치게 만들었다. 친구라는 명목으로 늘 그녀 곁에 원탑이었던 김동한의 자부심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붓는다.
"응!!"
"그러냐, 잘 됐네."
참 해맑게도 말한다. 이미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김동한의 가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미 그것으로 제 묵언의 고백에 대한 대답을 충분히 들은 것 같다. 10년의 짝사랑을 거절 당하기엔 역시 사람 많은 곳이 제격이다. 그래야 울음에 걸린 제 목소리를 애써 은폐할 수 있으니까. 동한은 애써 울음을 삼키며 탄 막창 껍질을 제 접시에 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좋은 것만을 모두 여주의 편으로 밀어주었다. 제 속도 모르고 여주는 막창을 된장에 찍어 상추에 올렸다. 볼 안이 햄스터처럼 우물거렸다. 10년동안이나 봐왔는데 저 먹는 모습은 하나도 질리지가 않았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
"너 되게 잘 먹는다. 역시 돼지라서 그래."
"아이씨, 또 저런다! 근데 할 말이 뭐냐."
"그냥 놀아달라고 부른거지. 무슨 할 말."
그냥 호감이라고 어물쩡 말했어도 김동한은 오늘 10년의 짝사랑을 청산하고 고백이란 카드를 대놓고 내놓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도 사장이 보낸 문자를 보내고 입을 헤벌심 벌리고 있는 그녀를 보고 김동한은 다시 한 번 결심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그냥 지켜봐 주기로. 짝사랑 10년이나 해봤는데 20년을 못할까. 고백해서 짝사랑의 상대와 멀어지는 것보다 역시 헤어졌을 때 위로하면서 재기를 꿈꾸는 게 좋지 않겠는가. 김동한은 쓴 술을 아무렇게나 섞어 마셨다. 쉬는 타이밍도 없이 들이키는 통에 여주가 걱정을 했다.
"무슨 일 있냐. 술 좀 천천히 마셔"
"걱정마라 돼지야."
주량을 가늠하기 힘든 김동한 덕에 여주는 어느 타이밍에 김동한을 말려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출근 덕에 한 병에서 마무리 하였는데 김동한은 끝도 모르고 들어간다. 벌써 다섯 병을 넘었으니. 공중으로 올라가는 동한의 술잔이 더더욱 늘어난다. 그리고 점점 그 몸짓이 부러지며 흔들렸다. 눈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낀 여주가 술잔을 든 동한의 팔을 붙잡았다.
"술 그만마셔."
"응."
"너 우냐? 눈가 빨개."
"아니. 나 잠을 못자서."
동한은 그녀의 말을 안 들었던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술을 그만마시란 제지에 동한은 바로 술잔을 놓았다. 이미 여섯 병은 제 위장에 들어간 것 같다. 쓰린 속을 달래며 흐리게 눈을 뜨니, 저를 걱정스레 보는 여주가 들어왔다. 울음을 너무 참아서 눈이 많이 빨갛나 보다. 동한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잠을 설쳤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했다. 저 순진한 곰은 또 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려니 넘어갈 것이다. 안심한 동한은 계산을 하기 위해 엉거주춤 자리를 일어났다. 주량을 훨씬 넘긴 탓에 흐린 잔영들이 저를 주물렀다. 그 와중에 그녀만 또렷히 보이는 현상은 무슨 기현상인가. 비척비척 계산대로 뒤틀린 걸음을 옮긴 동한이 카드를 건넸다.
"저기 계산...."
꼬부라진 혀로 동한이 말했다. 종업원의 표정이 이상하다고 느낄 때쯤, 동한의 주위가 흔들리며 아득히 검은 시야가 덮쳐왔다. 귀에서 시냇물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저기요, 손님!!"
"야, 김동한!!"
왈칵 눈물이 터졌다. 걱정시키면 안 돼. 김동한은 끝끝내 엎어지면서도 쏟아지는 눈물을 소맷부리로 닦았다. 눈물자국이 뭐냐고 물어보면 술 먹고 넘어진게 너무 아팠다고 구차한 변명을 하리라 생각한다. 그러게 내가 술 많이 마시지 말랬지! 저를 혼내는 여주의 일갈하는 목소리가 떨어졌다.
***
"동한아, 나 넘어졌어."
"햐,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앞 잘보고 다니랬지."
"이씨이..괜찮아."
"야 돼지. 업혀."
