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형은 허름한 건물의 계단을 쏜살같이 내려갔다. 몹시 더워 푹푹찌는와중에 비가 내리려는지 하늘의 낌새가 여간 수상한게아니었다. 태형이 미간을 가득 구부렸다. 오늘은 정말 되는일이없군, 작게 읆조리고선 택시를 잡으러 큰길가로 나가려는데 큰길가 건너편의 약국이 눈에 띄였다. 약국 주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는 문을 닫으려는듯 작대기로 철 셔터를 내리고 있었다. " …젠장맞을, 잠깐만요! " 태형이 급하게 달려나가며 노인에게 소리쳤지만 노인은 귀가 잘 들리지않는지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셔터를 잡아내리고있었다. 셔터가 반정도 내려졌을때 태형이 손으로 셔터를 급하게 받치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당황한듯 벙찐 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보았다. " 그… 연고요. 어디 다쳤을때, 살 붙는? 아니, 다 붙으면 안되지만, 아무튼 다쳤을때 바르는거요. " 큰길가에 나오기 전부터 다급하게 달려온 태형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횡설수설하게 설명했다. 인심좋아보이는 노인은 알았다는듯 철 셔터를 다시 올리더니 약국으로 들어가 작은 연고를 꺼내가지고 나왔다. 태형이 돈을 지불하려고 주머니를 뒤지려는데 노인이 태형의 손에 그대로 연고를 쥐어주었다. " 돈 받기도 귀찮으니 그냥 가져가게. " " 그래도 돈은 받으셔야죠. " " 이 가게도 오늘이 마지막이야, 빌어먹을놈들, 약국이라고 거듭 말했는데도 여기가 무슨 병원인줄알더군. 이제 진절머리가 났어. " " … " " 그렇게 돈을 내고싶어 죽겠다면 가게 셔터나 닫게나, 등이 굽어서 힘들어. " 태형이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손을뻗어 셔터를 내렸다. 기껏해야 연고가 얼마나 한다고, 노인이 털털하게 웃으며 말했다. 태형은 노인에게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오랜만에 해보는 말이라고 생각한 태형이 다시 큰 길을 건넜다. " 진짜 별짓을 다하게 하는군. " 다시 윤기의 집으로 돌아간 태형이었다. 현관문을 소리나지않게 주의해서 살짝열었는데, 이렇게까지 조심스럽게 행동할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평소처럼 걸었다. 하지만 괜시리 윤기가 깰까 하는 마음에 다시 살금살금 걸어가 침대옆 협탁에 연고를 내려놓았다. 협탁을 등지고 잠에든 윤기의 등에 척추뼈가 드러나있었다. 보기싫을정도로 튀어나온것은 아니었으나 아마 마약을 못끊고 계속하게된다면 머지않아 그렇게될것이 눈에 훤했다. 좀 들어가라, 태형이 윤기의 척추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댔다. 윤기는 제법 깊은 잠에 빠졌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색색 하는 숨만 내뱉었다. 태형이 다시 밖으로 나오자 비가 주적주적 내리기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큰길가로 뛰어 나갔더니 마침 택시가 오는것이 보여 택시를 잡아탔다. " 뭐야, V. 네가 이시간에 왜… " 택시기사는 태형을 알아보는듯 말을 걸어왔다. 태형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 존, 요즘 성실하게 산다는 소문이 돌더니만 고작 택시기사였던가? " " 하하, 마약상보다는 낫지않겠나? 어디로 갈거야? " " 오랜만에 내 친구가 좋아하는 맥주집에 가고싶은데, 내 친구가 좋아할지는 모르겠군. " 태형이 제법 마른 백인 택시기사에게 찡긋 윙크를하자, 택시기사는 토하는 시늉을 내더니 호탕하게 웃으며 엑셀을 밟았다. 존은 불과 1년전까지만해도 태형과 함께 마약상을 하던 친구였다. 꽤나 능청맞은 성격에 공과 사는 확실히 구별하는 사업적인 성격은 그가 고학력자였다면 아마 유능한 비즈니스맨이 되지않았을까 어림짐작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나마 태형이 마음을 풀고 다가갈수있는 상대였기때문에 그가 없는 1년동안 태형은 누구에게 속풀이를 해야할지 몰라 크게 난감했다. 