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w. lucid dream
**
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이게 며칠째인지.
이제 좀 갤만하다 싶으면 다시 흐려지고 또 비가오고, 또 비가 멎었다 싶으면 어김없이 다시 먹구름이 몰려오고.
맑게 갠 하늘이 이제 가물가물 해진다. 따사로운 햇살을 맞아본지가 언젠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아 짜증나. 새삼스럽게 날씨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으며 신경질을 낸다. 런던의 날씨가 이렇다는 건 벌써 2년째 겪어와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 인정하자. 지금 짜증이 난 건 날씨 때문이 아니란걸. 애꿎은 날씨에 화풀이를 하고 있는 거란걸.
.
.
진로를 미술 쪽으로 정한 뒤 나는 정말 쉴 새 없이 그림을 그려왔고, 앞만 보고 계속 달려왔다.
다른 친구들이 예쁘게 꾸미고 남자친구를 만나고 재밌게 놀러다니던 때 나는 학교가 아니면 집안에 갇혀 붓질만 반복하고 반복하고..
그렇게 붓 하나에 모든 것을 올인하던 때, 나도 다른사람들과 다름없이 슬럼프란 것이 찾아왔다.
계속해서 포기와 좌절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찾아왔다.
예술을 하면 정말 미친다더니 그림을 그리다 말고 캔버스를 갈기갈기 찢어버린다거나 도구들을 전부 쓸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다던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상이란 진상은 다 부려봤다.
하지만 그럴 수록 손해 보는 것은 나였다. 내가 부리던 진상들은 전부 현실을 외면하고자 하는 짓들이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하던 나의 어리석었던 어린시절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슬럼프를 극복하지 못하고 주눅들어 가고 있던 때
나는 유학을 결심했다.
항상 같은 거리, 매일 보는 사람들, 매일 먹는 음식들, 매일 반복되는 일상들.
지금 생각해보면 전부 변명에 지나지 않지만 그 때는 미술을 하는 나에게 이런 생활에서는 영감이 찾아올래야 찾아 올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기적인 나는 집안이 넉넉치 않다는 걸 알았지만 부모님이 지금까지 내 수발으로도 힘드셨다는 걸 알지만 부모님께 내 생각을 말씀드렸다.
역시 부모님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셨고 어렸던 나는 그런 부모님을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며 온갖 신경질을 부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시 돌아가서 그런 내 입을 꿰매버리고 싶다. 못된 년
내가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은 후 며칠동안 부모님의 방 불은 밤늦게까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
전부 내 일 때문에 서로 머리를 맞대시고 고민을 하시는 것 같았다.
푹푹 내쉬는 깊은 한숨소리가 내 가슴을 찔렀었지만 내 앞길이 우선이었던 못된 나는 일부러 못들은 척하고 못본 척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부모님은 나를 방안으로 부르시더니 통장하나를 내게 내미셨다.
유학 가라. 무뚝뚝하시던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그 말 한마디에 그 동안의 모든 죄송함과 감사함이 밀려와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제가 잘할게요. 제가 호강시켜드릴게요. 부모님 앞에서 바닥에 엎드려 추하게 꺽꺽 숨이 넘어가도록 울어재꼈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토닥이시며 아무 말씀도 않으셨다.
내 생각으로는 유학보다는 그 일이 내 슬럼프를 극복하게 된 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 많고 많은 나라 중에 왜 굳이 런던을 선택했냐고 하면 나에게 영감을 주는 아름다운 경치 때문일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유럽에 대한 그것도 특히 영국에 대한 로망이 컸었고 텔레비전에서 비춰주는 아름다운 경치들은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다른 곳을 선택하는 게 더 낫지 않냐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런던으로 가겠다는 내 굳은 심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꺾이지 않았고, 기어코 나는 런던행 비행기로 올라탔다.
그리고 런던에서 생활한지도 햇수로 2년이 되어가는 지금. 가끔씩 경험하게 되는 인종차별문제 빼고는 불편한 것 없이 어느 새 또다른 나의 고향이 된 것마냥 익숙해졌다.
처음 유학왔을 땐 입에 맞지 않은 음식, 타국에서 느끼는 위축감,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혼자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우는 날이 많았었다.
지금은 뭐 현지인이 다 되어버려 친구들에게 여기서 태어났냐는 우스갯소리도 들을 정도다.
지금 나는 런던 외곽에 있는 조그마한 원룸에서 살고 있다. 처음 방을 구하러 다녔을 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난 집세에 놀라 노숙할까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다 정말 도시에서 동떨어진 곳에서 그나마 적당한 값에 방을 찾아냈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나는 당장 그 집으로 계약했다.