학교 소풍으로 온 산길에서 저질 체력 탓인지 친구들 무리와 도태되고 말았다. 등을 내민 김동한에게 여주는 뛰어들듯이 업혔다. 김동한은 덜렁이인 제가 넘어질 때마다 항상 등을 내주곤 했다. 여주의 시야가 확 높아진다. 170이 보는 세상이란 이런건가 싶었다. 155인 저는 꿈도 못 꿀 윗공기다. 동한이 걸을때마다 높은 시야가 흔들린다. 새삼 보니 어깨가 넓다. 2차 성징이 막 일어나기 시작한 15살 동한의 어깨는 제법 남자티를 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얼굴도 제법 잘생겼다. 더 솔직히 말하면 엄청. 왜 여자친구가 없을까. 이 정도면 여자가 꼬리를 물 것 같은데 말이다.
"너 왜 여자친구 없냐?"
"좋아하는 사람 있어서."
"진심? 야 생기면 나한테 말해줘."
동한이 그 말에 실 없이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여주인데 누구와 잘되길 기원하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눈치 없음으로는 세계대회 1등도 먹을 것 같다. 해가 점점 아스라이 잠식되며 노을이 일어났다. 머리 위로 새콤한 가을바람이 불며 머리칼을 헤집었다. 여주의 긴 머리 몇 가닥과 나뭇잎이 동한의 뺨을 스쳤다. 등 뒤에서 여주가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동한은 이때다 싶었다. 아슬하게 감춰왔던 제 답답한 속내를 산에 빌었다.
"나 너 좋아해."
"크르렁...컭!"
"그래. 평생 듣지 마라."
***
"아이씨. 김동한 더럽게 무겁네 진짜로."
"...."
"동한아, 뭔 일인지 몰라도 아프지 말아라. 누나 섭섭하다?"
결국 여주는 동한을 업고 집에 데려다 줄 수 밖에 없었다. 회상을 끝낸 동한의 눈에서 끝끝내 눈물이 흘렀다. 축축함을 느낀 여주가 뒤를 돌려고 하자, 김동한은 흔들리는 손으로 여주의 뺨을 밀었다. 절대 우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마음씨만 좋은 여주가 저에게 무슨 일이냐고 채근할게 뻔하니까.
"아까 술 마실 때 넘어져서 울었어."
"햐, 김동한 울보쟁이네."
"어...맞아."
"...아 씨 진짜 무거워."
"야."
답지 않게 오늘 얘가 이상하다고 느낀 여주였다. 한 번도 이렇게 술을 진탕 퍼 마셔 본 적도 없거니와 저를 챙겨야 한다며 항상 절대 먼저 쓰러지지 않는 동한이었다. 덕분에 제가 등을 빌린적은 있었어도 업은 적은 처음이다. 아이씨 키가 커서 그런가 겁나 무겁네. 어렸을 때 운동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여주였다.
"..행복해라."
"오냐. 나 가서 사장님이랑 또 카톡할거지롱."
어깨 쪽이 아예 눈물이다. 넘어질 때 얼마나 아팠으면 애가 이렇게 우나 싶다. 아 그러니까 작작 좀 퍼마시지..
***
"뭐라고 켄타야?"
"어...음..."
"...누가 와?"
"빛나 거기 간대."
미쳤다. 상균이 제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헤집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도 그럴것이 제가 5년동안 짝사랑했던 첫사랑이 여기 온다고 통보를 받았으니 말이다. 제가 하는 카페는 당최 어떻게 알았나 싶다. 1년동안 연락 한 번이 없더니 말이다. 지금 좋아하는 사람과 제 첫사랑은 무슨 조합일까 싶다. 확실한 건 오늘 여기 오면 안된다는 거다. 결정을 마친 상균은 잘 들어가지도 않는 단톡방에 들어가서 오늘은 카페를 열지 않는다고 급하게 타자를 놀렸다. 칼답의 귀신들이라 불리는 알바생들 덕택에 노란 카톡 뒤의 숫자가 빠르게 사라진다. 용국과 현빈이 오랜만의 휴식에 쾌재를 부른다. 제가 늘 카페 개장 한 시간 전부터 출근하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어쩔뻔했나 싶다. 한숨을 쉰 상균이 유니폼을 벗고 겉옷을 다시 걸쳤다. 이제 빛나가 오면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딸랑- 반사적으로 사람이 왔음을 알리는 종소리에 상균이 급하게 뒤를 돌았다.
