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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태풍이 휘몰아쳤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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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라니까요?”
아까부터 이 말만 몇 번 째인지.
“아가씨. 계속 이러면 아가씨가 잡혀가.”
“아니...”
말문이 막혔다. 내가 성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자 남자는 경찰서의 소파가 제 것인 마냥 편안한 자세로 앉아 날보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 아까 우리 집에 들어왔을 때도 저랬는데. 아직까지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질 않는다.
“진짜 아무도 없어요?”
“아가씨가 직접 보고도 몰라?”
“진짜 그럴 리가 없어요. 창문으로 들어왔다니까요?”
“아가씨, CCTV에는 아무것도 없어.”
“저 남자가 내 침대 위로 올라오기까지 했다니까요!!! 완전 현행범인데!!"
“아가씨 병원부터 가야하는 거 아냐?”
"아 진짜예요!!"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주거 침입에 강간 미수까지 확실한데 증거가 없다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CCTV는 비바람만 몰아치고 있을 뿐 사람의 형체라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창문으로 저 남자가 들어왔는데.
내 등 뒤로 그 남자가 뚜벅뚜벅 일정한 구두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팔짱을 낀 채로 내게 다가온 남자는 고개를 살며시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말했잖아. 나 악마라고.”
기가 차서 어이없는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확신했다. 경찰서 말고 정신병원부터 찾아가야 했다고. 나는 자리에 일어나서 그 남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가까이서 본 남자는 잡티 하나 없는 적당히 하얀 피부에 콧대는 찌를 듯이 높았고 입술은 도톰했다. 눈은 악마라기 보단 천사에 가까울 정도로 예뻤다. 생긴 게 딱 미소년 상이었다. 하나님께서 외모에 신경 쓰시느라 뇌를 덜 빚으신 게 분명했다. 자기가 악마라는 헛소리를 아까부터 지껄이는 걸 보면. 더 이상 경찰서에 있어봤자 내 속만 답답할 것 같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앞에 계신 경찰 아저씨께 미안한 마음보다는 이것도 하나 처리 못 해주냐는 짜증이 났지만 미안하다며 인사했다. 구십도로 숙여서 인사하지 않은 건 내 자존심에 대한 예의였다.
경찰서 밖으로 나가는 나를 남자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로 터덜터덜 따라왔다. 경찰서 문을 열자 쏟아지는 폭우에 그제야 깨달았다. 태풍.
이제 더 잃을 것도 없다 싶어서 욕을 내뱉었다.
“아 씨.”
“그건 뭐야?”
남자가 내게 물었다. 나보다 이십센치는 큰 것 같은 남자는 아까부터 날 계속 내려다봤다. 기분 나쁘게. 더 기분이 나쁜 건 날 빤히 본다는 거다. 노골적으로. 남자가 나를 볼 때면 왠지 모를 소름이 돋았다. 미소년같이 생겨서는 하는 행동은 그냥 변태 같다. 아니, 변태라기엔 아직 아무 짓도 안하긴 했다. 그래, 그냥 정신병자다. 아까는 경찰차를 타고 오느라 우산을 챙기지 못했으니 저 미친 듯이 내리는 비와 무섭게도 부는 바람을 뚫고 가야했다. 왜 하필 오늘 같은 날씨에 이런 일이. 그래도 난 선량한 시민이니까 저 정신병자를 병원까지 데려다주긴 해야 할 텐데.
“왜 대답 안 해.”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답은 무슨 대답. 지금 구급차를 불러야하나 고민 중인데. 오늘 경찰차도 타고 구급차도 타고. 내 인생에 다시는 없을 뭣 같은 날이다. 빌어먹을 천재지변까지 합세해서 더 완벽해졌다. 망할.
“아 씨. 그거 뭐냐고.”
방금 이 남자의 말로 한 가지 확신이 섰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알 수 없는 짜증이 났는데 이거였다. 생긴 건 나보다 어리게 생겨가지고 반말을 찍찍해댔다.
졸업할 나이가 되어서야 배운 걸 써먹는 건가. 그래, 내년이면 나도 인턴인데 한 번 해보자. 의대생 자존심을 걸고. 상담 치료를 하듯 남자를 다뤄보기로 마음먹었다.
“몇 살이야?”
“몰라.”
“몰라?”
“어. 천 살 이후로는 귀찮아서 세는 거 그만뒀어. 내 질문에 답이나 해.”
참자. 미래의 의사로서 이 정도는 참아야지. 상대는 과대망상증 환자야. 내년에는 소아과도 갈 테고 정신과도 갈 테고 진상들도 많이 만날 텐데. 연습한다고 생각하자. 환자한테는 항상 친절하게.
“그건 내가 잘못했어. 내가 하면 안 되는 말인데.”
“어쩐지 기분 나쁘더라.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긴. 지금 겁나 짜증난다는 뜻이지 이 미친놈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심호흡을 하며 참았다. 의료용 미소를 장착하며 내가 말했다. 그나저나 의료용 미소는 뭐냐. 어쨌든 웃으면서. 백화점 가면 직원들이 짓는 그런 고객님용 미소 말이다.
“그냥. 별 뜻 아냐.”
