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정도 안부릴게.."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경을 민혁은 애써 외면했다. 카페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민혁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했다. 표정을 굳히며 경에게 잡힌 손을 빼버린 민혁이 지잉-하고 울리는 핸드폰을 들고 일어섰다.
"계산은 내가할게."
다시는 연락하지말자.하고 전화를 받으며 경을 지나치는 민혁에 서러워져 더더욱 눈물이 쏟아졌다. 지나치는 민혁의 핸드폰 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애인때문에 거들떠도 안보던 클럽에는 왠일이냐?" "헤어졌어." "뭐야-죽고 못 살더니 뭐야?" 맞아맞아,맨날 민혁이혀엉~경이 뽀뽀해주세요오~ 장난스러운 친구들의 말에 욕따위를 씨부려주고는 아무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나 차였다-그리고 내가 언제 그랬어 죽을래?" "왜그러셔 우리 애교쟁이 경이~" "그나저나 천하의 박경 다죽었네 애인한테 차이기나하고~"
그러게 천하의 박경 다 죽었다, 떠나간 애인 잊어보겠다고 클럽이나 오고. 오랜만에 얼굴 비췄다며 여러 술들을 섞은 커다란 컵 하나가 경의 앞에 들이밀어졌다. 마셔라!!마셔라!! 그에 경도 웃으며 폭탄주를 입에 털어넣었다.
"오랜만에 박경도 왔는데, 돈많은 내가 쏜다!!먹고 싶은거 다시켜!!" "우오오-!우지호 지갑 털릴 준비해라!"
오랜시간 정신없이 친구들이 주는 술을 다 받아먹다 보니 경은 헤롱헤롱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느세 그 많던 친구들의 절반은 스테이지로 나가 디제이가 만드는 시끄러운 비트에 몸을 맡기러 룸 밖 스테이지로 나갔고, 그의 절반은 집에 가거나 룸 안 이곳저곳에 쓰러져 죽은 듯 자고있었다. 희미한 정신에 버둥버둥대던 경의 볼에 차가운 물체가 닿아왔다.
"...?" "정신 좀 차리라고-"
술기운에 빠져 힘겹게 떠있는 경의 눈을 보며 지호가 웃어보였다. 물컵을 잡고 벌컥벌컥 목을 축이던 경이 지호를 흘겼다.
"왜.뭐-" "너 오늘 돈 좀 깨지겠다-"
내가 그렇게 반가웠냐? 경이 물컵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그러니까...아, 이게 너 때문이야-" "이게 누구탓을 해? 오지랖 넓은 니 탓을 해-"
까칠하긴. 지호가 힘없이 늘어져있는 경의 마른 손을 보았다. 볼때마다 말라가는 경이 안쓰러웠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경이 몸이 점점 말리가는 이유는 본인이 더 잘알고있겠지.
"지호야..." "응." "지호야.." "응.말해."
이민혁이 보고싶어. 항상 눈꼬리를 둥글게 말며 웃던 경의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경의 눈물을 애써 모른척하며 쥐죽은듯 자고있는 친구들을 찬찬히 훑었다. 조용한 분위기속에 룸밖의 시끄러운 비트소리가 문사이를 비집고 들려왔다. 눈물을 옷소매로 벅벅닦은 경이 코를 흘쩍이며 앞에 있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려있는 치즈를 입안으로 쏘옥 넣었다.
"너희 진도 어디까지 나갔냐?"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지호가 핸드폰의 액정을 이리저리 닦았다. 혹시 자봤냐? 호기심 어린 목소리와 다르게 지호의 눈은 관심없는척 까만 핸드폰 액정만을 쳐다보았다. 응 자봤어. 치즈가 짠듯 안그래도 작은 치즈를 이로 조금조금씩 쪼아 먹던 경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뭐?설마 너가 깔렸냐?" "에라이 개새끼야."
