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또 다시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자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아저씨가 해맑게 웃으며 짠- 하는 귀여운 수식어와 함께 얼굴을 들이밀어 왔다. 부담스러워 고개를 뒤로 피하자 그제서야 다시 고개를 제자리로 돌린 아저씨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 옷 갈아입었어. 마치 엄마 저 숙제 다 했어요, 하며 칭찬을 바라는 아이의 모습 같아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고 잘했어요, 한마디 던지자 그치? 하면 신난 듯 웃어보였다. 뭔 놈의 20대 남자가 저렇게 세상만사가 다 행복하고, 즐거운지. 내가 지금 고3이라 그런가,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나저나, 이번엔 또 무슨 볼일이 있어서? "혹시, 나랑 같이 밥 먹을 생각," "없어요." "응, 없을 것 같았어. 근데 한 번 만," "싫어요." "제발..."
또다. 애절하게 늘어뜨리는 목소리. 거기에 이번엔 큰 눈을 아련하게 빛내고 있는 표정까지 추가되었다. 다 커서 웬 귀여운 척이냐며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진짜로 귀엽긴 해서 그냥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누가 봐도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내가 자신과 함께 밥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주절주절 읊기 시작했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본인은 오늘 막 이사를 왔는데, 마침 가스관이 연결이 안 되어 있어 가스레인지가 작동을 안 하더란다. 그래서 전자레인지로 3분 카레라도 해먹을까 했더니 전기도 마침, 아주 마침 끊긴 상태라 집에선 밥을 해먹을 수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시켜먹어요, 그럼." "...곧 해 진단 말야. 어두운 집안에서 혼자 뭐 시켜먹으면 초라하잖아." "그럼 굶던지," "어어, 효신아. 거 참, 매정하게 뒤돌고 그러는 거 아니라니까?" "아 진짜 자꾸,"
정말 뿌리치려고 했는데, 진짜로 절박해 보이는 표정에 또 져버렸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 왜 자꾸 이렇게 쉽게 휘말려버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안으로 들어서는 아저씨를 쳐다보고만 있다가 따라 들어가자 거실 중앙에 멀뚱히 서선 나를 쳐다본다. 소파에 앉아 있어요. 한마디 하니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곤 다소곳이 앉아 멍하니 앞만 쳐다보기에 리모컨을 찾아 손에 쥐어주자 씩 웃으며 전원을 켜는 것까지 보고 뒤돌아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아저씨가 가져다 준 떡을 생각 없이 먹다보니, 밥 하는걸 잊어 여태 밥조차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뭐 먹을지 결정 못했는데,
"내가 할까?" "네?" "저녁 말야. 밥 같이 먹자고 와서 티비만 보는 건 좀 그렇고." "굳이...상관없는데." "그래도, 예의란 게 있잖아? 비켜봐. 너 뭐 좋아해?" "그냥, 다 잘 먹어요." "그래? 그럼 내가 하고싶은거 해도 돼?" "...마음대로요."
한 발 뒤로 물러서자 그대로 내 어깨를 잡아 식탁의자에 앉혀놓곤 트레이닝복 소매를 걷어 올려 이것저것 재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무얼 하려는지 꽤나 여러 가지를 찾으면서도 집주인인 내게 뭐가 어디 있냐는 질문 하나 없이 혼자 끙끙대는 게 답답해 뭘 찾냐고 물으면 아냐, 괜찮아. 한마디를 던지곤 또 이리저리 찾아 헤매기를 반복했다. 또 한 번 뭘 찾냐고 물으려다 어차피 또 괜찮다고 대답할 것 같아 그냥 내버려 뒀더니 한참 만에 겨우 재료를 다 준비한듯 싶었다.
"혼자 살아?" "네." "언제부터?" "고1때부터요. 학교 때문에." "왜, 학교가 멀어서?" "아뇨. 부모님이 지방 출장이 많아요. 그것도 장기 출장. 중학생때 까진 부모님 따라 전학도 많이 다니고 그랬는데," "응, 그랬는데?" "..아니, 뭐. 고등학교는 자주 전학 다니긴 좀 그렇잖아요."