"김빛...!"
"네? 사장님 안녕하세요!"
"상균아 오랜만이다?"
여주의 뒤로 긴 머리칼에 화려한 검은 옷을 걸친 여자가 딸려온다. 이건 웬 무슨 조화인가 싶다. 제가 따뜻하게 대해야 할 사람과 모질게 내칠 사람이 동시에 있다니.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일단은 여주를 보내는 것이 우선 아니겠는가. 상균은 황급히 여주를 문 바깥으로 밀었다. 고개를 숙여 여주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
"미안해요. 제 친구라서. 이따 전화할게요."
"네? 네..."
계단에서 그냥 상균의 친구라길래 오순도순 얘기를 하면서 왔는데 상균의 반응이 의외였다. 안 그래도 친목을 잘 하지 않는 상균에게 저렇게 예쁜 여사친이 있다니. 그런데 오랜만에 왔으면 좀 웃으면서 반겨줄 것인지 저렇게 정색할 건 또 무어냐 말이다. 그리고 굳이 저를 문 바깥으로 내칠 이유는 무엇이고. 여주는 괜히 서운해서 입이 댓발 튀어나온다.
"거 끝내주게 예쁘네..."
160이 넘어보이는 큰 키, 잘 꾸며입은 스타일. 달걀형에 큰 쌍커풀. 저도 모르게 가방에서 콤팩트를 꺼내 제 얼굴을 확인했다. 각진 얼굴에 쌍커풀이 있음에도 그렇게 크지 않는 눈. 거뭇거뭇한 피부에 여드름이 들어온다. 이건 괴리감이 있어도 너무하지 않나? 저렇게 예쁜 사람을 친구로 뒀는데 저 예쁜 친구와 사귀지 않고 저에게 호감을 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싶다. 여주는 우울한 기분에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못하고 카페 문 뒤에 몰래 상균과 여자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침이 절로 꿀떡꿀떡 넘어간다.
***
"상균아, 오랜만이야."
"왜 왔어."
상균이 다시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는다. 어서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 여자와의 진절머리 나는 관계를 정리해야만 했다. 차가운 목소리로 여자를 들쏘시자, 여자는 상균의 어깨를 때리며 반가운 척을 했다. 역겹게도.
"첫사랑한테 너무하네."
"첫사랑 타령 좀 그만하자."
고 1때 만난 김빛나는 학교의 퀸카였으며, 그 당시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던 상균은 그녀의 눈부심에 홀딱 반했다. 잘 놀고, 순둥이인 저와 다르게 할 말 못할 말 다하고. 자연스레 그녀를 좋아했고 썸의 단계에서 차였다. 그 쯤에서 그만둔 줄 알았는데 그녀는 1년마다 한번 씩 찾아와서는 저에게 사랑을 빌었다. 외로움을 많이 타던 상균은 그녀가 돌아올 때마다 거듭 그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또 썸을 타다 까이고. 2년동안 연락이 없길래 이제야 그 굴레에서 해방된 줄 알았는데. 상균이 매섭게 여자를 노려보자, 여자는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을 문지르며 말했다.
"여자친구야?"
"알려주고 싶지 않아."
"너 날 좋아했으면서 이렇게 눈이 낮았어?"
"무슨 소리야."
"못생겼네."
"..누가 못생겨?"
상균이 헛웃음을 뱉었다. 누구보다도 사람의 얼굴에 대해 비하를 하는 것을 싫어하는 상균이었다. 그래도 옛 정이 있어서 화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만 열이 뻗친다.
"너...내가 평생 화를 안 내고 살 것 같아?"
"워후. 화났어?"
여자가 두 팔을 들어 상균의 뺨을 휘어잡는다. 갑자기 다가오는 따뜻한 감촉에 놀란 상균이 뻣뻣하게 굳어버린다. 팔을 잡아 여자를 밀쳐낼려고 하자, 여자가 손아귀에 더더욱 힘을 주며 상균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였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모로 돌아간다. 순식간에 훅 들어오는 혀에 놀란 상균이 다급히 그녀의 어깨를 밀었다. 손 쉽게 밀려난 여자의 눈에서 눈물 방울이 조금 맺혔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드라마에서 전 여친들이 구질구질하게 하는 짓."
