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캠퍼스. 로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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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고등학생 때, 여자친구와 학교가 끝난 후 시내를 거닐며 시간을 때울 만한 곳을 찾다가 [고등학생 타로 3천원] 이라는 말에 홀린 듯 천막 안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연애, 학업, 재물 등 무엇에 대해 알고 싶냐는 물음에 별 생각 없이 학업이라고 말을 했다. 수많은 카드 속에서 3장을 뽑았고 다시 3장을 마저 뽑았다. 솔직히 말해 별다른 기대감은 없었다. 워낙에 이런 걸 잘 믿는 편이 아니었어서.
" 음~ 우리 남자친구는 공부 잘하나? "
" 못하지도 잘하지도 않아요. "
" 어디보자.. 카드보면 워낙에 한 우물만 파는 성격이네? 좀더 폭을 넓히고 하던대로 하면 내년 9월 말 쯤에 좋은 소식 있을 것 같아. "
" 아.. "
" 왜, 못미더워? "
" 에? 아뇨, 딱히.. "
" 그럼 한 장 더 뽑아봐. 우리 남자친구가 잘생겨서 좀 더 봐주게. "
머뭇거리자 옆에서 툭툭 건드리는 여자친구를 보며 하는 수 없이 카드를 한 장 더 뽑았다. 카드를 보던 여자는 ' 보니까 우리 자기는 뒷통수 맞기 딱 좋네. 조심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 하며 나를 보았다. 고작 카드 몇 장으로 나에 대해 느끼는 대로 툭툭 내뱉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타로집을 나오는 순간 까지도 ' 주변을 잘 살펴봐야해~ ' 라고 조언을 했다. 그때 당시엔 기분만 나쁘고 다시는 타로를 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28
[ 집중 안되면 잠깐 커피타임? -민형이- ]
고개를 들어보니 건너편 책상에 있던 민형이가 때마침 뒤돌아 나를 보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의자를 뒤로 빼며 일어났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학교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학교 도서관 열람실을 왔는데, 오늘은 민형이를 마주쳤다. 카페 대신에 자판기에서 파란 캔커피를 사서 도서관 앞을 걷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 저기, 민형아.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
" 뭔데요? "
" 그.. 내가 항상 커피 마실 때 카페 대신에 자판기 커피 마시는거... "
" 제가 너무 당연하게 자판기로 가서요? "
" 으, 응. 너는 다른 애들이랑은 카페 가잖아. "
" 학교에 있을 때 선배가 항상 이 캔커피를 마시더라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런가봐요. "
가끔 민형이를 보면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로 섬세하고 예리하다고 느꼈다. 평소 학교에 있을 때엔 다른 친구들과 카페에서 커피를 사먹던데, 나에게 먼저 커피를 마시자고 할 땐 항상 자판기를 찾아갔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은 절대로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인데.. 존경스럽고 대단하다. 나는 나 자신 조차도 아직 파악하지 못해서 내 마음 하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다니는데 말이다. 이번엔 민형이가 물었다.
" 저도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
" 응. 어떤거? "
" 유난히 이 커피를 좋아하는 이유요. "
" 아.. 그냥 난 이게 맛있더라고.. 라떼는 너무 달달하고, 아메리카노는 너무 쓰고. "
" 한 마디로 초딩 입맛이구나. "
" 에? 초딩은.. 커피 못마시잖아? "
내 말을 들은 민형이는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민형이를 보았다. ' 아, 죄송해요.. 근데 너무 웃겨서- ' 그러고 한참을 더 웃던 민형이는 사레가 걸렸는지 기침을 했다. 이게 그렇게 웃긴 말인가..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민형이는 이렇게 말했다.