“인간.”
허... 아 진짜 돌겠네. 인간이라니. 나는 저 한마디로 확신했다. 저 남자는 망상 장애야. 핸드폰에 119를 눌렀다. 녀석이 턱으로 내 핸드폰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도 그걸로 불러내더니. 이번에도야?”
“조용히 좀 해봐.”
경찰서에서 구급차를 부르다니. 기가 막힌다. 구급차가 올 동안 기다려야 하니 엉덩이는 땅에 닿지 않게 무릎을 굽혀 앉았다. 녀석은 날 보고 물었다.
“거기로 다시 안돌아가?”
"어딜."
"집이랬나? 좀 전에 내가 찾아간 곳."
“거길 너랑 다시 간다고? 내가?"
"나랑 안가면 누구랑 갈건데."
"너 가족은 없어?”
“가족?”
“응. 부모님 안 계셔?”
내 말에 남자는 웃긴 듯 한참을 크게 웃었다. 내가 민망할 정도로 크게.
“오래 사니 별 말을 다 듣는 군.”
겉만 봐서는 내가 저보다 오 년은 더 산 것 같구만. 민망함에 검지를 들어 바닥에 아무 글자나 끄적였다. 천둥이 쳐대고 하늘이 번쩍 거렸다. 비는 여전히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고. 거센 바람에 나무들이 힘을 잃은 듯 휘청거렸다. 남자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하늘을 한 번 보며 말했다.
“이런 걸 지랄이라고 한다지?”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봤다. 날씨가 지랄 맞긴 한데. 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다시 나를 한 번 뚫어져라 보더니 가까이 다가와 몸을 숙여 내게 눈을 맞췄다. 또 뭘 하려고. 이 미친 인간아.
“다시 한 번만 더 묻는다.”
여기!! 과대망상증 아님 조현병, 하여튼 뭐든 정신병자 한 명 있어요!!! 라고 손을 흔들며 동네방네 떠들고 싶었다. 상대는 환자야. 환자. 숨을 들이 쉬며 학교에서 배운 걸 떠올려보려고 했다. 왜 하필 이럴 때만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는 건지. 에이플은 아니어도 에이마이너스는 받았는데. 날고 기는 의대에서 말이야. 내가 그래도 나름... 응?
입술에 무언가가 닿았다. 뇌가 새하얘지는 느낌이 이런 느낌인가. 빠르게 깜빡이는 내 눈에 보이는 건 남자였다. 남자의 감긴 눈이 보였으며 내 코는 남자의 높은 콧대와 맞닿아있었고. 입술은... 방금 떨어졌다.
“이래도 기억이 안나?”
머리가 멍해졌다. 뭐래는 거야.
“대답해.”
남자는 진지했다. 나도 진지했다. 저 멀리서 구급차 소리가 들리고 있었으니까. 이 과대망상증 환자를 피하지 않고 병원까지 가게 도와준 나 자신이 감격스러웠다. 그래, 환자인데 뭐. 입술 정도야. 두 손으로 입술을 막았다. 억울해. 입술 정도라니. 입술 정도가 아니고. 마음 한구석이 시려왔다. 내 앞의 과대망상증 환자는 여전히 진지해보였다. 어린 나이에 안타깝기도 하지. 얼른 완쾌해라. 녀석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정여주.”
엥? 방금 내가 뭘 잘못 들었나.
“기억해내.”
녀석이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눈에서 눈물이 맺혀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정도면 그냥 병원에서 탈출한 환자 같은데. 상태가 너무 심각한 거 아냐? 대체 어느 병원인지는 몰라도 지금 난리 났겠다. 이 환자 찾느라고. 달래는 게 우선인 듯해 녀석에게 맞춰 주기로 했다.
“기억나. 완전 기억나.”
“진심이야?”
“어, 다 기억나. 너가 아까 우리 집 창문으로 들어와서 내 위에 올라탄 것도 방금 우리 둘이 그.. 키로 시작하는 머시기 한 것도 전부 기억나. 누나는 다 기억나니까 걱정하지 말구 빨리 차부터 탈까?”
말을 마친 나는 비바람 속에서 힘겹게 내리시는 구급 대원 분들을 향해 오른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여기 환자요~!
“거짓말하지 마. 그거 말고.”
남자가 기척도 없이 내 옆으로 와 말했다.
“기억 난다니까아??”
날씨가 구려서 여기까지 오시기 힘든 건 알겠지만 구급 대원님들 제발 빨리 와주세요. 얘 눈빛 감당하기 힘들어요. 손을 더 힘껏 흔들었다. 손목이 꽉 잡혔다.
“기억나게 해줄게.”
남자는 내 손목을 잡은 채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런 게 죽을 맛인가. 표정 관리가 안 된 지는 오래 였다. 나는 얼굴을 구길 수 있는 최대한으로 구기고 있었다. 남자가 자길 보라는 듯 내 턱을 살포시 잡아 올렸다. 환자 분, 지금 썩어가는 제 표정이 보이지 않으세요?
“그래도 기억이 안 나면 우리 다시 시작하자.”
타사이트에서 연재했던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W. 사프란(Spring Cr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