무거운 공기가 둘을 싸고 돌았다. 상균이 더럽혀 졌다는 듯 입을 소맷부리로 슥슥 닦았다. 겨우 카페라는 협소한 장소 안에서 무슨 삼류짜리 로맨스 드라마를 찍고 있는 것인가. 상균은 회의감이 들었다. 이윽고 그녀가 소맷부리로 제 얼굴을 싸매며 울음을 터뜨리자, 상균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여자의 등을 밀었다. 그녀의 신파극을 들어 줄 여유도 없거니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하는 키스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흔들렸을 상균이 이번엔 입을 맞추자마자 불현듯 여주부터 걱정되는 건 무엇인지. 당장이라도 이 앞에 있는 제 첫사랑보다 더, 집에서 저를 기다릴 여주가 더 보고싶었다. 상균이 문을 열고 여자를 내보내자, 계단 밑에 쭈그려 있던 여주를 발견했다. 상균의 놀란 동공이 쉴 틈없이 확장되었다. 여자는 눈물을 닦고 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비웃음의 의미였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여주씨 그게 아니라..."
"아, 뭐! 저, 저도 알아요! 해명 안 해도 돼요."
여주는 계단에 앉아 차분하게 김상균과 여자의 키스 장면을 목도하고 있었다. 평범한 친구였다면 굳이 친구 사이의 대화에 끼어 들 이유가 없었으니. 괜히 몰래 봤다 싶었다. 제 눈으로 믿지 못할 광경을 본 여주는 가방을 매고 여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도 회사온다고 나름 꾸미고 왔는데 우월한 피지컬과 압도적인 비주얼에 기가 죽는다. 그래도 그 와중 다행인건 삼류 드라마처럼 안 뛰쳐 나가길 잘했단 생각. 김상균이 냉정하게 여자를 밀어내는 모습을 같이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김상균에게도, 여우같은 저 첫사랑이란 분에게도 화가나지 않았다. 단지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모쏠이라 말했던 김상균의 첫 여자가 제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하필 그 첫여자가 저와 다르게 너무 예뻤다는 것이다. 그게 전부였다. 어쩐지 이상한 배신감에 저를 부르는 상균의 목소리도 마다하고 가게를 나섰다. 가게를 조금 지나서 버스 정류장까지 제 무거운 몸을 끌자, 정말 키다리 아저씨처럼 큰 남자가 제 그림자를 밟고 서 있는다. 역시나 늘 그랬듯이 저보다 두 뼘은 더 큰 김동한이다. 이쯤되면 정말 동화속의 키다리 아저씨 인증 아닌가. 김동한은 항상 제가 힘들때마다 귀신같이 나타나 주었던 것 같다. 김동한에게 너무 고마워 순간 긴장에 굳은 몸이 술술 풀어졌다. 여주가 저도 모르게 동한의 품에 덥석 안겼다.
"뿌에에에에엥-- 동한아아아"
"뭐야, 왜 또. 울긴 왜 울어 이 돼지야."
"우에엥 사장님 입술 흐얽, 내 거 아니야. 다른 사람 컭"
"천천히 말해도 돼."
"상균이 여자 존예야 엉엉...앂팔..비너스인줄..."
동한은 제게 안긴 여주를 힘껏 끌어안았다. 얘는 무슨 울 때도 개드립을 날리냐... 웃음이 피실 나오려는 것을 참고 품에 가득 끌어안자, 한 품에 다 들어온 여주의 차가운 숨이 훅 끼쳤다. 여주가 꺽꺽거려 제 어깨가 흔들릴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3년 전 여주가 까였을 때 말고는 한 번도 안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안은 그녀의 품이 너무 좋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여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은 머리통이 아래 위로 쓰다듬는 큰 손짓에 착 감긴다. 부드럽다. 여자의 머리칼이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나. 뜬금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여주가 동한의 청자켓을 힘껏 그러쥐며 말한다.
"김상균 미워...겁나 미워...아무 잘못없는데 미워."
밉다고 저에게 속살거리는 품새가 너무 사랑스러워 자꾸 실실 웃음이 나온다.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여주를 울렸단 이유로 미움이 샘솟는다. 동한이 여주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여주야."
"왜."
"사장새끼 그냥 족쳐줄까?"
"...사장새끼를 왜 족칩니까."
