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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보이지 않아도 짙은 남색 밤하늘이 참 맑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자연스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후덥지근한 공기도 잠시 여름이 끝나가는 무렵, 선선하게 부는 바람에 실려 오는 밤공기가 무거운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었다.
“내가 아니고?”
내 옆에 있던 정국이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제 어깨에 기댄 나를 내려 보았다.
“뭐가?”
“같이 나오자고 해서 나왔더니 내가 아니라 밤공기가 좋은 거였어?”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나왔다. 들고 있던 맥주캔 안의 내용물이 찰랑이는 소리가 났다. 내가 야밤에 전정국을 데리고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오랜만에 세나와의 일이 떠올라 기분 전환을 할 겸 맥주를 들고 바깥공기나 쐬러 나가려고 하자 나를 막아서는 전정국이었다. 이 외출을 위해 장장 한 시간이나 전정국을 설득해야했다. 기분이 축처지는 날이면 밤에 한강에 돗자리를 펴고 맥주를 마시는 건 내 습관이니까 가야한다고 말을 하면 나쁜 습관이라고 받아치면서 잠이나 자라며 침대에 나를 밀어 넣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잠이나 잘 수는 없으니 설득의 방법을 바꿨다. 그걸 애교라고 했던가. 죽기보다 싫었는데 정국의 앞에서 하니 뭐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기 전에 맥주 한 캔 정도 마시고 할 걸 그랬다는 후회는 든다.
푸흡, 하는 소리를 내며 정국이 손으로 입을 막고 웃었다. 얼굴에 뭐가 묻었나. 볼을 만지작거렸다.
“한 번만 더 해줘.”
“뭘?”
“아까 했던 거.”
정국이 온 세상 밝음은 자기가 다 가진 것 마냥 해맑게 웃었다. 내 얼굴은 달아올랐다.
“뭐... 뭘 해!”
몇 배로 늘어난 창피함에 말까지 더듬었다. 말을 더듬었다는 사실에 또 민망해졌다.
“집에 갈까?”
정국이 돗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터는 시늉을 했다. 나는 끝까지 버틸 작정으로 돗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고개만 들어 그에게 말했다.
“진짜 갈 거야?”
“싫다는 거 억지로 시킬 생각 없어.”
“그래서 집에 간다고?”
“가기 싫으면 해줘.”
녀석은 다시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빨리 하라며 재촉까지 했다. 전정국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했다면 맥주를 확 얼굴에 쏟아버렸을 거다.
“한다고?”
녀석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는데 주인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았다. 말을 조금만 잘 들으면 정말 예뻐할 텐데. 그와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고 있자 괜히 막 심장이 또 뛰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집에서 그를 설득하려고 한 애교가 문제가 아니다.
“애교 말고.”
“안 한다고? 집에 가?”
“더 좋은 거줄게.”
“뭔데?”
대답 대신 내 입술을 쭉 내밀고는 그의 입술을 향해 돌진했다. 문제는 힘조절을 잘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었는지 입술이 세게 부딪혔다. 그러게 입술은 왜 그렇게 예뻐서 뽀뽀하고 싶게 만드냐고. 맞닿은 입술이 떨어지자 정국이 환하게 웃었다.
“짧다.”
내 쪽으로 다가온 정국이 코를 맞대며 말했다. 내 입술이 있는 아래로 시선을 둔 녀석의 눈빛이 다른 사람들도 다 있는 밖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지금은 늦은 밤이고 어둡고 사람들과 거리도 꽤나 있는 편이고.
“생각도 많아.”
말을 하며 그대로 입술을 맞부딪히는 녀석이었다. 깊지는 않지만 내가 한 뽀뽀처럼 짧지도 않았다. 가벼운 키스.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도 서로의 코는 한참을 붙어있었다. 그 상태로 바라보는 정국의 눈은 밤공기를 닮았다. 내 마음을 가볍게 만든.
“나머지는 집에 가서 하자.”
“나머지?”
“여기서 할 수는 없잖아.”
“뭘 더해. 집에 가려면 아직 멀었어.”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정국이 검지와 중지의 손톱으로 한 번 씩 내 볼을 톡톡 건드렸다. 또 시작하려는 잔소리에 그에게서 얼굴을 멀리했다. 그러자 정국은 다시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팔짱까지 꼈다. 그를 싫지 않은 눈으로 흘겨봤다. 내 시선을 분명 느낄 텐데 그는 정면만 주시했다. 옆에 있던 맥주캔 하나를 새로 땄다. 캔이 열리는 소리가 시원했다.
“크.”
맥주는 땄을 때 바로 먹어야 제 맛이지. 물방울이 맺혀있는 캔은 겉도 속도 전부 시원했다. 이제야 속이 뻥 뚫리네. 한 모금을 더 들이키며 정국을 슬쩍 보았다. 이게 독이라니, 악마도 별 거 아니네. 맥주를 못 마시니까 재미가 없을 수도 있지. 집에 가고 싶은 마음도 이해는 한다.
“그런 이유 아냐.”
“또 읽었어?”
“궁금하니까.”
나도 전정국 생각이 궁금한데. 나는 모르고 자기만 알고. 악마면 다야?
“알려줄게.”
“뭘?”
“지금 내 생각.”
“뭔데?”
“정여주랑 집에 가서 뭐할까. 어떻게 괴롭힐까. 그런 생각 중이야.”
“변태야!”
홧김에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쳤다. 정국이 맞은 옆구리를 손으로 감싸며 과장된 소리를 냈다. 짓궂은 농담이라는 걸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나오는 행동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뒤늦게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자 정국이 실실 웃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너.”
그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네가 좋다고.”
“......”
“지금 내 생각이야.”
말을 마친 그가 두 팔을 머리 뒤로 해 돗자리 위에 몸을 눕혔다. 기분이 좋아보였다. 나도 그를 따라서 돗자리에 누웠다. 밤하늘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제 물어도 돼?”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는 상태로 정국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편안한 분위기에 나른하게 답했다.
“뭘.”
“오늘 기분 전환이 필요했던 이유.”
“내 생각 안 읽었어?”
“그건 읽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름의 배려를 해 준 듯싶었다. 마음만 먹으면 내가 기분이 쳐져있던 이유는 쉽게 알아 낼 녀석이었으니까. 생각지 못한 그의 배려에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까만 배경으로 그의 옆선이 두드러졌다. 어디하나 안 예쁜 구석이 없네.
“말하기 싫어?”
“그냥, 별 거 아냐.”
묻어두기로 했다. 며칠 전 새벽에 창문으로 들어온 악마 이야기도 세나와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도. 유쾌하지 않은 주제로 지금의 우리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와 함께한다는 사실이 이미 말하지 않아도 지친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이대로가 좋다. 밤공기를 맡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오늘은 너무 행복한 소식도 많고 분량이 적기도 해서 구독료는 없앴습니다.
아마 내일 또 올 수 있을 것 같아요ㅎ
사랑합니다♥
W. 사프란(Spring Cr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