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퇴원했어요. 그분 집에 와있어요. 네. 걱정마세요."
잠에서 깨어나 바로 안부전화를 하고 멍한 태연에게 저녁을 가져다 내어준다. 챙기는 사람이 없으니 먹을 입맛도 없었는지 쓰러지듯 잠에 들어 눕혀뒀다가 깨자마자 부랴부랴 뎁혀온 것 이다. 어쩔 수 없는지 태연은 받아들고 가만히 있는다. "먹여줄까?"
그건 죽기보다 싫은 듯 태연이 죽을 떠먹는다. 수연은 괜시리 태연이 미워진다.
"중국에 사는 우리 화교만 해도 엄청난데, 지금 광동 쪽엔 아무래도 황씨 성 가진 여자 화교는 없나 봐. 이제 슬슬 넓혀 나가려는데, 선금 좀 빨리 보내달라고 난리야."
돈 얘기에 태연은 입맛이 뚝 달아나는 듯 수저를 내려놓는다.
"내일 바로 드릴게요." "일 나가게?" "나가야죠." "안돼. 좀만 더 쉬어." "안돼요." "너 스트레스 받았대." "알아요." "그러니까 쉬어, 좀만 더." "돈 달라고 방금 그랬잖아요." "......." "그 얘기 나한테 해놓고, 쉬라고 하는 건 무슨 심보에요?"
화낼 기운이 없는 듯 약한 목소리로 쏘아붇히자 수연도 되려 화가 난다.
"내가 대충 보내 놓을테니까, 더 쉬다가 나중에 갚아." "됬어요." "왜." "빚지면 안돼니까요." "왜이리 말을 안듣니?"
무어라 화를 내려다가 겨우 가라앉히는 얼굴이 생생하다. 숨을 들어마쉰 수연이 쟁반을 가져다 놓는다.
"죄송해요." "......" "얼마나 필요하대요?"
돈 얘기가 나오자 수연 혼자 달아올랐던 감정이 푸시시 식어버린다.
"선금이니까 일단 오백 정도. 그리고 다음 주 쯤 되면 또 보내달라고 할거야." "......" "그 때 쯤엔 사백 보내주고." ".....오백을 일단 보내야 한다구요?" "응."
태연의 표정이 아찔한 일을 앞둔 사람처럼 컴컴해진다.
"비싸네요." "해외잖니. 중국은 땅이 어마어마하게 커서 사람 찾는데두 돈이 몇배로 들구." "알아요, 아는데." "......." "그냥, 좀.." "돈을 얼마나 빌려갔길래?" "네?" "그 여자 말야. 얼마나 빌려갔는데?" ".....많이요." "왜?" "몰라요. 그 사람도 나한테 많이 빌려줬거든요." "서로 주고받은거야?"
서로 주고 받았다는게 돈인지, 마음인지. 알 길이 없다. 수연은 바보같이 눈치채지도 못하고 그냥 그래서 저 아이가 저리 절박하구나 하는 마음에 속이 쓰려왔다. 태연의 입술이 아쉬움에 열렸다 닫혔다. 느릿느릿 반복한다. 서로 죽고 못살았던 그때의 감정이 북받혔는지 눈을 꿈 감고 참아낸다. "박현호 사장이.." "..." "내가 그때 들었던 얘기로는.." "빨아줬어요."
태연 입에서 직접 나온 말에 수연은 얼어붙는다.
"뭐?"
덤덤하니 말했던 사람도 그것이 은근히 쓴물이 났던지 꿀꺽대며 안간힘을 쓴다.
"그렇게 하면.. 찾아준다고 해서요." 덤덤하게 말을 하는 표정이 아무것도 모른 채 당했던 일임을 말해준다.
수연의 두 손바닥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 몸뚱이를 일으키자 우득거리는 소리가 느껴진다. 어제 있었던 일 생각에 달뜬 한숨을 내뱉는다.
멍하니 쇼파에 앉아 눈동자를 이리 저리 굴렸다. 한창 정신없을 시간일 가게 생각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출근은 피할수가 없어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인기척이 없는 느낌에 놀라 활짝 열자 아무도 없는 텅 빈 침대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저 새하얀 침대가 그사람, 그리고 그 모든것을 생각나게 해 수연은 올라오는 끓음을 꾹 참고 방 안으로 발을 옮겼다. 협탁 옆에 작은 쪽지 하나가 얹어져 있었다. 종이를 보니 태연이 늘 가지고 다니던 수첩이다. [일이 급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돈은 내일 배달갈때 들고 갈게요. 어제 감사했습니다.]