여주가 익숙한 낮은 음성에 동한의 품에서 빠져나와 황급히 뒤를 돈다. 검정바지, 잘 다려진 흰 셔츠와 붉은 넥타이. 그 위에 깔끔한 정장자켓을 입고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 상균이었다. 그토록 제가 보고 싶어했던. 오늘만큼은 보고 싶지 않은 남자. 지켜본 건가. 동한이와 껴안은 것까지도? 여주가 눈물을 닦고 상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상균 역시 여주보다 두 뼘은 더 큰 동한의 얼굴을 꼼꼼히 살핀다.
"....."
처음 서빙했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정말 마음에 안드는 남자다. 저 정도로 잘생긴 남자가 여주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것도 질투나는 사실이거니와 저렇게 스킨십까지 자연스럽다니. 심장 한 켠에서 튼 질투의 물꼬가 머리 끝까지 올라간다. 질투 때문에 머리가 폭발할 것 같았다. 분노에 튼 상균의 입술이 질겅질겅 물렸다.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여자한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남자친구도 아니고 썸의 단계였고. 게다가 저도 오늘 고의는 아니였지만 못 볼 꼴을 보였으니. 생각 정리를 마친 상균이 여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랑 같이 가요."
"싫어요 이씨! 사장님 저리 가세요.."
"...저리가?"
상균의 눈빛이 흔들린다. 고백을 거절 당한 느낌으로 심장에 돌덩이가 쿵-하고 내려 앉는다. 아까 마저 짜내지 못한 눈물을 다시 짜고 있는 여주를 본다. 그리고 그걸 제 소맷부리로 닦아주는 동한. 너무나 잘 어울려서 가슴이 쓰라렸다. 저를 밀어내는 여주에게 슬프기도 슬프거니와 저 완벽한 케미에 다시한 번 화가 치밀어올랐다. 이러면 안되는데 유치하게. 오늘 분명히 잘못한 건 저니까 어떻게서든 잘 얼러서 해명하고 싶었는데. 왜, 왜
"돼지, 내가 그만 울라고 했지."
여주의 볼을 잡고 눈물을 닦아주는 김동한을 보고 상균은 차오르는 눈물을 삼켰다. 꿈과 똑같은 익숙한 상황이다. 김빛나가 저를 갖고 놀 때 늘 사용하던 상황. 우는 눈물을 제가 닦아 주고 싶은데. 이러면 안되는데도 저를 내치는 여주를 함부로 붙잡을 수가 없었다. 이제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줄 알았는데. 상균은 늘 겪어오던 트라우마에 저도 모르게 뒤를 돌고 말았다.
"...마음대로 하세요."
***
달달한 장면 하나도 없어서 죄송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땅에 머리 박고 사죄하겠습니다ㅠㅠㅠㅠㅠ
생각보다 스토리가 길어질 것 같아요...큿흠..
1편 남은게 아니라, 2 3편은 걸쳐서 써야 할 것 같습니다..그래야 막판에 연애하는 것도 좀 넣고..
오늘 김상균 첫사랑인 김빛나년(?)을 위해 제가 5화정도에 상균이가 꿈꾸면서 우는 장면을 넣었습니다.
하앍. 저 변태라서 이런 일화 꼭 넣어보고 싶었거든요.
첫사랑이 계속 다른남자의 품에서 상균이를 갖고 놀았기 때문에. 울 댕규니 오늘 본 거 적잖이 충격먹었네요..ㅠㅡㅠ
상균이한테 관심 없었는데 제 글보고 신경쓰게 되셨다는 분들. 절을 어디로 할까요. 동서남북? 광대 찢어집니다..
입덕하시면 김상균같은 애들이 5명이 더 있읍니다...^^
용국이한테 치였다는 분들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나도 그런 장면을 넣지 않았는데도요(?)
서브병 걸리신 분들...저도 글잡 읽다 매번 걸려서 알지만 걸리면 답도 없습니다...
사실 김동한 1회 특별(?)출연이었는데 2화를 다 쓰고 직캠보니까 정말 미친듯이 치이더군요...
★서브로 결정★
짤은 완결나는 순간 모두 풀 생각입니다. 짤 칭찬도 감사드려요!!
그리고 글잡 초록글 처음인데 이것도 감사드려요ㅠㅠㅠ
암호닉 : [베리] [뽀쨕] [빙구] [Qsi] [상뀨니] [끝의 시작] [뿜뿜이] [1216] [뭉치] [에판] [가스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