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가 사내 보며 헤벌쭉하는 꼴이라니.
美人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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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는 정말 힘겹게 눈을 떴다. 내가 있는 방으로 급하게 들어오는 정국의 발소리 덕분에. 일어나라고 아주아주 크게 외치던 목소리는 덤으로. 오늘은 또 웬일로 온 건지 졸린 눈을 하고 노려봤다. 그러나 그런 내 노려봄에도 꿈쩍을 하지 않는 정국이었다.
" 어서 일어나라. 오늘은 나와 함께 있기로 약조하지 않았느냐. "
아아, 그랬었지. 그것도 4일 전에 약속한 건데 이곳의 시간도 어느새 5일이 지난듯싶다. 5일 정도 지나니 생에 쓰지 않던 경어를 이제 조금씩 쓰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내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일주일도 안돼서 적응한 내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 방을 나가는 정국이다. 이곳에서 생활한지도 좀 전에다 말했듯이 어느새 5일이 지났다. 짧은 그 기간 동안 이곳의 생활은 어느새 익숙해져있었다. 그리고 사람은 5일이면 주변 이들의 성격, 배경 등 알게 되기엔 충분한듯싶었다. 내 앞에 서있는 이 사내의 이름은 정확히 말해 전정국이었고, 나이는 스물하나이고 여기 마을의 옆 동네인 선국의 왕세자였다.
그리고 첫날에 만났던 남자의 이름은 민윤기라고 하더라. 나이는 스물네 살이고 스승이자 향일화라는 어느 단체의 화백이라고 한다. 실력이 워낙 월등해서 이 나라의 왕에게로부터 총애를 받고 있다 한다. 그리고 이 나라의 이름은 장국(匠國)이라고 한다. 뜻이 무슨, 장인들이 출세하는 나라? 쉽게 말하면 입신양명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라고 하였다. 대충 그렇게 해석하면 된다고 하더라.
누가? 전정국이. 그리고 이곳의 나는 민윤기의 제자이자 전정국의 벗인 스물둘의 남장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왜 남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내가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곳의 생활이 적응되지 못 한 탓에 그림 그리는 것도 얼떨떨했다.
조금 더 있다 보면 내가 왜 이곳에 온 건지 알게 될까. 그리고 꿈속에서 보았던 남자를 이곳에서 만나게 된 이유마저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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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 내 볼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로 다시 물어오는 정국이다.
조용하고 한적하지만 따뜻한 기운이 흐르는 궁. 그 궁 안에서는 낮은 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적어도 한 명은 아니었다.
" 내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있었나, 민화백. "
"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전하. "
" 나야 항상 강녕하다오. 과인보다 잘 쉬지도 못하고 사방팔방 돌아다니기 바쁜 민화백이야말로 괜찮은가 싶은데? "
" 감히 하찮기 더없는 이 몸을 걱정해주시다뇨. 가당치 않사옵니다. "
" 우리 사이에 감히고, 하찮고, 가당찮다니. 실망이구나. "
" 하하,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
"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 비록 지금 이렇게 서로의 위치가 다르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린 관포지교가 아니었나. 하하. "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가진 두 사람. 바로 장국의 주군, 김석진과 그의 제일 친한 벗, 민윤기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어릴 적부터 계속 유지되어왔으며, 민윤기 곁에 직접 그녀를 붙인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윤기는 그녀가 여자라는 걸 모르지만 석진은 그녀가 여자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남다른 솜씨를 진작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여자는 글에 손을 대면 안됐다. 물론 거기에는 그림도 포함이었다. 애초부터 붓 자체를 잡아선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기의 옆에 붙인 이유는 오래전부터 아버지와 친했던 그녀의 아버지와 그녀의 실력을 그냥 두기에는 아까웠기 때문에 그 당시도 훌륭했지만 더욱더 성장할 기미가 역력했던 그녀 때문에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윤기의 옆에 석진이 특별히 붙여놓은 것이다. 하지만 윤기는 아직 그녀가 여자라는 걸 모른 채 줄곧 제자로 두고 있었다.
