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뻑뻑했다. 감았다 뜰 때마다 삐걱대는 환청이 들릴 만큼. 모니터에 꽂혀 있던 시선을 잠시 창문 쪽으로 돌렸다. 창 위에 두껍게 쳐진 커튼 사이로 빛이 한 줄기 새어 들었다. 코앞에 닥친 마감 시간을 맞추기 위해 집 안에서 가장 집중이 잘 되는 옷방에서 며칠째 밤을 새웠다. 집중은 잘 되지만 환기는 잘 되질 않아 머리가 핑 돌아서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잠시 이마를 짚고 있는데 마우스 옆에서 불빛이 번쩍인다. 차마 꺼놓지는 못하고 무음으로 돌려놓아 소리 없이 우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발신자와 시계를 한 번에 확인했다. [김멋짐]. 그리고 지금은 오전 11시 반. 두통이 잠시 가시는 기분이다.
“어어.”
- 어디에요?
“내 방이지 어디야. 넌 끝냈나보네?”
- 으응, 방금 작업실에서 나왔어요. 아 눈부셔...나 뱀파이어 됐나봐요...하얗게 타버릴 것만 같아...
음반 프로듀서인 남준은 이번에 새로 맡은 프로젝트 때문에 나보다도 훨씬 전부터 강행군을 치르고 있었다. 지하 녹음실에서 매일 먹고 자고 하다 햇살을 보려니 기분이 이상하다며 으으응, 실은 칭얼대는 목소리일 텐데 컨디션이 안 좋으니 확 잠겨서 마치 으르렁대는 것처럼 들린다. 너 목 아플 때 먹는 거 먹었어? 아, 하더니 잠시 답이 없고 부스럭거리는 소음만 넘어왔다. 곧 도록 도록 사탕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남준이 나를 걱정한다.
- 자기는 괜찮아요? 계속 철야해서 어떡해요.
“어제 두 시간은 잤어. 안 자면 진짜 미칠 것 같아서.”
- 언제쯤 끝나요?
“어...데드라인이 두신데, 그 전에 끝내야 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 큰일이야. 글 한 편씩 끝낼 때마다 그러니, 병나겠어요.
“날 걱정할 때가 아닌 거 같은데?”
- 난 젊잖아요.
“...전화 끊을까?”
- 농담이에요, 흐흐,
“재미없는 농담 하지 말고, 얼른 집에 가서 누워.”
- 집에 가라구요?
“응? 응.”
- ‘가’라고?
“그럼 안 가? 가서 안 잘 거야? 목소리 다 쉬어가지고, 잠을 자야 회복이 되지.”
- 우리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에요.
“...”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날짜를 세어보는데, 11일, 열흘이 넘었다. 둘 다 마감에 치인 상태라 연락은 매일 했어도 얼굴은 도저히 볼 시간이 나질 않아서. 어...할 말이 없어 잠시 멍 하게 있는데 수화기 너머로 불편하게 기침하는 소리가 들린다.
- 내가 보고 싶지도 않나봐.
“...낯간지럽게 무슨,”
- 우리는 낯간지러워도 되는 사이인데.
“아 오늘따라 왜 이래, 이 사람이?”
- ‘와’
“응? 와?”
- ‘지금’
“지금?”
- 오케이, 바이
전화가 끊겼다.
뭔 소리래. 까만 휴대폰 화면을 보다가 다시 남준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때마침 액정에 불빛이 번쩍거린다. 출판사 편집자다. 최대한 공손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 마감 시간에 맞춰 파일을 보내겠다고 굽실거린 뒤 모니터 화면에 다시 집중했다. 남준과의 통화가 그렇게 끝나버린 게 맘에 걸렸지만 일단은 마감을 치는 게 먼저였다. 돈 벌어먹고 사는 건 정말 못할 짓이라고 혼자 구시렁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
전송 버튼을 눌렀다. 성공적으로 전송되었다는 메시지가 뜨는 것을 보고 나서야 후아, 하고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1시 반이다. 엄청난 집중력으로 데드라인보다 일찍 마감을 했다. 기지개를 길게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의 마디마디가 쑤셨지만 마감의 기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휴대폰에는 별다른 메시지가 없었다. 남준에게 전화를 걸면서 옷방 문을 열었다. 온통 컴컴하게 만들어놓은 옷방과 다르게 조그마한 거실은 볕이 아주 잘 들었다. 쏟아지는 빛에 잠시 찡그린 채 서있었다. 그가 말했던 뱀파이어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아 피식 웃으면서 일정한 통화 연결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린다. 빛에 익숙해진 시선이 거실 베란다 쪽의 1인용 소파 쪽으로 향했을 때, 나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끊기고 나니 바로 진동 소리도 끊겼다.
청 반바지에 양 팔 색깔이 각각 다른 귀여운 티셔츠를 입고 모자를 뒤집어 쓴 남준이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두 손은 곱게 깍지를 끼고서, 누가 보면 자는 게 아니라 꼭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만큼 단정하게. 발뒤꿈치를 들고 살짝 살짝 다가가 소파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남준의 휴대폰이 발치에 걸렸다. 도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아까 전화를 끊기 전에 나에게 했던 말들이 그제야 이해가 돼서 웃음이 나는 걸 억지로 참았다. 열흘 만에 마주하는 남준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옆에 사람이 온 줄도 모르고 쌕쌕 숨소리를 내며 잘도 잔다. 깨우고 싶진 않은데 견딜 수가 없어 손을 뻗었다. 잘생긴 눈썹을 지나 조금 수척해진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남준이 스르르 눈을 뜨며 내 손을 잡아온다.