" 순간 저를 보는 것 같아서.. "
" ....응? "
" 음, 제가 약간 뭐랄까.. 사람들이 답답해하는 성격이라서요. "
" 너가? "
" 네. 선배는 혹시 바다가 무슨 색이라 생각하세요? "
" ....음....... 글쎄, "
민형이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내가 보았던 바다들을. 발을 담그고 잔잔한 파도를 맞으며 두손 가득 바다를 퍼담아 보았을때를. ' 글쎄..? 바다는 투명하잖아. ' 민형이를 보며 말했다. 민형이는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오히려 표현하자면 까맣다고 생각해요. 필터를 씌운 사진이나 포토샵을 잔뜩 칠한 바다나 파란거죠. "
" 아아, 그러네. "
" 와, 제 말에 공감해주는 건 선배가 처음인 것 같은데요. 기분 되게 좋다. "
" 무슨 말이야 민형아, 애들이 너 말을 얼마나 잘 듣는데. "
" 그건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그러는거죠. "
" ..... "
" 바다를 파랗다고 하는 사람들 처럼 말이에요. 그 안에 깊숙한 곳엔 뭐가 있는지 모르잖아요. "
어쩌다 시작된 바다 이야기의 끝은 진지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민형이의 의외적인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민형이 말대로 나는 마냥 민형이를 과대니까, 당연히 사람들을 좋아하고, 밝고, 배려가 몸에 벤 그런 친구인 줄 알았다. 그리고 조금 부끄러워졌다. 나의 어느 한 면만 보고 판단했던 사람들에 진절머리가 나 이곳저곳 도망쳐 살아왔으면서. 내가 또 다시 누군가를 나만의 틀로 가둬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평범한 진리를 자꾸 까먹게 된다.
" 미안.. 사실 나도 너 말 듣기전까진 너를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었어. "
" 어떻게요? 저 진짜 궁금해요. "
" 뭐, 그냥 너는 과대니까 당연히 사람들이랑 두루두루 잘 지내고.. 어울리는거 좋아하고... 그렇게. "
" 과대는 어쩌다 된건데, 제가 잘 하고 있나봐요. 저도 제가 과대인게 사실 실감이 잘 안나요. "
어쩌면 민형이는.. 나는 생각에 잠기다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 무엇도, 혼자서 판단하려고 하지 말자고 해놓고선. 하지만 민형이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갈 수록, 민형이는 더더욱 베일에 스스로를 감추는 것 같다. 그래서 자꾸만 궁금해지는 것 같기도.. 한 번 불에 데이고 나서 뜨거운 것 근처에는 발도 딛지 않는 나처럼, 민형이도 나와 비슷한 면이 조금은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든 순간이다.
" 이만 들어갈까요? "
" 그래. 덕분에 잠도 다 깼어. "
" 다시 열공해요. "
그렇게 민형이와 헤어지고 잠시 화장실을 가려 열람실에 들어가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 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 어라, 진짜 김여주 맞네. "
" .... "
" 뭐야, 너무 안반가운 티 내는거 아니야? 좀 섭섭한데. "
" ㅇ...ㅅ.. 안녕..하세요. "
" 시험기간이라 공부하고 있는거야? "
" ...네. "
" 잠깐이면 되는데 얘기좀 할까?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
" 야, 한참 찾았잖아. "
어쩌다 이런데서 마주치게 된건지. 민수선배를 본 순간 내가 있는 시공간이 뒤틀려지는 것 처럼 보였고, 속이 울렁거렸다. 귀에선 삐-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고 또 어딘가로 나를 데려가려 하는 선배의 말에 몸만 바들바들 떨 뿐,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내 팔을 잡아끄는 손길에 숨이 막힐 뻔한 순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 ㄱ, 경민아. ' 경민이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이끌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얼떨결에 뒤를 돌았을 때, 선배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열람실에서 부터 완전히 떨어진 반대건물에 도착해서야 경민이는 나를 놔주었다.
" 아직도 얼빠진 표정으로 그러고 있냐. "
" ....고.. 마워. "
" 난 담배필거야, 너 담배 냄새 싫어하지. 얼른 돌아가. 또 그러고 있으면 이번에도 도와줄거라고 장담은 못한다. "
" .... "
건물 밖으로 나가려던 경민이를 계속 바라보았다. 경민이는 한숨을 쉬더니 ' 바람쐬러 같이 가던가. ' 하며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말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 돌계단에 걸터 앉은 경민이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나도 앉았다.
