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사고라도 난걸까.
이틀이 지나고 올 시간이 된 지 한 시간은 되었건만 차가 보이지를 않는다. 수연은 괜히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다리 옆에 내려둔 박스 하나를 계속 쳐다보다가 도로 저편을 보았다가 몇 번을 반복한다. "죄송합니다. 늦었네요."
시무룩한 얼굴에 걱정섞인 화를 내지도 못하고 반가움이 솟구쳤다. 수연은 주머니를 뒤적대는 뒷모습을 향해 저도 모르게 조그만치 다가가던 발걸음을 홱 돌아서는 움직임에 급하게 멈추고 물러섰다. 눈치 채지 못한듯 시선도 주지않고 짐칸 문을 여는 모습에 애가 타기 시작했다.
"도와줄까?" "괜찮아요."
괜찮다면서도 한번을 웃어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서운함까지 느꼈다. 묵묵히 포장한 박스들을 빼어 내놓는 태연을 눈으로 열심히 쫓는다.
"뭐하는거야, 저거 빨리 가져다 들여놓지 않고!"
조금 늦던 배달을 기다리다가 지쳐 게으름을 부리던 직원들은 점장의 불호령을 듣고 놀라 움직인다. 태연은 그런 수연을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이것들이 빠져가지고.."
태연은 멍하니 있다가 수첩을 꺼내들었다. 수연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봉투를 품 속에서 꺼낸다.
"또 이틀뒤에 오면 돼죠?" "으응."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 잠깐만."
수첩을 집어넣으면 차문을 열으려던 태연을 또 붙잡는다. 이거.. 수연이 하루 내내 달고 다니던 박스를 주워들어 태연에게 건넨다.
"뭐..에요?" "어, 핫팩."
어리둥절한 태연의 표정에 수연을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아, 그.. 그냥. 추운데 고생시키는거 같아서."
태연은 아.. 하는 작은 소리와 얼떨함에 상자를 받아들었다.
"흔들어서 주머니 속에 넣어놓고 있으면 엄청 따뜻해." "..감사합니다." "아냐." "또 올게요." "응. 가는거야?" "네.." "아.. 어디루?" "쫌만 가면 돼요." "아, 그렇구나." "네.. 그럼." "응. 조심해서 가. 내일 눈온대, 조심해. 알겠지?"
태연이 웃는다.
"네. 가볼게요."
냉동차가 발발 떠나가는데 수연은 아쉬운 마음에 계속 기웃거린다. 혹시나 자기가 한 걱정이 어이없고 웃겼을까봐 뒤늦게 밀려오는 민망함에 발을 동동거렸다.
- "이제 들어오는기가?" "네."
또 늦은 밤이 되어서야 건물로 들어서자 도축장 최 사장이 담배를 피우다 인사를 한다.
"아이고, 추운데 고생했다." "아니에요." "내일 눈온다니까 조심해라. 사고 윽수로 마이 난다잉. 운전 똑띠해라."
태연은 문득 기억난 사람 때문에 혼자서 피식 웃는다.
"웃고 다녀라. 이쁘다." "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니두."
태연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서랍 속에서 또 종이, 아니 사진을 꺼낸다. 엄지 손가락으로 사진 속 얼굴을 몇 번이고 쓸어본다.
"찾을 수 있겠지?" 사진을 보고 빙긋 웃어줬다. 저쪽도 그런 자신이 좋은지 웃어주는것만 같다. -
밤이 늦었다.
수연은 몇번이고 팔을 들었다 놨다, 잠을 못잔다. 계속 드는 걱정과 어린 그 사람 생각에 이불 위로 발을 얹었다가, 팽개치다가를 반복한다. 그 사람이 추운 냉동차 안에서 벌벌떨며 눈발 위를 아슬아슬 달릴 그림에 눈물이 핑 돈다. "그냥 동생 같잖아.."
혼자서 이건 작고 어린 그 사람 모습이 딱해서 느끼는 동정이라고 단정한다. 결국엔 집어들어 몇 자를 써내려 간다.
[아직도 배달하는거야? 연락이 왔는데 말이야. 일 끝나면 전화 좀 줄래?]
자신도 모르게 속임수를 써버리는것 같아 맘이 영 편하지가 않다. 물 한 모금으로 정신을 차리려 애써도 아리는 가슴은 도통 주체가 되질 않는다.
