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요?
닿는 손길이 눅눅하고 뜨거웠다. 깊은 잠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해 깜빡이는 눈꺼풀이 무거웠다. 낡은 선풍기가 돌아가는 어두운 원룸의 침대 위, 모로 누운 내 앞에 앉은 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기 전에 코끝으로 밀려드는 소주 냄새에 한숨부터 길게 내쉬었다. 어깨를 쥔 커다란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겹친 손가락 마디를 매만지다 깍지를 껴온다.
“왔어?”
“...왜 아직 여기 있어요.”
“술 마셨어?”
“쪼오금― 냄새 많이 나요?”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얇은 후드를 뒤집어 쓴 구부정한 실루엣을 서서히 그려냈다. 관자놀이를 꾹꾹 짚다가 머리를 털며 푸흐, 소리를 내는 양 입 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는 것도, 가만히 있지 않고 몸이 흔들거리는 것도,
“쪼오금이 아닌데? 술도 약하면서 누구랑 이렇게 달린 거야.”
“음반사랑 갑자기 회식 잡혔다고 톡했는데...그때부터 계속 잔거에요?”
“그랬나봐. 지금 몇 신데?”
“열두 시.”
“헉”
“일 있다고 했었잖아요.”
“...그랬지. 아이고, 망했네.”
“아이고오”
음반에 책에 온갖 잡동사니들이 무질서의 질서를 이루며 사는 남준의 원룸에 놓고 간 서류가 갑자기 필요해져 잠시 다녀가겠다고 연락을 한 게 저녁 식사 마치자마자 바로였다. 일이 모처럼 일찍 끝날 것 같은데 못 만나니 아쉽다는 남준의 목소리에 집에서 기다렸다가 얼굴만 깜짝 비추고 잽싸게 가야지 생각하고 잠깐 침대에 누웠을 뿐인데, 열두 시라니! 벌떡 일어나 앓는 소리를 냈더니 남준이 내 목소리를 똑같이 따라하면서 아직 풀지 않은 손깍지 쪽으로 입을 맞추듯 고개를 떨궈 그대로 내 무릎에 기대었다. 평소 같으면 어떻게 하냐고 어떻게 해결하면 되겠냐고 나보다 호들갑을 더 떨었을 일인데. 남은 손으로 시커먼 후드에 뒤덮인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어지러워? 물 갖다 줄까? 여기 누울래?”
하나씩 물을 때마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더니 뒤통수에 올려둔 손을 붙잡아 내린다. 그냥, 조금만 이렇게 있자. 낮게 속삭이는 말에 나는 물끄러미 남준을 내려다보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불규칙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마른 등을, 꼼지락거리는 기다란 맨발을, 느릿하게 내 손등을 문지르는 뭉툭한 엄지손가락을, 깜빡이는 속눈썹을, 느낌만으로 그저 내려다보았다. 남준이 고개를 옆으로 틀어 볼을 기댄 채 입을 떼었다.
“좀 전에, 기분 되게 이상했어요.”
“왜?”
“항상 텅 비어있는 집에 들어왔더니 자기가 있어서, 물론 어쩌다 잠들어버린 거지만,”
“...”
“진짜 오늘만큼은 혼자 있기 싫었는데”
“...”
“왔어? 하고 나한테 물어봤잖아요. 순간 울컥하더라고요.”
큼, 괜히 코를 훌쩍이는 남준의 후드를 벗겨내었다. 마구잡이로 눌린 상아색 머리칼이 드러났다. 후드를 다시 휙 뒤집어쓰더니 주먹을 말아 쥐곤 침대를 약하게 두들긴다. 악, 쪽팔려, 취했나봐, 나. 웅얼웅얼. 속으로 웃으며 다시 후드를 벗겼다. 몇 번의 실랑이가 이어지고 후드가 벗겨진 상태에서 작게 투정하며 남준이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빤히 보던 남준이 갑자기 내 쪽으로 와락 몸을 무너뜨렸다. 마치 대형견 한마리가 치대오는 느낌이었다. 갑작스런 무게에 놀라 휘적대던 두 팔로 남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등을 천천히 다독였다. 곧 자세를 고치곤 나를 마주 안아오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남준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주정뱅이 김남준 오랜만에 보네.”
“그러게요. 늘 나보다 먼저 꽐라가 되시니까...”
“뭐야아?”
“흐흐”
“회식하면서 뭐 안 좋았어?”
“으응...별건 아닌데....또 수정 작업 들어갈 것 같아요. 뭐가 그렇게들 맘에 안 드는지.”
“세상에, 우리 우주 최고 작곡가의 명곡을 몰라보고 도대체 이게 몇 번째야? 그 사람들 어디 사는 누구야? 아주 혼쭐을 내줘야겠네.”
다정하게 힘내라고 말해주기, 애정표현하기, 이런 거 진짜 못하는데, 뭐라도 하긴 해야 겠어서 괜히 더 부풀리듯 어설프고 크게 열을 냈더니 대꾸하는 남준의 목소리에 놀라움과 웃음이 가득 묻어났다.
“...설마 지금 나 위로해주는 거예요?”
“...티 나?”
“아니, 말로만 하는 건 티 하나도 안 나, 몸으로 보여줘야지”
“뭘 어떻게 보여줘.”
“키스해요.”
“하여간 틈만 나면,”
“키스하자”
“싫어”
“왜요.”
“술 냄새 나.”