내가 왜 오늘 처음 보는 남자한테 주절주절 내 사정을 다 말하고 있나 싶어 말이 끊기자 귀신같이 되물어 오는 것에 흠칫 놀라 끝까지 말을 이어갔다. 그 뒤로는 대화가 끊겨 그저 요리하는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본인도 혼자 산지 꽤 됐는지 요리하는 폼이 꽤나 익숙해 보였다. 얼굴만 봤을 땐 동글동글 여리게 생겼는데 자세히 보니 어깨도 꽤나 넓고 덩치도 좋아보였다. 키도 꽤 컸다. 나도 별로 작은 키는 아닌데. 서있을 때를 생각해보면 나보다 많이는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더 작았다.
"뒷모습도 잘생겼지?" "...에?" "넋 놓고 볼 정도야?" "...별로," "쑥쓰럽구나?"
문득, 굳이 정장입고 이삿짐 옮기는 모습이 아니어도 꺼려질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맛있어?" "네." "진짜?" "똑같은 거 먹고 있으면서 뭘 자꾸 물어요." "그냥, 입맛은 다 다르잖아." "진짜 맛있으니까 밥이나 먹어요."
한참을 퉁탁거리며 만든 것은 오므라이스 였다. 처음엔 고작 이걸 만들겠다고 한참동안 시간을 쏟아 부었나, 하는 생각 이였는데 한 입 먹어보니 꽤 맛있었다. 웬만한 음식은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고 먹는 편인데, 진짜 맛있었다. 내가 평소에 밥을 어떻게 먹는지 아는 사람 이였다면, 3일 정도는 굶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였다. 대부분은 생각 없이 2인분쯤 되는 양을 만들어 놓고, 1인분도 채 안 되는 양을 겨우 먹고 한참 지나 썩어 가는걸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게 반복되곤 했다. 근데 이건 아무리 봐도 1인분이 넘는 양인데, 숟가락 든지 몇 분도 되지 않아 그릇의 반이 넘는 양이 없어지고 있었다.
"고등학생인데 혼자 살면 안 외로워?" "...?" "난 20살 넘어서 부터 혼자 살았는데도 되게 외로운데." "...형제 있어요?" "응, 누나 둘." "그래서 그런가보죠. 난 딱히, 누구랑 같이 산다는 느낌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어서."
그게 항상 적응이 안되서 문제긴 하지만.
"그럼, 더 외롭지 않아?" "그냥, 짜증은 나는데 익숙해서 괜찮아요." "에이, 그럼 그건 괜찮은 게 아니지-" "뭐...어쩌겠어요." "앞으로 내가 자주 와야겠다. 그치?" "몇 번을 말해요, 딱히 그럴 필요가 없다ㄴ," "물 마실래?"
저 아저씨가 자꾸 사람 말을 안 듣고...!
********
"으아, 배부르다." "...토할 것 같아..." "그 정도야? 고3이면 이정도로 토할 것 같으면 안 돼- 많이 먹어야지," "원래 뭐 잘 안 먹어요. 먹는 것보단 만드는 쪽이 취향이라면 모를까." "앞으로 내가 많이 먹여줄게. 먹다보면 위도 늘어나." "아니, 그니까...됐어요, 뭔 말을 해 내가,"
어차피 필요 없다고 해봤자 이번에도 딱히 내 말을 귀담아 들을 것 같지 않아 그냥 관둬버렸다. 이렇게 하나둘씩 됐다고 넘기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은 들지만 계속 이어가봤자 딱히 답도 안 나올 말싸움인 것 같아 의욕이 사라져버렸다. 내가 슬슬 대답하길 포기한걸 눈치 챘는지 어딘지 모르게 승리의 여유로움이 담긴 듯한 미소와 함께 싹싹 비워진 그릇을 치우는 것을 보며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남의 집에 다짜고짜 쳐들어오긴 했지만 요리도 했는데 설거지까지 하라고 할 순 없어 휘적휘적 걸어가 고무장갑을 손에 쥐자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재빨리 손에서 고무장갑을 빼앗아갔다.