" 그나저나 요즘 민화백 제자는 어떤가? "
" 제 제자야 아직 실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하지요. "
" 최근에 봤던 그림은 푸른 냇가 위에 붉은 꽃이 내려앉은 것이 참으로 색이 곱고 조화가 잘 이루어졌던데, 민화백의 시선은 어떠했나? "
" 송구스럽지만 소인의 눈에는 아직 먼듯싶사옵니다. "
" 하하, 멀었다라… 역시 과인이 보는 시선과 민화백이 보는 시선은 다르구나. 마치 같은 것을 보고 있지만 왕실 사람들이 보는 시선과 백성들의 시선이 다른 것처럼 말게나. "
" 무슨 그런 망언을 하십니까. "
" 망언이라니. 과인은 진실을 말한 것이다. 사실이지 않나. "
" 아닙니다. 전하께서 보시는 시선이 곧 백성들의 시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장국이 아무 탈 없이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
" 말이라도 고맙구나. 민화백이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아직 과인의 귀에는 환호성마저 아우성으로 들리는구나… 지금 이 평화로움이 부디 무너지지 않도록 잘 지지해달라는 그런 아우성. "
" 전하… 어찌 그런… "
걱정기가 가득한 표정을 짓는 윤기의 옆에서 멍하니 허공을 주시하다 이내 빙긋 웃으며 윤기를 보는 석진이었다.
" 걱정되었느냐? 괜찮다. 왕실이 잘해야 백성들과 나라가 살지. 그러니 앞으로 민화백도 이 나라의 아름다움을 그려주시게나. "
그제야 석진을 따라 빙긋 웃는 윤기이다. 그리고 살짝 시선을 옆으로 옮기며 마당에 있는 나무의 마른 가지를 보다 파란 하늘로 고개를 올려다보는 석진이다.
" 오늘은 날씨가 참으로 좋은데, 오랜만에 함께 산보를 하지 않겠느냐? "
" 저야 늘 전하의 명령을 따를 뿐이죠. "
" 하하, 이건 명령이 아니라 벗으로써 청하는 것이다. "
그의 말에 살짝 웃는 윤기이다.
" 전하의 청이라니. 소인이 기꺼이 들어드리겠습니다. "
둘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꽃이 핀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석진의 궐로 가는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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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의 손에 이끌려온 덕분에 사람들 사이에서 낑낑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몇 초쯤 사람들 사이에 이리저리 치였던 걸까. 잠시 후 치이던 몸이 안정을 되찾자 천천히 숨을 고르게 되었다.
" 저것 보거라. 사람이 막 줄 위에서 뛰고 있지 않느냐. "
" 하… 줄 타기네요… "
" 참으로 신기하구나. 어떻게 저 줄 하나를 의지해서 팔딱팔딱 뛰는 것인지. "
" 풉… "
" 뭐야… 왜 웃는 것이야. "
팔딱팔딱ㅋㅋㅋ 사람이 무슨 물고기니ㅋㅋㅋ 팔딱팔딱ㅋㅋㅋㅋ 어찌 보면 맞는 말인데 뭔가 비유가 좀 웃기네ㅋㅋ
" 아니 옵니다… 그냥… "
" 내 비유가 웃겨서 그러는 것이냐? "
" …네 사실은…… "
점점 눈치가 보여 웃는 걸 그만두고 눈앞에서 줄 하나에 의지해 공중으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젊은 사내를 봤다. 광대하기에는 되게 나이가 젊어 보이는데 이런 일을 할 만큼 형편이 많이 어려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광대를 보고 있는데 공중으로 올라가던 광대와 그만 눈이 딱 맞아버렸다.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어 보이는 광대. 어어… 저렇게 딴 곳에 한눈팔다 다치면 어쩌려고…
하지만 그런 내 불안함과는 반대로 너무나도 능숙하게 줄 위를 아슬아슬하게 타고 있는 광대였다. 그러다 자신의 머리에 있던 탈을 내려 얼굴을 가려버렸다. 역시 프로는 다르다 이건가… 보는 내내 마음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었다 하며 줄타기를 보다가 옆에 서있던 정국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젊은 광대가 위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할 때마다 그의 시선도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그리고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는 감탄사가 간간이 흘러나왔다. 그런 정국의 모습이 귀여워 괜스레 웃음이 나와 버렸다. 내 웃음소리가 그의 귀에 들렸던 건지 줄타기를 보고 있던 시선을 내게로 옮기는 정국이었다.
" 왜 웃는것이냐. "
" 아뇨,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
고개를 다시 광대에게로 돌리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내 입가에 지어진 미소는 떠날 줄 몰랐다. 여전히 공중에서 묘기를 부리는 광대를 눈으로만 쫓고 있었다. 멍하니 광대를 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돈을 좀 줘야겠다는 생각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광대라고는 지금 묘기를 부리고 있는 저 사람 한 명일 뿐, 그를 함께하는 풍물패만 보였고 그를 도와주는 다른 익살꾼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제외한 다른 꾼 이 없자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무료 공연인가?