집 자체는 괜찮았다. 새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내가 영드로만 보던 예쁜 빌라.
깨끗한 복도 양 옆 일정한 간격으로 서있는 방문마다 번호가 붙어있는 별다른 문제 없어보이는 평범한 원룸. 그 안도 깔끔하니 하자 없이 멀쩡했다.
하지만 문제는 집 근처 환경에 있었다.
" 꺄아- 간지러워요- "
밤마다 들려오는 콧소리 섞인 여자들의 목소리. 그리고 술에 잔뜩 쩔은 술주정뱅이들의 싸움소리.
집 근처 빼곡히 들어선 술집과 사창가. 밤이면 반짝반짝 빛나는 네온사인 그리고 화장품을 뒤집어쓴 몸을 파는 매춘부들이 거리를 가득 채운다.
밤마다 서로 엉겨붙어 걸어가며 물고,빨고,핥고 아주 못 봐줄 지경이다. 밤마다 이런 더러운 광경때문에 집 밖을 나서질 못한다.
게다가 담배연기와 화장품,독한 향수 냄새 때문에 조금만이라도 집 앞을 거닐면 목이 따끔거리고 머리가 띵해진다.
이 집에서 환기는 무슨.. 창문을 열면 오히려 더 집안 공기가 오염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쾌쾌한 공기는 기본옵션이거니와 쓰레기로 가득찬 더러운 거리, 길고양이들, 또는 사랑을 나누려는 남녀의 아지트가 되어버린 더럽고 축축한 뒷골목.
이 동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라곤 이런 것들 뿐이었다.
그래. 인간적으로 집값이 너무 싸다 했다. 이런 빅엿이 집 근처에 도사리고 있으니 그 집값이 아닌 이상 팔릴리가.
이런 유익한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동네에서도 유일하게 멀쩡하고 건전해 보이는 건물이 우리 빌라를 제외하고 딱 두 곳이 있다.
우리 빌라에서 다섯블럭 정도 걸어가면 술집과 그나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갤러리,
그리고 우리 빌라 건물 1층에 자리잡은 카페.
이 동네에 그 두 곳의 건물들은 합성한 듯이 어울리지 않았고 따로 둥둥 떠다니는 듯한 이질감을 줬다.
맨 처음 빌라에 입주를 하고 그 곳들을 보았을 때 솔직히 속으로 비웃었다. 장사가 될거라고 여기다 자리잡았을까.
아니지. 어쩌면 저곳들도 이 동네랑 다를 것없이 저급하고 저질스러운 곳일 수도 있지. 이런 생각때문에 입주를 한 뒤로 몇개월 동안은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깥환경이 환경인지라 스케쥴이 없는 날이면 집안에 꼼짝않고 있었더니 온몸에 좀이 쑤실 것 같았던 나는 결국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입주를 한지 3개월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갤러리와 카페에 발을 들여놓았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나는..아! 너무 오랫동안 옛날 생각에 잠겼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큰일났다.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시계를 쳐다봤다가 시침이 8에 가까워지는 것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옷걸이에 걸린 외투하나를 대충 걸치고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철컥. 열쇠를 열쇠구멍에서 빼내 주머니에 잘 집어넣은 뒤 문이 잘 잠겼나 두어번 정도 문을 흔들었다.
살짝 덜컹거리는 문이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빌라 안까지 설마 누가 들어오겠냐 싶어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조금 서두르는 발걸음으로 계단 쪽으로 향했다.
바로 그 때
"..? "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계단층 때문에 아랫층에서 누가 올라오고 있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린다.
타박타박. 물 젖지 않은 발자국소리가 점점 커진다.
꿀꺽. 목에 침넘어가는 소리가 내 귓가에 생생히 들린다.
그래봤자 분명 빌라 사람일텐데 항상 이런 상황이면 긴장해서 몸이 뻣뻣이 굳는다. 그래.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
이런 내 자신이 너무 우스워 하지만 그 와중에도 속은 바짝 긴장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발자국소리는 점점 커져왔고 어느 새 그 사람과 나는 한 층만을 사이에 두고 있다.
긴장하지마. 멍청아. 찌질하게 왜 쫄고 그래.
점점 느려지는 발걸음에 겁많은 내 자신을 혼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 ..어?.."
" .. "
" 아..안녕하세요.."
".. 네 "
뭐야. 괜히 쫄았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며 어색한 인사를 건넨다.
윗층으로 올라오고 있던 사람은 다름아닌 내 옆 집에 사시는 그리고 아까 말했던 우리 빌라 1층의 카페를 운영하고 계시는 택운씨다.