“아, 만날 뭐 땜에 싫다 뭐 땜에 안 된다, 나 술 몇 잔 먹지도 않았는데 술 냄새 난다 그러고, 자꾸 이럴 거면 우리 계약서 같은 거라도 써요, 어? 하루에 뽀뽀, 몇, 웁”
그런 내 서투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서 장난스럽게(분명 진담도 많이 섞여있긴 했지만) 투덜거리는 남준에게 먼저 키스했다. 맞닿은 채로 남준의 입술이 길게 호선을 그리는 것이 느껴졌다. 곧 진하고 따뜻하게 휘감는 느낌에 고개를 틀며 등을 안고 있던 두 손을 남준의 양 볼로 옮겨왔다. 손가락으로 볼을 쓰다듬는데 순간 남준이 윽, 하고 아픈 소리를 내더니 뒤로 물러섰다. 내 손가락 끝에 닿았던 감각 역시 이상해 빠르게 손을 뻗어 스탠드를 켰다. 볼을 감싸려던 손으로 부신 눈을 가리는 남준의 오른쪽 얼굴 가운데에 빨간 생채기가 떡하니 그어져 있었다.
“너 얼굴이 왜,”
“아, 이거 깜빡하고 있었네...그냥 긁힌 거예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난 남준이 뒷걸음질 치며 멀어진다. 뒷목이 찌르르 울려왔다.
“이리 와봐.”
“싫어! 암것도 아니라니까.”
“싸웠어??”
“내가 누구랑 싸워???”
“아님 일방적으로 맞은 거야?????”
“...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얼굴이에요?”
“...그건 아니지. 그럼 뭐야? 말 해 얼른.”
“...”
“준아. 나 갈까?”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지만 남들은 애정이 넘칠 때 부른다는 이름 맨 끝 자를 화낼 때 부르는 게 버릇이 되어버렸다. 고개만 도리도리 젓고 있던 남준이 내 가라앉은 목소리에 머리를 긁적이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가까이 올 생각은 없어보여서 나는 침대 구석에 널브러진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야겠네, 집에. 다급하게 눈을 굴리던 남준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 연습하다가 내가 내 얼굴 마이크로 찍은거야아!!!”
“...뭐? 마이크로 네 얼굴을 왜 찍어?”
“내 말이요...남이 그런 거면 남 탓이라도 하지, 진짜, 꼬이려니까 별 게 다...”
“풉”
“이래서 내가 말 안하려고 한 거야. 웃지 마요?”
“푸하하하”
“으씨”
걱정은 되는데 나도 모르게 시작된 웃음을 주체 못하고 배를 움켜쥐고 있으니 남준도 씩씩대다가 그만 따라 웃고 만다. 아, 내가 왜 웃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하면서. 으이구, 바보야.
김남준의 집에 구급상자 같은 게 있을 리 없고, 가방을 뒤져보니 비상용으로 챙겨둔 반창고 몇 개가 나와서 그거라도 붙이기로 했다. 가까이서 보니 상처가 그리 깊지는 않았다. 얌전히 내 앞에 앉아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감은 남준을 보고 있으니 또 어이가 없어져서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걸 입술을 꼭 깨물며 참았다. 이번에 웃으면 진짜 삐질 것 같아서. 웃음을 참아내고 나니 또 괜히 안쓰럽고 심술 내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도대체가 조심성이 없어.
“너랑 부딪힌 그 마이크는 괜찮대?”
“자꾸 놀려요. 그러다 후회한다.”
“그러니까 좀 조심해 제발. 네 몸이 네 거야??”
“그럼 누구 건데?”
밴드를 붙이고 나니 질풍노도를 겪는 남고딩 같아진 남준이 한쪽 눈만 슬쩍 들어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네, 네 거 맞아. 그러니까 간수 잘 하라고,”
“....꼭 분위기를 깨야 속이 시원해요?”
“아 뭐가! 다 붙였으니까 저리가.”
“다시, 내 몸은 누구 꺼?”
“너희 가족 꺼.”
“중복 정답이 있습니다. 누구 꺼?”
“네 친구들 꺼?”
“집에 안 들어가고 싶으세요, 오늘?”
“협박이냐?”
“그래. 협박이다.”
“그래, 집에 안 들어갈란다, 오늘.”
“뭐, 뭐요?”
“왜, 떨리세요, 김남준씨?”
“...아 진짜 이 여자가 겁도 없이 자꾸 이러면은,”
오예입니다.
내 허리를 감싸안는 남준의 얼굴이 시원하게 웃고 있었다. 마주 웃으며 손을 뻗어 스탠드 불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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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오랜만입니다! 개인적으로 정신이 없었던 것도 있고 인스티즈에 글을 올리는 게 조금 조심스럽기도 해서 한동안 격조했습니다. 모두들 잘 지내시지요? 방탄이들이 컴백을 코앞에 둔 요즘, 이래저래 지쳐있을 남준이가 기댈 곳이 어딘가에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끄적여본 글이에요. 며칠 후면 치명치명한 아이들을 보게 될테니 일단은 릴렉스하는 의미로 달달하게, 느긋하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연재를 길게 하는 것도 아니고 새 글 텀도 느리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큰데요. 그러기에 글잡이 저에게 너무 오픈된 공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처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조심스럽고 고민이 많이 되네요. 가장 좋은 쪽으로 방법을 한 번 찾아볼게요^^(아무도 안 궁금해하실거야...) 읽어주시는 분들, 댓글 남겨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