“자는 사람 막 만지기 있어요, 없어요? 음흉해.”
“언제 왔어.”
“한시간 됐나?”
“저기 이불 펴놨는데 저기서 자고 있지 그랬어.”
“원래 자려던 거 아닌데, 깜빡 했네.”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지. 놀랐잖아.”
“신경 쓰이게 뭐 하러 그래요. 마감은 잘 했어요?”
“응, 지금 막 보냈어.”
“고생 많았어요.”
남준이 상체를 낮춰 내 어깨를 다정하게 끌어안는다. 잠든 사이 높아진 체온 때문인지 안긴 품이 따끈했다. 노곤해지려는 찰나 남준이 내 어깨를 확 떼어내고 인상을 쓴다.
“아, 이거 아닌데. 나 화내야 되는데.”
“왜. 아까 통화한 거 때문에?”
“열흘이나 못 본 애인한테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니, 그냥 말이라도 보러 오라고도 안 하고, 나 민망하게 만들고”
“너 보고 싶은 거는 맞는데, 피곤할까봐 그랬지, 나는...”
“아무리 힘들어서 쓰러질 거 같아도 애인이 보고 싶은데 지금 와 주면 안 되냐고 하면 당장 달려 간다구요, 나는.”
불만이 단단히 쌓였는지 마구 투덜대는 남준을 보고 있으니 또 웃음이 샐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평소에도 늘 본인만 표현을 너무 하는 거 같다며, 남자와 여자가 바뀐 것 같다며, 어디 가서 상남자로는 안 꿀리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며 나에게 하소연을 늘어놓던 남준이 떠올랐다. 그렇게 듣고 싶다면 들려드려야지.
손가락으로 남준의 찌푸려진 미간을 꾸욱 누르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기야, 보고 싶은데 지금 와 주면 안 돼?”
“....끄학”
“얼굴 빨개진 거 봐. 어이구, 그렇게 좋으세요?”
“네.”
“어, 그, 그래.”
“좋아, 진짜, 네가, 너무.”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자 엉망인 얼굴에 마구 뽀뽀하는 남준을 밀어내며 바닥에서 일어나 남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자.”
어벙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간다. 마감이 다 끝나면 바로 슬라이딩 해 잠들기 위해 거실 구석에 펴놓은 이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낮잠 자자고. 무슨 생각하는 거야? 음흉해.”
“...아무 생각도 안 했거든요? 참 나. 나를 무슨 짐승으로 알어.”
툴툴대면서도 이불 속으로 쏙 잘도 들어간다. 모자를 벗고 눌린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며 천장을 보고 눕는 남준의 곁에 모로 누웠다.
“내가 팔베개 해줄래!”
“....”
어이없는 눈으로 나를 보던 남준이 체념한 듯 목을 조금 들어올린다. 그 사이로 팔을 쏙 집어넣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준이 나에게 안긴 자세가 되었다. 남준의 팔이 내 허리를 감싼다. 단단한 어깨를 아이 잠재우듯 천천히 토닥였다.
“남준아, 요새는 회사에서도 낮잠 자는 시간을 준대.”
“우리가 다니는 회사는 그런 낭만적인 시에스타 따위 없잖아요.”
“시에스타. 그래, 그런 예쁜 이름도 있었지.”
“시에스타가 무슨 뜻인지 알아요?”
“무슨 뜻인데?”
“동 틀 때부터 정오 사이에 여섯 시간이 지난 후에 잠깐 쉴 수 있는 시간, 그러니까 여섯 번째 시간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된 거래요."
“똑똑한데.”
“김박사라고 불러줘요.”
“아냐, 김멋짐 할거야.”
“나랑 잠도 안 잘 거면서 멋지다고 하지 마요.”
“그래, 누나가 손만 잡고 잘게.”
“자꾸 속 뒤집어 놓지 진짜...”
“알았어, 알았어.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보자.”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무 손해야.”
“그래그래”
“내가 훨씬 젊은데”
“...그래그래”
“왜...나만...맨날 혼자 애태우고...그런데도 뭐가 좋다고...”
점점 말소리가 줄어들다 곧 고요해진다. 조금 더 어깨를 토닥이다가 슬쩍 내려다보니 눈을 감고 또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다. 놀리는 거에 발끈하다가도 뭘 물어보면 또 일일이 다 대답해주고, 그러다 또 툴툴대고, 그러면서도 다독이는 손길은 뿌리칠 생각도 안하고 결국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들다니. 고개를 숙여 후우, 바람을 불어본다. 미동도 안한다. 고생했어, 김남준. 말을 건네도 답이 없다. 도톰한 입술에 짧게 입 맞추었다. 그제야 남준이 으음, 하며 내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따끈따끈한 체온에 내 눈꺼플도 점점 무거워졌다. 오래간만에 맞이하는 너와 나의 여섯 번째 시간, 시에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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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입니다!
이래저래 정신없는 가운데 이 사진을 보고 한 방에 무릎을 꿇은 채ㅠㅠㅠㅠ눈코뜰새 없이 바쁠 남준이의 휴식을 위하여 끄적여본 글입니다요(실은 그저 사랑꾼 김남준이 보고 싶었을 뿐...연상의 연인에게 자기자기 하고 존댓말 반말 섞어쓰는 남준이가 보고싶었을 ㅃ...) 모두 건강하시죠? 읽어주시는 분들,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모두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