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고 방방 뛰던 것만 봐선 최소 아이스크림 덕후였는데, 2,3번 퍼먹더니 숟가락을 입에 물고만 있는 아저씨를 쳐다보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피한다. 오늘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지금까지 통틀어 아저씨가 내 시선을 피하는 건 처음이었다. 안 먹어요? 한마디 하자 그제서야 슬쩍 한 입 떠 입에 넣는데, 꽤나 오래 오물거리다 삼키는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이 상황이 딱히 즐거운 것 같지 않아 미련 없이 옆에 있던 뚜껑을 닫았다. "..왜! ㅁ..먹는 중인데," "아이스크림 말고, 뭐 좋아해요?" "..어?" "커피? 아님 녹차? 홍차도 있긴 한데." "...난 커피."
여전히 입에 숟가락을 문채로 소심하게 웃는걸 보다가 손에서 숟가락을 뺏어드니 뭐가 아쉬운지 쩝쩝, 입맛을 다시며 나를 올려다본다. 아까부터 느끼는 거지만, 초딩같은 느낌이 정말 잘 어울렸다. 무슨 밥 다 먹고 후식 기다리는 아들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파릇한 10대에 아들 보는듯한 느낌을 왜 받고있어야 하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쁜 기분은 아니긴 했다. 신기하게도 이미 아저씨가 꽤나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아무리 낯을 안 가리는 성격이라지만, 하루 만에 누구랑 이렇게까지 친해질 수가 있나.
"원래 아이스크림 싫어해요? 아님 그냥 저 아이스크림이 맛이 없나." "...찬 걸 잘 못 먹어." "에??" "탈이 자주 나거든, 위장이 좀 약해서." "..뭔가 좀, 안 어울리는 지병이네요." "헐, 너 우리 누나랑 똑같은 말 했어."
혼자 말하고 혼자 또 신나게 웃는 것을 보다 나도 모르게 따라 웃어버렸다. 옆에 있는 사람을 덩달아 웃게 하는 능력이 있는건 확실한 듯 했다. 그러다 문득 눈이 마주치자 괜히 민망한 느낌이 들어 재빨리 고개를 돌려 부엌으로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다시 넣어두었다. 찬장에서 커피를 꺼내고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에 올려두고 몸을 돌리자 언제 왔는지 식탁의자에 앉아 있는 아저씨가 보였다. 놀라서 흠칫, 몸이 떨렸지만 애써 아닌 척 하며 맞은편에 앉자 그런 나를 턱을 괴고 멍하니 쳐다본다. 처음 본 순간부터 느끼는 거지만, 저렇게 진지해져서 쳐다보는 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고3이면 내일도 공부해?" "해야죠." "하루만 안하면 안 되나. 주말인데." "...왜요?" "영화 보러 갈래?" "둘이서요?" "응."
흡사 아주 오래된 친구 사이에 내일 주말인데 영화나 볼까? 정도의 제안을 하는 듯한 말투였다. 서로 얼굴이랑 이름을 알게 된지 반나절도 안 된 사이에 하는 말치곤 굉장히 뻔뻔함이 많이 묻어나는 말투임에도 불구하고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저 사람이 왜 이름이랑 나이밖에 모르는 나한테 영화를 보자고 하는 진 알 수 없는 노릇 이였지만, 어쨌든 정말 어이없게, 약속을 해버렸다. 공부야 하루쯤 안 해도 딱히 문제될 건 없겠지만, 아저씨랑 둘이서 영화관에 가는건 꽤나 큰 문제였다. 남자 둘이, 영화관이라니.
"흠, 그냥 우리 집에서 볼까?" "..네?" "남자 둘이 영화관은, 아무래도 좀 민망하긴 하잖아?" "아저씨 집에서, 뭐 볼건데요?" "글쎄. 너 어떤 영화 좋아해?" "...그," "응?" "...물 끓는다, 커피 타올게요."
급하게 일어나 불을 끈 뒤 믹스 커피가 담긴 컵에 물을 붓고 휘휘 저으며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로맨틱 코미디가 취향이라고는 말 못해. ********
"영화, 내 마음대로 골랐어. 괜찮지?" "네, 뭐..." "19살 남자애는 별로 안좋아할것 같긴 하지만," "뭔데요?" "로맨틱 코미디." "...맙소사."
19살 남자애도 그렇지만 20대 남자 직장인이 안 좋아할 확률도 만만치는 않은것 같은데. 나름 영화관 분위기를 내겠다며 아저씨가 손수 준비해놓은 팝콘과 콜라까지 각자 손에 쥐곤 나란히 앉아 로맨틱 코미디를 보고 있자니 어딘지 모르게 웃겨 슬며시 웃으며 아저씨를 쳐다봤는데, 이미 아저씨는 시작된 영화에 꽤나 집중해있었다. 집중력 한 번 엄청나네. 커다란 눈이 모니터에 고정되어 떨어질 줄을 몰랐고, 의외로 꽤 작은 손은 그 와중에도 열심히 팝콘을 집어 입으로 나르고 있었다.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팝콘을 오물거리고 있는 입을 나도 모르게 넋 놓고 보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눈이 마주쳤다. 그것도 아주 대놓고.
"...왜?" "뭐가요," "나 입에 뭐 묻었어?" "아닌데요." "근데 왜," "...영화나 봐요."
민망함에 그 뒤론 영화에만 집중했다. 잠깐 동안 의아함에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이면, 입술을 쳐다보다 눈이 마주칠 건 뭐람. 민망함에 팝콘만 아그작 거리며 씹어 먹자 슬며시 콜라를 내미는 손길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내밀어진 콜라를 손에 쥐고 마시다가, 문득 또 느껴지는 시선에 눈만 굴려 옆을 쳐다보자 웃으며 나를 쳐다보는 아저씨의 표정이 보였다. 재빨리 다시 눈을 영화에 고정시켰지만, 도무지 집중이란 게 되질 않았다. 아, 진짜 쪽팔려.