- -....... "여보세요?" -....네... "저.. 문자 남겨 놓으셔서요." -...... "여보세요?" -그, 어. 일단, 그.. "...." -광동!.. 광동 쪽 부터 찾아보겠대.. "아, 시작한거에요?" -으응. 근데, 너.. "네?" -이제 일 끝난거야? "네. 아, 너무 늦었죠? 내일 할까 하다가.. 연락이 왔다길래요." -아냐, 나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게.. 음.. "이제 끊을게요. 마저 주무세요. 오후에 봬요." -..그래. 잘자
태연은 전화를 끊고 가만히 생각했다. 몇 해 전에 떠난 사람을 이제서야 찾기 시작했다. 어쩌면 늦은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불법으로 사람 찾는 이 쪽이 어떤 바닥인지 돈 없이 뛰어든게 태연이었다. 치욕스러운 값을 내면서도 태연은 일을 시작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제야 기껏 모아진건 500 만원 만큼이였다. 입을것, 먹을것 그 어느것 하나 관심 없는 척 눈 돌린째 몇년이고, 그 사람 욕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온갖 시름을 놓지 않은지도 오래다. 이번엔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기다려온 그 사람, 공부를 하고 돈을 벌어 오겠다는 그 사람. 이제는 그 뒷꽁무니라도 겨우 찾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서야, 태연은 달빛 속에서 단잠을 잔다. -
아직 직원들도 채 출근을 모두 하지 않은 시간이었을 쯤, 냉동차가 도착했다. 수연은 깜짝 놀래고서 달려나갔다. 기다리던 그 사람이 잠에서 깬지 한참 된 모양으로 나타난다. 수연은 움츠러든 어깨를 안쓰런 눈결로 쳐다보았다. 그것도 잠시 둔한 저 사람이어도 행여 자신을 동정하여 건네는 눈빛이라 여기고 서러워 할까봐 괜히 고개를 돌려 큼큼댄다. "오늘도 꽤 일찍 왔네?"
이번에도 시덥잖은 농을 주고받을 줄 알았더니 건넨 사람 무색하게시리 반응이 없다. 늘 그랬던 것이었지만 오늘따라 표정이 유난히 뚝뚝한 탓에 괜히 맘이 동동거린다.
박스를 내려놓는 손길에도 시름이 뚝뚝 묻어나는것만 같아 저 사람의 움직임이 어서 느려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수연도 가슴께가 묵직해지긴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 있니?"
태연이 냉동차 뒷칸 자물쇠를 잠구려고 뒤척거릴 때 쯤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어린 사람이 묵묵하게 아뇨. 하고 대꾸를 한다. 그 말이 어떤 일 때문에 삶이 지독하다는 뜻 같아 맘이 놓이지가 않는다.
"그냥, 힘들어 보이길래."
늘 그랬듯이 봉투를 받아 쥐고 수첩을 열심히 끄적이더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입이 열린다.
"요새 주문이 많이 없어서요." "아..." "겨울이라 그런가봐요."
작게 말하고 민망한가 입을 씨익 올린다. 주변이 조용하지 않은 도심인데도 저 아이 작은 목소리가 귀에 턱턱 꽂힌다. 어쩐지 아까정 짐칸을 슬쩍 보았을 적에 짐이 몇 개 차있지 않았던 것 같아 괜시리 마음이 쓰인다. 그래도 그런 생각도 달고 사는구나, 싶어서 피식 웃음을 덜군다.
"가볼게요." "응, 저기." "네?" "담에 봐."
시덥잖은 인사를 던지자 태연이 저도 모르게 웃는게 어이가 없어 웃겼나보다. 뒤이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곤 차에 올라탄다.
맘이 뜨끈뜨끈하다. 차가 떠나가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실실 웃었다. 손으로 달아오르는 두 볼을 감싸 식혔다. 배꼽 근처가 살근거리며 간지럽다. 이런 것 느껴본 적이 꽤 된 것 같아 생소하면서도 좋아죽겠다. 수연은 만나는 사삿집 하는 자영업자 마다 도축장 최 사장 명함을 건네주고 돌아다녔다. 값도 괜찮고 뭣보다 품질이 최고급이라, 여기 고기 써보고 맛이 없다 하면 본인 가게를 팔아치우겠다는 둥, 온갖 말을 떠들고 다녔다. 한번 이용해 보겠다는 답을 듣고서 매번 떠오르는 그 작은 얼굴때문에 수연은 한없이 기뻤다. 이젠 세상이 떠밀어 놓은 시름을 조금은 덜고 웃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사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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