" 어떻게 넌 변한게 하나도 없냐. "
" ..너도야. "
" 그런가. 그런데 김정우는 좀 변했어. "
" ..... "
" 그 새끼 진짜 이상해졌어. 여자애같이 굴더라니깐. "
" ..정우가? "
경민이는 나에게 연기가 가지 않도록 반대쪽으로 고개를 틀며 계속 얘기를 이어나갔다. 운명은 만들어가는 거라며 타로나 사주, 점을 욕하고 다녔던 애가 이제는 틈만 나면 그런데를 쏘다니고, 메신저로 슬픈 영상을 공유하고, 그토록 싫어하던 애기들만 보면 한참을 그 자리를 못 벗어나더라.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가던 경민이는 이야기를 마치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저 밑으로 쭉 나있는 계단을 바라볼 뿐이었다. 경민이 말만 들으면 정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 너 몇 번 마주치지 않았어? 김정우랑. "
" ...많이는 아니고.. 그냥... 오다가다.. "
" 너도 아직 다 못잊은것 같은데, 내 말 틀려? "
고개를 들어 경민이를 보았다. 어느새 막대사탕을 물고있는 경민이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아무런 말도 않았다. ' 말이 없는거보면, 내 말이 틀리지 않았네. ' 그 말에도 나는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아직까지도 경민이의 말만 들어도 정우의 모습을 모두 상상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자세하게. 어떻게 완전히 잊을 수가 있을까.
' 나도 다 잊을게, 그러니까 너도 그냥 다 잊어. 그러자 우리. '
' 넌, 넌 진짜로 다 잊은거야? 그럴 수가 있어? '
정우는 정말 달라졌다. 처음 내게 헤어지자고 했을 땐 모두 다 잊자고 해놓고선, 얼마전 집 앞에 무작정 찾아왔을 땐 내게 정말로 다 잊은것이냐며,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런 정우가 싫다거나 짜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이 아팠다. 내가 알던 정우는 정말 작은 부분에 불과했단 걸 알았을 뿐이었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갈피를 못 잡고 헤매고 있는 건 정우일 것이다. 그런 정우에게 경민이는 꼭 필요한 친구다. 경민이가 있어 그나마 마음이 편할 수 있다.
" 김여주, 넌 진짜 똑똑하고.. 사실 여러 면에서 존경스럽기도 하거든. "
" .... "
" 근데 가끔 보면 답답해. 정말로 쉬운 길인데, 쉬운 길도 꼭 돌아가려 하더라고. "
" .... "
" 그 일이 있고나서부터 말이야. 그래서 답답해. 자꾸 스스로 너를 그 일에 가둬놓은채로 사는 것 같아서. "
자리에서 일어난 경민이는 내 앞으로 와서 손을 내밀었다. ' 고마워. ' 경민이의 손을 잡고 일어나 말했다. 그 말에 경민이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 오글거리게 왜 그래. ' 그러고나서 열람실 앞까지 나를 바래다 주고 다시 갈 길을 갔다. 나는 왠지 자리에 돌아와서 공부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그만 가방을 챙기고 열람실을 다시 나왔다. 가다가 타코야끼나 사서 들어갈까. 하면서. 하지만 얼마 못가 익숙한 뒷모습에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말았다. 경민이와 정우였다. 경민이가 먼저 뒤를 돌아보았다.
" 야- 뭐야, 김여주. 애써 열람실까지 데려다줬더니 다시 나왔네. "
" ....어.. "
" 어디 가게. 집 가? "
" 아, 응. "
경민이는 나와 정우를 번갈아보다가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결국엔 ' 난 애들이 술먹자 그래서 먼저 간다. ' 하며 빠르게 사라졌다. 정우는 어색한 듯 나를 보다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입을 열려고 하는데, 정우 목소리가 들려왔다.
" 우.. 우리도 한 잔 할래? "
" ...어? "
" 아, 아니야. 시험기간이지. 집 데려다줄게. 가자. "
" 아.. 응. "
얼떨결에 집에 데려다 준다는 말에 응이라 해버렸다. 사실 한 잔 하자는 질문에 적잖이 충격을 받아 그랬는지도 모른다.
더 캠퍼스 로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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