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의 햇살은 애석하게도 끝내주게 따뜻했다. 한손엔 도시락, 한손엔 여자 친구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데이트를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이런 날에 대한민국 고삼인 나는 한 손엔 문제집, 한 손엔 펜을 붙잡고 그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뻑킹 고삼. 어차피 데이트 할 여친 따위도 없긴 했지만, 남들 다 쉰다는 이런 날에 학교에 틀어박혀 그저 좋은 날씨를 감상만 하고 있다는 사실이 진저리나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감독은 안하면서 출석체크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는 선생님들 탓에 배짱 좋게 농땡이 한 번 부려보지 못하고 얄짤없이 토요일마저 학교에 나와야만 했다. 그러니까 진짜, 고삼 뻑킹. 지루하게 흘러가는 자습시간 내내 잠도 오질 않아 멍하게 문제집만 쳐다보다 종이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어차피 가방에 든 거라고 해봤자 문제집과 문제집과 문제집 뿐이었지만. 필통까지 꼼꼼하게 닫아 가방에 쑤셔 넣고는 제일 먼저 교실 문을 빠져 나옴과 동시에 한숨이 터졌다. 아무리 내가 고3이라고는 하지만, 토요일 오후까지 이게 무슨 개고생이람.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누르기 위해 올려다본 하늘이 쓸데없이 맑아 다시 궁시렁 궁시렁 욕을 해대며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평소엔 딱히 좋을 것도 없는 집이지만 토요일 오후만큼은 꿀 같은 휴식처였다.
아파트 단지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니 뭐때문인지 사람도 짐도 대거로 쌓여 북적거렸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 이사라도 오는 듯 이삿짐이 한가득 이였다. 저 수많은 짐들과 사람들 사이에 끼여 집까지 가기엔 민폐도 민폐겠거니와 낑겨있는 동안이 너무 버거울 것 같아 계단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기껏 해봐야 8층, 평소에야 귀찮아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닌다 치지만, 건장한 19세 청소년이 걸어 올라가기엔 적합하, 기는 개뿔 존나 문제집 시발. 가방에 한가득인 문제집 덕분에 자꾸 뒤로 무게중심이 쏠려 뇌진탕으로 응급실에 실려 갈 위기를 몇 번이고 마주한 후에야 도착한 내 집 앞엔 1층에서 봤던 이삿짐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무거운 책가방을 매고 중력과 싸우며 계단을 올라와야 했던 이유인 사람이 내 집 맞은편에 들어온다는 얘기였다.
어차피 우리 층에 내릴 거였으면 낑겨죽더라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는 건데, 하는 일말의 후회와 어떤 놈이기에 나를 중력과 싸우게 만들었나, 하는 궁금증이 뒤섞일 때쯤 뒤쪽에서 다급하게 잠깐만!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자마자 박을 듯이 돌진해오는 박스에 당황하며 겨우 몸을 옆으로 피하자 꽤 무거워 보이는 박스를 바닥에 철푸덕, 내려놓곤 숨을 몰아쉬는 정장 차림의 남자가 있었다. 이사할 때 웬 정장? 또라인가. 인상을 찌푸린 채 땀을 닦고 박스를 발로 밀어 휘적휘적 제 집 문 앞으로 당겨놓는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고개를 홱 돌리곤 입꼬리를 올려 웃는 게 퍽이나 해맑았다. 그래봤자 남자지만.
"안녕?" "...?" "어유, 생긴 거랑 다르게 되게 시크 하네. 고등학생? 몇 학년?" "...3학년인데요," "고3? 아, 어쩐지. 토요일인데 교복을 입고 있다 했네." "...네," "원래 낯가려?"