무덤덤하게 전혀 어떤 고민도 하지 않고 휘갈겨 쓴 듯한 쪽편지 한장에 수연은 착잡했다. 자신에게 좋은 마음이 있어서 모진 소리를 들어가면서 가만히 있었던게 아니라 사람을 찾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했던 태연에게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아무 표정 없는 전 날 그 표정때문에. 수연은 종이를 꾸욱 쥐었다.
-
-한달동안 섬에 들어가있다는데. "한달?" -응. 탈북자가 아니더라구. 나이도 맞고. 매춘굴에서 일하는거 같던데. "...매춘굴?" -응. 보통 매춘굴도 아니고,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 많이 오는 그런데. "그럼 어떻게 되는거야?" -어떻게 되긴. 몸 성히 빼내오긴 힘들다, 이거지. "그.. 그럼.." -찾는게 우리가 할 일이니까. 빼내오는건 본인이 알아서 하라고 해. "그런게 어딨어. 그 여자가 뭘 할수 있다고." -어쩔 수가 없어. 대기업에서 스폰받고 있을지 누가 알아. "돈 주면 빼내올 수 있는거야?" -글쎄. 이미 짭짤하게 벌어쳐먹고 있을텐데 돈을 더 받아먹으려고 할까? "도둑놈들.." 나즈막이 욕을 내뱉어두고 전화를 승질스럽게 끊어버렸다.
솔직하게 말하여 수연은 태연이 찾는 사람이 여간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본인은 태연처럼 그리 둔한 사람도 아닐 뿐더러 근 삼십 년 세상을 살면서 풍족하리만큼 먹어본 것은 눈칫밥뿐이 없기에 그 아이는 무엇인가, 찾는 사람을 훠얼신 더 그리워 하고 있다는걸 내심 알아갈 수 있었다. 고년이 떼어먹어 간 돈이 몇이나 되길래, 태연은 고 밉살스러운 년을 얼마나 좋은 벗이라고 믿었기에, 저리 배신감에 가득차 사람을 보고파 하는지 슬슬 의뭉스러워 질때가 되었다. 황해 저 편에서 해온 말이라는 것이 황미영이라는 여자는 유곽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자그마해서 지도에도 잘 보이지 않는 섬에까지 출장을 드리날리 한다는것은 그 일을 적어도 몇 해는 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본인 직업이 생각해보이 너무 창피스러워서 별안간 연락을 뚝 끊어버렸던 걸까. 왜 저런 작은 친구를 그놈의 체면 생각에 내버려두는지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이 소식을 들으면 태연이 쌤통스러워 할지, 아님 속이 아파 들들 끓을지는 두고 봐야 알 것이다. -
"여기, 일단 500이에요. 더 필요하나요?"
얼마 전 처음 본 태연과 똑같다. 깨끗하고, 하얗다. 멍하니 정신을 놓고 쳐다보자 당혹스러운지 눈동자를 내리깐다. "아니, 근데.. 저." "네?" "우리 식사나 한번 해. 사과하고 싶은 것도 있고." "괜찮아요." "아니, 제대로 한번 사줘보고 싶어서 그래. 응?"
애처럼 졸라대는 투에 태연은 조금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 저 사람이 그럴리가 없다 믿어도 한켠으론 마음 접을 준비를 한다.
"그럴게요."
뭐가 그리 바쁜지 차문을 휑 닫고 출발한다. 이번에도 수연은 차의 뒷꽁무니를 눈으로 열심히 쫓는다.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괜히 입을 곱씹는다. 잘 말하면 저 여자도 포기하겠지. 그렇게 되면 본인 돈으로 저여자가 버렸을 지갑 속을 채워줘야겠다 생각했다. 남들이 괜한 오지랖 부려 사람 속 더 썩히지 말라고 말린다 해도 어쩔 수가 없다. 가는 맘이 이런식으로 밖에 생겨쳐먹지 않은 걸 어떻게 하냐, 이 말이다.
그래도 저 사람 마음 돌려세우기 위해 뭐라도 용 좀 써보자는 게 수연 생각이었다. 돈 떼어먹힌 사람이 눈에 뭐가 보이겠느냐만은, 수연은 잃고싶지가 않았다. 무얼 잃고싶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할 수 있는건 스무 살대 끝자락에 똑 나타난 복떵이라구 뿐이 못하는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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