그 생각을 가지며 다시 시선은 아슬아슬한 묘기를 보여주고 있는 광대를 향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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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의 말에 입가에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 윤기.
석진이 소리를 내며 웃자 윤기도 따라 웃음을 지었다.
" 조금 앞으로 가셔서 보시겠습니까? "
김석진
장국(匠國)의 주군(主君)
장국(匠國) ; 장인, 기술자들이 사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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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신기하구나. 어떻게 저 줄 하나에 의지한 채 저리도 신명 나게 줄타기를 할 수가 있단 말이냐. "
" 그러게요. 거기는 괜찮을는지. "
" 뭐? "
나의 말에 이상하다는 듯이 되묻는 정국을 힐끔 보다가 말을 더듬으며 핑계 아닌 핑계를 대었다.
" 그, 그 줄 말입니다! 그렇게 줄 위에서 사람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도 멀쩡하다니. 용케 끊어지지도 않은 것이 신기하다, 그 말입니다! "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날 물끄러미 보던 정국이 픽, 웃어버렸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정국을 보다가 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이 앞 모퉁이만을 돌아서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제 집으로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진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 으앗…! "
모퉁이를 도는 동시에 누군가와 부딪혀버렸고 순간 중심을 제대로 못 잡은 나는 발을 헛디뎌 그만 뒤로 넘어져버렸다. 넘어지는 동시에 손바닥이 긁힌 것인지 왼손바닥이 쓰라려왔다. 왼손이기에 망정이지 오른손이었으면 그림을 그리는데 조금 곤란했을 것이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손바닥을 확인하는데 그런 내 앞에 누군가의 손이 보였다. 곱게 보이는 그 손바닥을 보고 있는데 괜찮으냐고 물어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다 내 앞에 서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다 눈을 깜빡이며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라 이 남자는?
" 괜찮으십니까? "
" 예…? 아, 예. 괜찮습니다… "
내 앞에 내밀고 있는 손을 잡았다. 그러자 동시에 쑥 하고 순식간에 자리에 서있게 되었다. 내 앞에 서있는 남자의 힘에 한번 더 놀라며 남자의 얼굴을 빤히 봤다.
"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제대로 보고 다녔어야 했던 것인데… "
" 아, 아닙니다. 제 잘못이죠. 모퉁이를 돌 때에는 조심해야 했던 것인데… "
내 말에 그저 날 빤히 내려다보는 남자. 뭐지, 내가 뭐 실수했나? 그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해 보이는데, 살짝 웃어 보이는 남자다.
"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
" 예. 없습니다. "
" 그러시군요. 다행입니다. "
다행이라며 미소를 보이는 남자를 보며 따라 웃어 보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저기, 혹시… 아까 줄타기를 하시던 분, 맞죠? "
" 예. 기억해주고 계셨군요. "
" 네. 본 사람들이 한두 명도 아니었는데 당연히 기억하죠. "
" 그러는 선비님은 아까 저와 눈이 마주치셨던 것이 맞으시는지요? "
" 어… 기억하시는 거예요? "
" 예. "
예.라고 대답하며 고른 치아를 살짝 드러내며 웃는 남자를 보며 따라 웃어 보였다.
" 그런데 줄 하나로 의지해서 그 높은 곳을 오르내리락하면 무섭지 않으신가요? "
" 전혀요. 오히려 저는 재밌습니다. "
" 재미? 대단하십니다… "
" 대단할 정도는 아닙니다. "
조금 쑥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말하는 남자를 보며 문득 궁금증이 생겨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 그런데 가장 높은 곳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어떤 기분입니까? "
" 음. 기분이라… "
눈을 도르르 굴리며 잠시 생각해 보이던 남자는 다시 내 눈을 마주하더니 말해왔다.
" 천하를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기분입니다. "
" 천하를… "
남자의 말에 그 기분이 조금 궁금해졌다. 그래서 씩 웃으며 남자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하려고 했다.
" 저, 다음에 그 줄타기 좀 알…! "
" 늦었다. 이만 돌아가자꾸나. "
그런 나와 남자 사이에 정국이 끼어들며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다. 정국의 행동에 당황하며 올려다보는데 어째 표정이 조금 딱딱해져있었다.
" 어… 저, "
뭐라 말하려는 날 여전히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돌려 남자와 마주하는 정국이었다.