아니 그냥 널 가려요. 목 끝까지 울컥 올라온 말을 애써 집어 삼키며 어색하게 웃어보이자 덩달아 웃는데 진짜 웃는 건 국보급으로 예쁘고 화사했다. 어차피 남자지만. 사실 어디 가서 낯가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정장차림으로 이삿짐을 나르는 남자라면 충분히 꺼려질 만 했다. 심지어 넥타이도 매고 있다. 존나 개또라이. 그냥 무시하고 집에 들어가면 되는데 왠지 모르게 그냥 멍때리고 쳐다보게 되는 또라이, 아니 이사 온 앞집 남자의 모습에 자리에 서서 가만히 있자 자기도 어색하긴 한지 허허, 하며 웃더니 본격적으로 내 호구조사에 나섰다. 그래, 원래 할 말이 없을 땐 호구조사가 적절한 법이긴 했다.
"어, 그래...이름이 뭐니?" "...박효신이요." "오, 야 너 이름 멋있다. 난 홍빈이야, 이홍빈." "아저씨도 이름, 멋있긴 해요." "아저ㅆ...야, 너무한 거 아냐? 내가 그렇게 늙어보여? 아직 창창한 20대야 나..." "전 10대라서요." "...너 쎄다."
당황한 듯 또 다시 허허, 하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던 남자가 여전히 엘리베이터를 통해 운반되고 있는 짐들에 한숨을 쉬며 옆에 있는 박스에 주저앉았다. 웬만하면 집안으로 짐을 가지고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그럴 생각이 없는 건지 그저 셔츠만 펄럭이며 더위를 식힐 뿐이었다. 아니, 그전에 넥타이부터 좀 풀라고. 생각 없이 내뱉을 뻔 한 말을 집어 삼키고 왜 시간낭비하며 그렇게 죽치고 앉아있으냐는 듯한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자 남자가 내가 여자였다면 심장에 무리가 갈만큼 화사한 웃음으로 왜? 나 좀 잘생겼어? 하는 되도 않는 헛소리를 신랄하게 떠들어댔다. 어이가 없어 한숨 쉬듯 웃자 알아, 나 잘생긴 거. 피곤하지.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존나 내심정은 왜 네가 표현하고 지랄이세요.
"안 들어가세요?" "어? 아아-, 아직 집열쇠를 못 받았거든." "아...예, 수고하세요 그럼." "그렇게 매정하게 뒤도는 거 아니야 효신아."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야. 인상을 찌푸리며 뒤돌아보자 여전히 얄미울 정도로 해맑게 웃는 얼굴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솔직히 호감형 얼굴이긴 했다. 어딜 가든, 누가됐든 처음 마주했을 때 꺼려지는 느낌을 받을 외모는 아니었다. 물론 잘 갖춰진 정장차림으로 이삿짐을 나르는 장면을 봤을 때만 제외한다면. 왠지 모르게 저 미소에 넘어가면 지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최대한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니, 화사하게 웃던 얼굴이 조금은 진지해져서 날 쳐다보았다. 자꾸 마주치는 시선이 불편해 옆쪽으로 눈을 옮기면 쓸데없이 끈질기게 다시 따라붙어 눈을 마주했다. 신경전도 아닌 별 의미도 없는 쫒고 쫒기는 눈싸움이 지겨워질 쯤 아래층 계단에서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홍빈씨?" "...아, 네!" "열쇠 드리러 왔어요. 일찍 온다고 왔는데 조금 늦었네요, 죄송해요." "아유, 아니에요- 아직 짐도 다 안 올라 왔는데요, 뭐."