하필 만난게 근심가득한 오늘이라니, 되는일이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나보다. " V, 네가 먼저 술을 권할정도라면 할 얘기가 많다는건데. " " 내가 친구한테 술 한번 먼저 안권하고 살았던가? " " 기억도 안나? 어쨌든 빌어먹을 마약얘기라면 집어쳐. 난 이제 하얀 표백제만봐도 토가 쏠린다고. " " 마약 얘기는 아냐. " " 그렇다면 돈? " " … " " …아니군, 설마. " 존이 룸미러 너머로 태형을 슬쩍 바라보자, 머쓱하게 웃는 태형이 보였다. 존의 얼굴에 금새 흥미롭다는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 맙소사, 아무 얘기도 하지마. 도착해서 하자고. " 존과 함께 일하는 수년동안 태형은 연애에 대한 고민을 한적이 없었다. 그건 태형의 여자쪽으론 취향이 없었다는것도 영향이있었지만,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도통 사람을 믿지않는 턱에 마음을 여는 사람이 없었던것이다. 그렇다고 태형이 놀줄 모르는 고리타분한 사내는 아니었기에 여러 남자와 여자를 갈아치우는 모습을 꾸준히 봐왔던 존이었다. 하지만 진지한 감정을 가진적은 없었기때문에 태형의 연애사를 듣는건 무척이나 생소하게느껴졌다. 존의 택시가 어느 번화가에서 멈췄다. 번지르르한 5번가는 아니었지만 슬럼가에 비하면 제법 근사했다.여전히 왁자지껄한 맥주집은 태형과 존에게 어린날의 향수를 품게했다. 열여덟살때부터 다닌 맥주집에는 주황색 조명, 왁자지껄한 분위기, 특유의 달싹지근한냄새, 어디가 10점짜리인지 헷갈릴정도로 구멍이 뚫린 다트판, 여전히 뚱뚱한 주인아저씨까지, 변한거 하나 없이 완벽했다. " V, 처음왔을때 기억나? 꼴에 잔뜩 멋부리고서 어깨에 힘 주고 들어왔잖아. " " 아, 맥도날드온것마냥 멍청하게 주문했다가 어린이 세트로 가져다드릴까? 했던 멍청하게생긴 꼰대 낮짝도 떠오르는군. " 둘은 서로에게 가벼운 농을 던지며 웃음을 지었다. 뚱뚱한 주인아저씨는 둘의 모습을 기억하는듯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맥주와 감자튀김을 가져다 주었다. 주황색조명아래의 노란빛깔 맥주와 감자튀김이 먹음직스럽게 놓여지자, 존은 일을 하느라 저녁끼니를 거른것인지 바로 손을뻗어 감자튀김을 우악스레 입에 넣었다. " 성실하게 사는 택시기사가 먹기전에 하나님께 기도도 안드리는군? " 태형이 농담스러운 어투로 비아냥대자, 존이 머쓱하게 웃으며 기도하려는듯 손을 모으더니 바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마치 열여덟살의 서로를 바라보는것같은 기분에 훈훈한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 그래서, V를 꼬셔버린 빌어먹을 여우년이 누구야? " " 여우년이라니, 말조심해. " " 어지간히도 아끼나보네, 그전에… " " …? " " 어차피 난 마약계에서 발도 뺐고, 이제 그만 친구의 실명을 부르고싶은데. " 태형은 잠시 고민을했다. 존은 확실히 믿음직한 친구였고 마약계에서도 발을 뺐기때문에 태형의 실명을 알려주는것은 어렵지않았다. 그리고 사실상 태형의 실명은 그렇게 큰 의미도없었다. 그저 태형이 마약계에 발을 담그면서 스스로 정한 스스로의 룰이었을뿐이다. " V가 편해. " 태형이 말했다. 존은 그런 태형의 모습이 익숙하다는듯 서운한 기색없이 고개를 끄덕여왔다. " 그럼 본론으로 가지. V를 꼬셔버린 공주폐하는 누구신가? " " 하얗고, 늘씬하고, 흑발이야. 동양인인데. 피부가 정말 하얘. 백인보다 하얘 보일때가 있을 정도로. 근데, " " 근데? " " 중독자야. 헤로인. " 태형의 입에서 중독자라는 말이 나오자 존은 굉장히 실망한 태도로 태형을 바라보았다. 존의 시선에 태형이 머쓱하게 맥주잔만을 바라보았다. 맥주안의 자잘한 탄산들이 잔 가장자리에 다닥다닥 붙어있는듯 하더니 위로 떨어져나와 하나두개씩 톡톡 터지는 모습이 괜시리 우스꽝스러웠다. " V, 중독자는… " " 나도 알아, 끊게 할거라구. " " 좋아, 어느정도로 중독되어있는데? " " … " " 말해봐. 