******** "에이, 이 영화는 결말이 좀 별로다." "그니까요. 기대했던 영환데." "응?" "...왜요, 뭐요." "너 이런 장르 좋아해?" "....배고파요."
집구조가 똑같아 자연스레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며 너 저런 거 좋아하냐니까? 어제 대답 못한 이유가 그거야? 응? 하며 끈질기게도 물어오는 탓에 결국 그렇다고 대충 대답해버렸다. 그럼 진작 얘기하지! 하며 또 좋다고 방방 뛰는걸 무시하고 냉장고를 열었, 는데... 열었는데, 없다. 아무것도. 휑해도 너무 휑한 광경에 멍하니 냉장고 안을 쳐다보고만 있자 뒤에서 슬며시 냉장고 문을 닫는 아저씨의 손이 보였다. 이건 좀 심한거 아니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뻔뻔하게 장보러갈까? 하고 물어온다. 장은 진작 좀 봐놓지.
"...시켜먹어요." "많이 배고파?" "엄청요." "그러자, 그럼. 너 뭐 좋아해? 치킨? 피자?" "...짬뽕?" "헐, 대박. 너 내가 짬뽕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아?"
....뭔소리야. *********
"아저씬 언제부터 혼자 살았다고요?" "음, 21살인가, 22살때." "그럼 지금은 몇 살인데요." "...너 내 나이 몰라?" "말 해준 적 없거든요?" "그랬구나..허허. 난 지금," "네, 지금." "후식은 뭐 먹지?"
애써 화제를 돌리며 앞에 놓인 짬뽕그릇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아저씨가 괘씸해 면이 가득차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볼을 두 손으로 붙잡고 얼굴을 들어 올리자 똥그랗게 떠진 눈이 놀란 듯 나를 쳐다본다. 나도 모르게 한 행동이라 내 스스로도 당황스럽긴 했지만, 오물오물 면을 씹어 삼키는 아저씨의 모습에 그냥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저씨도 나를 따라 웃다가 매운 짬뽕 국물이 잘못 넘어갔는지 콜록거리며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괴로운 듯 바닥을 퍽퍽 쳐대기에 옆에 있던 물을 손에 쥐어주자 벌컥벌컥 들이키다, 그것마저 잘못 삼킨 듯 했다.
"컥, 켁, 엌, 아오..!" "...바보에요?" "야, 나, 커헉, 진짜, 죽겠어," "안 죽어요, 걱정마요."
겨우 진정하는 듯한 아저씨의 등을 두드려주다 정신 못 차리는 틈을 타 그래서 몇 살이라고요? 하고 물으니 29살... 하며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안 생겨선, 의외로 나이가 많네. 어젠 뭐 창창한 20대니 어쩌니 하더니, 30대가 코앞인 주제에 참 뻔뻔하게도 그런 말을 했구나 싶었다. 하긴, 아저씨한테서 뻔뻔함을 빼면 딱히 남는게 없을것 같긴 했다.
"그래도 아직 20대야 나..." "짬뽕이나 마저 먹어요."
********* "안 더워요?" "응, 집 시원한데 뭐."
짬뽕을 각자 깨끗하게 비워내고 거실 바닥에 누워 한참 천장만 구경하다 그러다 또 잠들어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귀찮다며 칭얼대는 아저씨를 이끌고 집 앞 슈퍼로 가 이것저것 장을 봐왔다. 식재료들을 고르고 있는데 옆에서 넌 후식 아이스크림? 하며 묻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한 아름 집어 들어 장바구니에 넣었다. 찬 것도 못 먹는다는 사람이 뭘 이렇게 많이 사냐며 한마디 하자 앞으로 네가 와서 먹어, 하며 그저 날 계산대로 이끌 뿐이었다. 집에 와서 장 봐온 재료들을 차곡차곡 정리해놓고 내 손에 아이스크림을 쥐어 거실로 내보내더니, 조금 있다 손에 들고 온건 뜨끈한 핫초코였다.
"맛있어요?" "응, 너도 줄까?" "그게 아니라, 되게 맛있게 먹길래요." "나 단거 되게 좋아하거든." "...어울려요, 엄청." "또 우리누나랑 똑같은 말 한다 너."
이번엔 내가 먼저 웃음이 터져 웃어버리자 아저씨가 따라 웃는다. 원래부터 웃음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고3이 되고 나선 더더욱 웃을 일이 사라져가던 찰나에 앞집에 이사 온 아저씨 덕에 이틀 내내 웃는 일이 참 많아졌다. 처음봤을땐 정말 이상하게만 보이던 사람이 이젠 꽤 귀엽게 보이기도 했고, 다정해 보이기도 했다. 물론 아직까지도 초딩같은 면이 더 많지만.
"근데 아저씨는 여자친구 없어요?" "어? 뭐?" "뭘 그렇게 놀래요. 여자친구 없냐고요." "..갑자기 그런건 왜 물어?" "아니, 주말인데 나랑 놀고 있는게 이상해서요." "어..그래, 그, 없어. 여자친구." "그렇구나."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아저씨가 힐끔힐끔 내 눈치를 본다.
어라? "뭐에요, 있어요?" "아냐, 없다니까." "...있는데?" "없다니까?!" "있네." "아, 진짜 없어!!" "확실히 있네." "아, 진짜 없, 야, 내 말 들어? 없다니까? 진짜라니까?" "알겠어요, 알겠어. 없다 쳐요." "아 진짜 없다고- 어? 야, 진짜야. 거짓말 아닌데? 어?" "알겠다니까요??"
대체 왜이래 이 아저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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