" 네 놈도 이만 일 없다면 돌아가거라. "
그 말과 함께 내 팔을 잡으며 남자를 지나쳐 걸어가는 정국이었다. 그런 정국의 손길에 거의 끌려가다시피 가는데, 나의 반대 손목을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덕분에 나는 자리에 멈춰 섰고, 그런 내 반동에 정국 또한 자리에 멈춰 섰다. 당황한 나는 그저 내 손목이 잡은 채 보고 있는 남자를 한번, 고개를 돌려 정국을 한번 쳐다봤다. 정국의 표정을 확인하자 아주 딱딱하게 굳은 그의 눈썹이 보였다.
" 죄송합니다. 결례를 범하는 태도인 것은 알지만, 하다못해 성함만이라도 알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
" 어… 성함요? "
정국의 눈치를 살짝 보다가 다시 남자를 보니 정국의 시선 따윈 신경 안 쓴다는 듯이 날 보며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이름을 알려주려고 했다.
" 두 번 다시 볼 일 따윈 없을 텐데 뭐 하러 이름을 알려주나? "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내 손목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을 거칠게 쳐버리는 정국이다.
" 어디 천한 신분으로 감히 누구의 몸을 건드리는 것이냐. "
" 천한 신분이라도 사람은 사람인지라 그렇습니다. "
" 뭐라? "
남자와 정국 사이에 보이지 않는 어둡고 무거운 기류가 생겨나는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런 둘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 두, 두 분 다 그만하십시오! "
" 놔라. "
" 돌아가시지요, 나리! "
내 언성에 나를 내려다보던 정국은 이를 아득거리더니 태형을 한번 노려본 후 그대로 뒤돌아 자리를 떠나는 정국이었다. 그런 정국의 행동에 아무 말없이 서둘러 그를 따라갔고, 그런 나와 정국의 뒤로 남자의 말이 들려왔다.
" 저는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
김태형.
왠지 모르게 듣자마자 머릿속에 박히게 되는 이름인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태형을 보려 하는데 화를 잔뜩 누그러뜨리는 정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 사내를 쳐다보면 우린 더 이상 벗이 아니다. "
정국의 그 말에 차마 뒤로 돌아보지 못하고 그의 걸음을 따라 맞춰나갔다.
" 아주 헤벌쭉 해졌더구나. "
모퉁이를 돌아 다시 무수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저잣거리에 나오자마자 나를 향해 정국이 말해왔다.
" 예, 예? "
" 사내가 사내 보며 헤벌쭉하는 꼴이라니. "
정국의 말에 당황해하며 되물었다.
"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
" 정녕 모르는 것이냐, 아님 척이라도 하는 것이냐? "
" 제가 언제 헤벌쭉했다고 그렇습니까? "
" 사내에게 눈을 떼지도 못하고 여인처럼 행동하던 것이 생각 안 나느냐? "
"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
" 됐다. 내 너를 그리 보지 않았거늘. "
" … "
" 그 사내는 천한 놈이다. 딱 봐도 알지 않느냐? 그런 놈과 친해진다면 내 격식이 떨어질 것이 눈에 선한데 내가 그리 둘 것 같으냐? "
" 말이 심하십니다. "
" 이게 현실이다. "
말같지도 않은 억지를 부리는 정국을 보며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리고 동시에 좀 전에 있던 일들이 다시 생각났다. 머릿속으로 다시금 떠오르는 태형의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 이것 봐라. 또 그 사내를 생각한 것이지? "
정국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뜩 차려지게 되며 정국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정국이 말한 헤벌쭉하는 내 꼴이 지금 이 꼴이었겠구나. 싶어 곧바로 정국의 말을 인정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자 정국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 아닙니다. "
" 아니긴. 네 얼굴에 다 쓰여있었느니라. "
정국의 말에 딱히 변명이 떠오르지 않아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런 나를 보며 아까보다 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젠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걸어가는 정국의 뒷모습을 봤다. 뭐 때문에 저리도 화가 난 것인지. 그저 한낱 벗일 뿐일텐데 태형과 말 몇 번 걸었다고 그게 화가 날 정도였던 것인지. 왠지 정국의 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아 정국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그런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뒤로 휙 돌아버리는 정국의 모습에 깜짝 놀라며 서둘러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아씨… 이러면 꼭 내가 무슨 잘못한 것 같잖아… 그 생각에 눈알을 굴리며 정국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봤다.