다시 화사하게 접히는 눈을 보며 슬금슬금 발걸음을 뒤로해 재빠르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뒤에서 야, 어디가! 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고 문을 닫았다. 방금까지 누군가와 마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할 만큼 지독하게 조용한 집안으로 들어서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언제 느껴도 적응이 안 되는 싸늘함이 괜히 짜증나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사실, 누군가와 이렇게 오랫동안 대화를 해본 게 오랜만이긴 했다. 지방출장이 잦은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살기 시작한지도 3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학교에선 다들 공부에 치여 사느라 누구 하나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와 대화다운 대화를 한 듯싶었다. 대학진학얘기로 선생님이랑 하루 종일 머리 붙잡고 끙끙대는 상담도 아니고, 모의고사가 끝나고 반 친구들과 답을 맞춰보는 것도 아닌, 정말 그냥 평범하고 누구나 할 법한 대화를 나눈 기분이었다. 괜히 웃음이 새어나와 피식거리며 웃다가 제정신이 들어 밥이나 먹을 생각으로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은 또 뭘 해먹어야 하나, 이리저리 냉장고며 찬장을 뒤적이는데 띵동, 경쾌하게 초인종이 울렸다. 그러고 보니 초인종 소리도 오랜만에 듣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구세요?" "저기, 박효신씨? 안에 계세요?"
앞집 또라이 목소리였다. 이 아저씨는 저걸 지금 목소리 변조라고 하고 있는 건가?
"네, 있는데 왜요. 이홍빈 아저씨." "...티나?" "네, 많이요." "크흠, 저기, 그, 문 좀..열어줘." "왜요." "아, 일단 열어줘봐."
일단 열어달라는 그 말이 꽤나 의심스럽기도 하고, 이사 온 앞집 남자가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덜컥 문을 열어주기가 꺼려져 대답도 않은 채 멀뚱히 서있기만 하자 인터폰 너머로 한 번 만... 하는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건 좀 별로지만 생긴 거하며 웃는 거하며, 남에게 해 끼칠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한참 후에도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직접 현관으로 가 문을 여니, 환하게 웃으며 손에는 플라스틱 접시에 담긴 떡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옷차림은 여전히 정장 그대로였다.
"이사올 땐 원래 이런 거 하는 거라며? 자, 먹어." "...요즘은 이런 거 잘 안하는데," "그래? 음..떡 별로 안 좋아해?" "아뇨, 그런건 아닌데," "그럼 그냥 먹어. 자-"
건네주는 접시를 받으니 앞으로 잘 부탁해, 하며 불쑥 손을 내미는 것에 얼떨결에 손을 맞잡고 악수를 했다. 우리 앞으로 자주 보자! 하는 경쾌한 말에 굳이 뭘, 하며 뚱하게 반응하니 그저 재밌다는듯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아, 너 진짜 귀엽다." "...네?" "친해져야겠어, 너랑." "전 딱히 그럴 생각이," "앞으로 형이랑 많이 좀 놀아줘, 알겠지?" "저 바빠요." "응, 나도 바빠. 서로 안바쁠때 놀면 되지, 그치?" "아니, 굳이 그렇게," "잘 들어가, 효신아. 어여 들어가. 응, 그래, 옳지,"
어떻게든 싫다는 의사를 표현하려는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등을 떠밀며 집안으로 몰아넣은 또라이가, 아니..그러니까, 아저씨가, 현관 안쪽으로 들어서서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는 내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빠빠이. 답지 않게 귀여운 인사와 함께 살포시 닫히는 집문을 바라보다,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끅끅 대며 웃었다. 정장을 갖춰 입고 이삿짐을 옮기질 않나, 이상한 소리만 해대질 않나, 정말 또라인가 했더니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구나 싶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재빨리 달려가 현관문을 소리 나게 열자 이제 막 본인의 집으로 들어서려던 아저씨가 눈을 크게 뜨고 날 돌아본다.
"저기요, 아저씨," "응, 왜? 벌써 나랑 놀고 싶어졌어?" "아뇨,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응? 뭔데??"
무언가 굉장히 기대하는 듯 반짝이는 눈이 부담스러워 은근슬쩍 눈을 피하자 뭔데? 응? 뭐야?? 하며 시선이 따라 붙었다. 뭐 중요한 얘긴 아니구요,
"웬만하면, 옷은 갈아입고 이사해요." "...어?" "아님 넥타이라도 풀던지."
아까부터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을 속 시원하게 내뱉고 미련 없이 문을 닫고 난 후, 한참 동안 앞집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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