중독정도에 따라서 그에 맞는 해결책을 세워주지. " " …약을 댓가로 매춘을 할 정도? 근데… " " 젠장, 정신 나갔군. V, 내생각엔. " " 알아, 안다구. 내가 다른사람이랑 거래하지 말라고 했어. " 존이 말없이 담배를 꺼내물었다. 순식간에 테이블 주변이 연기로 자욱해졌다. " 그래서, " " …? " " 너랑 그사람 관계도 거래하는 관계라는거군? " " … " " 그 사람이 널 좋아한데? 딱 그리 말하던가? " " 아니, 아직… " " 그렇다면 다른사람이랑 거래하지 말라는 말을 잘 듣던가? " " 오늘 말했어. " 존의 표정이 확 구겨지자, 태형이 무안한 마음에 입술을 달싹였다. 존의 말은 틀린것이없었다. 따지고 보자면 윤기가 좋아서 쫒아다니는것은 명백히 태형쪽이었고, 그에 대해 윤기는 일체의 반응을 보이지않았다. 약에 취하지않았을때 태형을 찾아온것빼고, 윤기의 집에서 태형을 보자마자 안겨든것을 빼면 남는것이 거의 없었다. 단지 결정적으로 실명과 닉네임을 함께 알려주었을때 항상 실명으로 불렀다는것이 결정적이었으나 사실 윤기의 동양인인 입장에서 부르기 쉬운 실명을 선택했다고 치자면 그렇게 결정적인것도 아니었다. " 빌어먹을, V, 난 네 눈이 그렇게 낮은줄 몰랐어. " " 나도 몰랐어. 그냥 처음봤을땐, 중독자같아서 놀려줄까 싶었는데… " " … " " 얼굴을 들여올려봤는데, 그러니까, 너무 예쁜거야. 한눈에 반했어. 정신나간거같지? 난 한눈에 반하는게 빌어먹을 삼류드라마에서만 나오는것인줄 알았다고. " " 말그대로 삼류드라마로군, 마약쟁이 여자친구에 마약판매상 남자친구라니 아주 잘 어울리는 조합이야. " 태형이 고개를 들어올려 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존은 새 담배를 꺼내 물어 불을 붙이고있었다. " 여자친구가 아니야, 남자라고. " 존이 담배연기를 깊게 빨아들이다가 켁켁 대며 내뱉었다. 아마 여태까지 윤기가 여자인줄 알고있었겠지. " 가지가지하는구만, 네 취향이 그쪽인건 알고있었지만, 네 빌어먹을 애인이 호모에 창남에 마약쟁이일줄은 꿈에도 몰랐어. " " 그런식으로 말하지마, 원해서 매춘하는게 아니라는걸 너도 알잖아. " " 잘 알지, V. 네가 정말 삼류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그가 좋아 미칠것같다면 말리지않겠다만, 네 친구의 입장으론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고싶어. "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면 조금이라도 착잡한마음이 풀릴까싶어 존에게 털어놓은건데, 오히려 더 착잡해진 마음이 태형의 어깨를 꾹 꾹 짓누르는것 같았다. 태형은 거의 비워진 감자튀김 그릇을 보더니 다른 안주를 하나 더 시켰다. " 나도 내가 멍청한 병신 머저리같다는걸 알아. 사실 만난지도 이틀밖에 안됐어. 이틀만에 이렇게 사람머릿속에 꽉 들어차선 어떻게 빠져나갈 방도가 보이질않아. " " … " " 실명을 알려줬어, 매춘을 하고 온날 물었지. 네 앞에있는게 V인지 '나' 인지. " " …하, " " 날 택하더라. 그냥 그걸로 정했어. V를 택했다면 어찌어찌 정리할수도 있었겠지만, 아니, 정리 못했을거지만. 아무튼간에 날 택한거야. " " … " " 그리고 매춘도 아니었어. 일방적인 강간이었다고. 내가 옷을 벗겨내니까 몸을 덜덜 떨면서 울었어. 피도 났다고. 너도 그 반응이 연기로 나오는 반응이 아니라는것쯤은 알잖아. " " 잘 알지. " 새로운 안주가 나왔지만 존은 물끄러미 태형의 눈만을 바라보았다. " 젠장, 네 빌어먹을 사랑에빠진 눈을 보니까 욕을 못하겠잖아. " " … " " 마약치료에 쓰이는 약이 있긴한데. " " …? " " 메타돈, 들어는 봤겠지. 마약성이긴해, 그런데 다른 마약과는 달리 도취감이적어. 말그대로 진통역할만 하지. 뭐, 상태에 따라 부작용은 거의 비슷하지만. " " … " " 그걸 써봐, 결국엔 쾌감을 쫒아서 마약을 다시 하는게 대다수이긴하다만, 본인의지가 있다면 끊을수도있겠지. " 존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새로나온 안주를 입안에 우겨넣기 시작했다. 태형의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상태로 존의 모습을 바라보자, 시선을 느꼈는지 존이 고개를 치켜올렸다. " 난 네 애인을 인정한게 아냐. 