** 경은 쇼파위에 두다리를 올려 껴안았다. 며칠동안 밖으로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저번에 통화하던 여자는 언제 만났을까?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박스하나를 바라보았다. 민혁과 관련된 모든 걸 정리하겠다고 박스안에 담고는 테이프로 꽁꽁 봉쇄해버렸다. 애써 버릴순 없어서 거실 중앙에 놓아두고 계속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까 민혁과 관련된 물건을 박스에 담다가 민혁과 찍은 사진이 끼워져있는 액자를 보곤 결국 울어버렸다. 아이같이 엉엉 울다가 결국 액자를 박스 안 제일 밑에 깔아버렸다. 다시금 핸드폰을 들어 미련없이 민혁과 찍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정리해나갔다. 그래도 손가락에 껴있는 반지는 차마 뺄 수 없었다.계속 반지를 바라보았다. 울음을 참으려 아랫입술을 깨물었지만 결국 눈물이 주르륵하고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띵동-하며 초임종이 울렸다. 황급히 눈물을 닦고 문을 열었다.
"여긴 왠일이야?" "야 박경 왜이리 연락이 안돼."
뭐냐,또 울었냐? 벌게진 눈을 한 경이 들어오라는 듯 뒤로 돌아 거실로 들어왔다. 들어오지않고 그대로 서 있는 지호를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옷 입고 나와- 같이 갈 곳이 있어-"
w.인쇄용지 "뭐야..누구 죽었어?" "...보면 알아"
하얀 건물에 붙어있는 간판을 보고 지호를 쳐다보았다. 납골당에는 무슨 일인데? 말 없이 앞장서서 건물을 들어가던 지호가 건물 입구쪽에 위치한 카페테리아로 몸을 틀었다. 혼자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는 우리 또래의 여자가 보였다.
"누구야?" "데려왔어요-"
지호 옆에 서 있던 경을 보고 여자는 움찔 몸을 떨었다. 전 가볼게요. 먼저 자리를 뜨는 지호에 경이 당황하며 지호를 불렀지만 이미 지호는 건물밖으로 나가버렸다. 고개를 앞으로 돌려보니 경을 당황한 듯 쳐다보는 쳐다보는 여자가 보였다. 경도 당황해서 어쩔줄을 몰라 가만히 있는데 여자가 평정심을 되찾고 경을 반댓편 의자에 앉혔다.
"제 이름은 이혜인이예요."
박경이예요.건성으로 대답한 경이 어색함에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우지호는 무슨 생각으로 저를 여기 데려온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여자가 앞에 있는 커피를 홀짝 마셨다.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남자분이실지 몰랐네요.." "네...?"
대체 누구한테 내 얘기를 들었고 이혜인이라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감이 안왔다. 무슨 소리냐는 듯 궁금한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혜인은 지갑속에 끼워져 있던 사진 한장을 건냈다. 그 사진속에는
"이건..."
의자에 앉아 웃고있는 혜인과 그 뒤에 혜인의 어깨를 잡고 선 웃고있는 민혁이 있었다. 사진관에서 찍은듯한 사진같았다.
"민혁이 누나예요." "아...안녕하세요.."
웃고있는 민혁의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못했다. 아르바이트생이 경에게 블루베리요거트스무디와 영수증을 주고는 카운터로 돌아갔다. "민혁이가 요거트를 좋아한다고 해서 제가 마음대로 시켜봤어요."
괜찮죠? 마시라는듯 손을 까딱 움직이는 그녀의 행동은 민혁과 많이 닮아있었다.
"민혁이가 항상 박경씨 얘기를 했었어요."
근데 남자분일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하며 작게 웃는 여자에 경이 괜히 빨대로 요거트스무디를 이리저리 뒤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전 민혁이가 누군가를 그렇게 챙기는걸 처음봤어요. 옛날에는 화이트데이며 빼빼로데이며 다 기업들이 청소년들을 이용해먹는 못된 상술이라고 했는데 어느순간부터 발렌타인데이다 빼빼로데이다 막 정성들여 초콜릿을 밤새도록 녹이고, 심지어 백일이다 일주년이다 이주년이다 이러면서 챙기길래 누군지 정말 궁금했거든요."