"설거지," "내가 할게." "아니에요. 제가," "가서 쉬어. 얼른." "아니, 그니까," "아- 빨리빨리. 얼른 가, 얼른."
꽤 강한 팔힘에 밀려 결국 거실까지 내쫓기다 싶이 나와 버렸다. 그래도 딱히 허약한 몸은 아닌데, 너무 쉽게 밀려난 거 아닌가 싶어 괜히 뒷머리를 긁적이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거실 소파에 털썩 드러누웠다. 배부르게 먹고 소파위에 드러누워 배를 통통 두드리고 있자니 왠지 세상만사 뭐가됐든 다 괜찮을 것만 같은 여유로운 느낌이 들어 입가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혼자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느낌이었다. 누군가랑 같이 있는 게, 딱히 나쁘진 않네.
그렇게 여유로움을 만끽하다, 잠들었던 것 같다. "...으, 몇 시야..."
일어나보니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밥 먹을 때 까지만 해도 꽤나 햇살이 쨍쨍 했는데 해가 진지도 한참이 된 듯 어두컴컴한걸 보니 꽤 오래 잔 것 같다. 소파에서 자서 그런지 삐걱거리는 몸을 대충 휘휘 움직이자 얇은 담요가 스르륵 흘러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걸 내가 덮고 잤을 리야 당연히 없고, 아마도 아저씨가 덮어준 듯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저씨는...? 거실 불을 켜고 바보처럼 두리번거리다 소파 옆 작은 탁자위에 놓인 포스트잇 뭉치 위에 깨알같이 쏟아진 글자들을 보곤 가까이 가서 집어 들자 꽤나 악필인 듯 삐뚤빼뚤 흐트러진 글씨가 쓰여 있었다.
「남의 집 함부로 뒤져서 미안, 그래도 아직까진 밤 되면 추우니까. 침대로 옮길까 하다가 너무 곤히 자길래 그냥 뒀어. 일어나면 허리 좀 아프겠다 너 ㅋㅋㅋ 밥 같이 먹어줘서 고마워. 또 먹고 싶은거 있으면 불러 ^^ 꼭!! ㅋㅋㅋㅋ 음...포스트잇 하나 정도는 써도 괜찮겠지...??」
어쩜 글에서 조차 이렇게 본인 표출이 확실한지 몰라.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착각이 들만큼 참 본인답게도 쓴 포스트잇을 한참 바라보다, 잘가라는 인사도 못해주고 그냥 돌아가게 만든게 은근히 미안해져 괜히 현관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전기가 끊겼다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어두컴컴해진 집안에 혼자 있겠지. 생각하다보니 꽤 안쓰러워지기까지 했다. 근데 뭐, 어차피 그거야 본인 사정이고. 내 알바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람.... ********
띵동-
"누구세요?" "그...전데요," "어?? 잠깐만..!"
쿠당탕, 꽤나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안쪽에서 누군가 뛰어나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급하게 안 나와도 되는데... 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하는 사이 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문 안쪽엔 진짜로 전기가 나가 어두컴컴한 집안에서 아련하게 촛불 몇 개가 흔들리고 있었다. 상관없는 일이라고 신경 끌려고 했는데, 정말 그냥 공부나 하려고 했는데. 책상 앞에 앉고 나서도 평소처럼 집중이 되질 않아 그냥 입고 있던 후드를 뒤집어쓰고 튀어나와 다짜고짜 앞집 벨을 눌렀다. 왠지 이것도 내가 지는 기분이야.
"잘 잤어??" "네, 뭐...덕분에." "허리 안 아파??"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어???"
안 그래도 큰 눈이 더욱 커져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지금 내뱉은 말이 진짜로 내 입에서 나온게 맞는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집에..아이스크림이 많아서...뭐, 싫음 말ㄱ," "아냐, 좋아! 진짜, 짱 좋아!!" "...뭘 또 그렇게까지," "응??" "아뇨, 빨리 오기나 해요." "그래!!" 왠지 앞집 이웃을 얻었다기 보단, 강아지 한 마리를 분양받은 기분이 드는 것도 같았다.
따지자면 초딩쪽이 더 잘 어울리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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