" 뭐 하는 게냐. 얼른 내 뒤로 오지 못할까. "
정국의 말에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해 그의 옆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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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씨… 지친다 지쳐… 무슨 애도 아니고… "
오는 길에 정국의 기분을 풀어주느라 기가 다 빠졌다. 삐진 것이 꽤 오래갔던 것 같았다. 느낌상으로 두 시간 정도? 정국에게 기가 다 빨린 건지 집으로 돌아오니 기운이 쭉 빠지는 것이 졸음이 밀려왔다. 방문을 열자 밀려오던 졸음이 확 달아났다. 왜냐하면 윤기가 내 방 중심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 스, 스승님… "
" 어딜 갔다 오는 길이냐. "
" 아… 저잣거리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
" 누구와? "
누구냐고 묻는 윤기의 물음에 정국이라고 말해도 될까라고 생각이 들다 그냥 대충 얼버무렸다.
" 벗…이옵니다. "
" 벗? 벗이라… "
나의 말에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중얼거리는 윤기. 그런 윤기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 스승님은… 어디 가셨다 오시는 길이십니까? "
내 물음에 바닥에 머물고 있던 눈을 날 향해 치켜뜨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는 윤기.
" 지금 내가 네게 어딜 다녔는지 보고해야 한다는 말이냐? "
" 아, 아니 그게 아니라…! "
" 네 이놈! "
윤기의 호통에 가슴속이 움찔거렸다. 윤기의 눈빛이 겁이 나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어떡하지, 어떡할까, 내가 잘못한 걸까, 아니 그렇다고 그것 좀 물어봤다고 이렇게까지 화를 낼 정도인가? 하는 생각이 막 드는데 갑자기 앞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고개를 살짝 들어 보이자 윤기가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려 살짝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왜 웃냐?
" 내 아끼는 제자에게 못 말해줄 것도 없으니 고개를 들어라. "
뭐야? 나 지금 밀당 당한 거니…?
" 궐에 잠시 들렀다가 나도 저잣거리에서 오는 길이다. "
" 스승님도 장에 들르셨습니까? 근데 왜 못 봤지… "
" 서로 가는 길이 달랐나 보구나. 그래, 저잣거리에 가서 무얼 하였느냐? "
" 그냥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줄타기 보고 오는 길입니다. "
" 줄타기? 그건 벌써 한 시진도 넘게 끝나지 않았느냐? "
" 아… 예… 끝나고 또 여기저기 보다가 온 겁니다… "
" 그런 것이냐. "
나의 말에 알겠다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가는 윤기였다. 어휴. 그 두 시간 동안 전정국 성질 풀어주느라 혼났습니다… 이젠 정말 쉴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김태형이라… 길거리에서 돌아다니는 흔한 페이스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사람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아, 평범이야 하지 않지… 줄 위에서 펄쩍펄쩍 뛰면서 긴장이나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어 보였으니… 오히려 재밌다고 하는 것이 제일 크니까… 계속 잡생각이 들다가 뭔가 딱 생각이 들어 내 양팔을 잡아보았다. 정국이 잡았던 팔과 태형이 잡았던 팔을.
정국의 손길이 강하면서도 어리광이 섞인 느낌을 받았다면 태형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느낌이 들었었다. 그렇지만 외모 생김새나 전체적인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장난기가 조금 보이기도 했다. 결론은 진짜 정체가 뭔지 알 수가 없단 얘기다. 쓰고 있던 갓을 벗고 꽁꽁 싸맨 머리를 짓누르며 자리에 누웠다.
" 아 진짜, 뭐가 뭔지! "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만나 온 사람들을 본다 하면, 전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냥 평범하게 지나칠 것 같지는 않은 그런 기분.
" 하여간 다 잘생겨서 문제야. 잘생기면 문제… "
천장을 응시하며 중얼거리다 생각을 떨칠 겸 방안을 뒹굴거렸더니 피곤함이 몰려오며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져 왔고 점점 내려오다 마지막에 새까만 모습밖에 안 보이고 그렇게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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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고 길게 뻗은 나무가 가지런히 나있는 숲길을 걷던 남자가 어느 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숲 속에 집이라니, 어딘지 수상쩍다고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그 집은 먼 길을 걷고 걸어 고생한 여행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민박집이었다. 그런 집 안에는 두 명의 여행자들이 머물고 있었고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명이 살고 있었다.
탁
김태형
환국(奐國)의 황자이자 자유로운 광대
환국(奐國) ;성대한 중심 국가.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진 나라.
꽃을 그리는 세상, 미인도(美人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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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 이어 2편도 많이 사랑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기대 1% 들고 걱정 99% 들었는데 많은 분들께서 봐주셨던 것 같아요ㅎㅎ
전 너무 기쁩니다. 저는 이제 이따가 일하러 가야하니 자야겠습니다..
모두 꿀잠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