코 끝이 찡해지며 입에 미소가 돌았다. 민혁은 항상 머쓱하게 웃으며 사왔어-하고 초콜릿따위를 던져주곤 했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모양새에 웃으며 손수 만들었냐고 물었을때에 민혁이형은 항상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왔다니까..하고 피곤하다며 경의 어깨에 기대거나 경의 무릎을 베개삼아 잠을 자곤 했었다. 추억에 잠겨들었던 경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스무디를 한 입 먹었다.
"민혁이가 최근들어 밥도 잘 먹질않고 앞을 보지 않는건지 벽에 자주 부딫히더라고요." "네..." "저도 얼마전에 알았는데...뇌종양이래요.." 이미 종양이 뇌의 절반 이상으로 퍼져나가고 있어서 수술해봤자 가망이없다고 하더라고요.
네? 처음 듣는 소리에 경이 눈을 크게 뜨고 혜인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소리.. 마지막으로 혜인이 가방에서 손바닥만한 상자 하나를 꺼내 경에게 내밀었다. "민혁이 방 청소하다 책상서랍에서 발견했어요. 열어보진 않았는데 박경씨한테 주는것 같네요."
혜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스를 받고 작게 울먹이던 경의 고개가 혜인을 따라 올라갔다.
"민혁이...어디 있는지 알려줄게요.."
건물 안쪽으로 점점 들어가다 보니 유리진열장안으로 작은 옥색의 항아리들과 많은 사진들이 보였다.이미 머릿속은 아무 생각없이 하얘진지 오래였다. 여기예요. 혜인이 멈춰선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밝게 웃고있는 민혁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먼저 가볼게요..민혁이랑 얘기하다 가세요."
구두를 또각이며 혜인이 나가자마자 경은 주저앉았다. 주체할수없이 눈물이 흘러넘쳐 아무리 닦아도 소용이 없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작은어깨가 안쓰러울 지경이였다. 위를 올려다 보니 웃고있는 민혁의 사진이 보였다.
"흐웁....훕..."
주체할수 없는 울음에 숨을 쉬기조차 불편했다. 거친 숨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투명한 유리 너머 진열장 속에 경의 손가락에 낀 반지와 똑같이 생긴 반지하나가 올려져있었다.경은 반지를 빼고 투명한 유리문을 열어 민혁의 반지 옆에 자신의 반지를 넣었다.
"흐윽...민,혁이 형...흐으윽...후웁..." 옥색의 작은 항아리를 몇번 쓰다듬고 유리문을 닫았다.경은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않고 등을 돌렸다. w.인쇄용지 집에 오자마자 혜인이 준 작은 박스를 열어보았다. 심플한 얇은 은빛을 내는 반지와 곱게 접어놓은 작은 편지가 있었다. 편지를 천천히 펴는 경의 손이 떨렸다. 이내 편지의 내용을 눈으로 살피던 경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To.사랑스러운 애인 경이에게 경이 안녕! 울고있는거 아니지? 울고있을거 같은데, 우리 경이? 너가 이걸 읽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지만..또 한편으로는 이걸 읽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너가 이걸 보고있다면 내가 죽은걸 알았다는거 아니야..난 일부러 너 힘들지 말라고 못되게 굴었는데 너가 이걸 읽으면 다 헛수고고 넌 더 힘들겠지...그렇지만 내 만족으로 이 글을 쓴다!경아!오빠가 뇌종양이래! 인터넷에 쳐봤는데 별로 위험하지않는다는 말들이 있었는데 나는 왜...이렇게 아픈지 모르겠다. 같이 있는 목걸이는 나 어릴적 엄마가 주신 반지야. 사랑하는 사람한테 주라고 했는데 역시 난 너밖에 없나봐 경아. 항상 잘 못해줘서 미안했어.넌 꼭 건강하고! 사랑해.
눈물자국에 글씨가 번져 얼룩덜룩했지만 알아볼수는 있었다. 경이 박스안에서 은색빛을 띄는 반지를 꺼내들었다. 네번째 손가락에 끼어넣은 반지는 경의 손에 딱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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