지금까지 여러번 카페에 들리기도 하고, 옆집이니 몇번 마주치기도 했지만 워낙 말수도 없고 숫기도 없는 사람이라 아직까지 친해지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 같은 한국인을 만나 외로움을 좀 덜을수 있을까 해서 처음엔 엄청 반가워했지만, 택운씨 성격때문에 외로운건 마찬가지였다.
택운 씨와 마주치면 괜히 나까지 말수가 없어지고 어색해진다.
게다가 택운씨가 풍기는 특유의 무거운 분위기와 살벌한 눈빛이 그의 앞에만 서면 조금 위축되고 긴장하게 만들었다.
" ..오늘 빌라에 사람 아무도 없데요 "
그런 택운씨가 이제는 조금 마음을 열지 않았을까 싶어 내 옆을 지나가는 택운씨에게 일부러 미소를 지으며 싹싹하게 말도 붙여봤지만
네. 한 마디와 함게 택운씨는 제 갈길 가기에 바빴다.
쳇. 하여간 비싸. 이미 저 위로 자취를 감춰버린 택운씨를 확인하고 나서야 혼자 중얼중얼 투정을 늘어놨다. 무섭긴 무서우니까...
커피가 맛있으니까 봐준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아래에서 더 이상 올라오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나는 그제서야 맘을 놓고 편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
저 왔어요! 활기차게 딸랑 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선배가
".. 없네?.."
없었다.
" 뭐야..8시까지 오래놓고.."
약속시간을 정해놓고 늦지말라고 당부했던 사람이 누군데. 반겨주는 선배가 없자 왠지 입이 절로 쭉 나온다.
못난 표정으로 투덜거리면서 터덜터덜 로비 중앙으로 걸어가 혹시나 하고 선배를 더 큰 목소리로 불러본다. 선배.
하지만 선배는 잠시 어디 나갔는지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곧 돌아오겠지 하며 로비 중앙에 있는 테이블 의자를 빼 앉자 테이블 위에는 끓인 지 꽤 되보이는 식어있는 차 두잔을 발견했다. 두 잔 다 거의 반쯤 비워져 있는 상태다.
뭐야. 손님왔다갔나? 어깨를 으쓱거리며 식은지 한참 되보이는 찻잔을 들어올려 향을 맡았다. 뭐 하도 진한 차 향 때문에 조금만 가까이대도 알 수 있었다.
장미차네. 선배가 좋아하는 거.
찻잔을 다시 조심스럽게 찻접시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서도 가만히 앉아있었는데 여기서까지 가만히 앉아있자니 온 몸에 좀이 쑤셔서 말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 온지 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느 새 그림 몇점이 바뀌어 있다. 예쁘다. 아름다운 색감에 감탄하며 바뀐 그림을 찬찬히 감상한다.
그래. 여기는 갤러리다. 내가 말한 이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건물 중 하나인 갤러리.
그림을 전공하는 이유 뿐만이 아니라, 집 근처 환경을 보아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내게 이 곳은 거의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 듯 드다드는 곳이 되었고,
게다가 여기 주인인 사람은
" 어? 별빛이 왔어? "
나와 같은 한국인이었다.
" 재환 선배! 어디 갔다 오셨어요! "
재환선배와 나는 나이대도 비슷한데다가 같은 미술전공이라 우리는 금새 친해질 수 있었다.
선배는 짬짬히 그림을 그리면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었고 재환선배의 그림실력은 모두가 인정해 내 롤모델이기도 하다.
집은 이 근처가 아니라 좀 더 도심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특별한 이유 때문에 선배는 여기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그 특별한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자.
선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우산을 접어 우산꽂이에 집어넣고는 머리에 뭍은 빗물을 탈탈 털어낸다.
그리고 어디갔다오냐는 내말에 웃으며 대답한다.
" 손님이 뭘 좀 두고 가셨길래 갖다드리고 왔어. "
아 그랬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했고 재환선배 근처로 가 장난스럽게 물기를 털어주는 척을 했다.
그러자 선배는 어이없다는 듯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가 내 머리를 살짝 밀고 까불지마. 장난스럽게 말한다.
나 또한 거기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뒤 잠시만 기다리세요. 갤러리 안쪽 선배가 사용하는 작은 방에 들어가 수건을 가져다 준다.
선배는 고맙다는 듯이 살짝 눈웃음을 지었고 수건으로 물기를 탈탈 털어낸 뒤 내게 말한다.
" 테이블에 앉아있어. 차 끓여줄게. "
" 네 - "
잠시 뒤 커피포트가 삑삑 울어대는 소리가 난 뒤
쪼르르 익숙한 소리와 함께 갤러리 안은 진한 장미차 향으로 가득 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