혹시나 내앞에 데려올 작정이라면 약부터 끊고 데려와. " 존의 표정이 단호했다. 태형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존은 슬쩍 미소지으며 여지껏 어떻게 지내왔는지에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방금전까지만해도 착잡한 분위기였던 술자리가 순식간에 맥주집 특유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동화되는 느낌을 풍겼다. ----------------------------------------------------------------------------------------------------------------------------------------------------------- 오늘은 좀 길게 가져왔습니다! 일요일은 좀 쉬려구요ㅠㅠ사실 윤기와 태형이의 관계는 아직 애인도아니고 뭐 그저그런 꽁기꽁기한 관계인데말이죠..오늘은 불맠이없군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호시기호시기해 융기쨔응 비리미 명치 유니크 복숭 22 독방 민트초코 태태매거진 슈가 깨끗한나라 TRG-42 에어컨 )암호닉이 또 늘어났습니다! 야호! 신난다!제 글 읽고 뷔슙 영업당했다는 말이 어찌나 듣기 좋은지몰라요ㅠㅠ내가 초록글이라닜!... 신난다! 암호닉은 가장 최근화에 신청해주세요~
태형은 허름한 건물의 계단을 쏜살같이 내려갔다. 몹시 더워 푹푹찌는와중에 비가 내리려는지 하늘의 낌새가 여간 수상한게아니었다. 태형이 미간을 가득 구부렸다. 오늘은 정말 되는일이없군, 작게 읆조리고선 택시를 잡으러 큰길가로 나가려는데 큰길가 건너편의 약국이 눈에 띄였다. 약국 주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는 문을 닫으려는듯 작대기로 철 셔터를 내리고 있었다.
" …젠장맞을, 잠깐만요! "
태형이 급하게 달려나가며 노인에게 소리쳤지만 노인은 귀가 잘 들리지않는지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셔터를 잡아내리고있었다. 셔터가 반정도 내려졌을때 태형이 손으로 셔터를 급하게 받치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당황한듯 벙찐 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보았다.
" 그… 연고요. 어디 다쳤을때, 살 붙는? 아니, 다 붙으면 안되지만, 아무튼 다쳤을때 바르는거요. "
큰길가에 나오기 전부터 다급하게 달려온 태형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횡설수설하게 설명했다. 인심좋아보이는 노인은 알았다는듯 철 셔터를 다시 올리더니 약국으로 들어가 작은 연고를 꺼내가지고 나왔다. 태형이 돈을 지불하려고 주머니를 뒤지려는데 노인이 태형의 손에 그대로 연고를 쥐어주었다.
" 돈 받기도 귀찮으니 그냥 가져가게. "
" 그래도 돈은 받으셔야죠. "
" 이 가게도 오늘이 마지막이야, 빌어먹을놈들, 약국이라고 거듭 말했는데도 여기가 무슨 병원인줄알더군. 이제 진절머리가 났어. "
" … "
" 그렇게 돈을 내고싶어 죽겠다면 가게 셔터나 닫게나, 등이 굽어서 힘들어. "
태형이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손을뻗어 셔터를 내렸다. 기껏해야 연고가 얼마나 한다고, 노인이 털털하게 웃으며 말했다. 태형은 노인에게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오랜만에 해보는 말이라고 생각한 태형이 다시 큰 길을 건넜다.
" 진짜 별짓을 다하게 하는군. "
다시 윤기의 집으로 돌아간 태형이었다. 현관문을 소리나지않게 주의해서 살짝열었는데, 이렇게까지 조심스럽게 행동할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평소처럼 걸었다. 하지만 괜시리 윤기가 깰까 하는 마음에 다시 살금살금 걸어가 침대옆 협탁에 연고를 내려놓았다. 협탁을 등지고 잠에든 윤기의 등에 척추뼈가 드러나있었다. 보기싫을정도로 튀어나온것은 아니었으나 아마 마약을 못끊고 계속하게된다면 머지않아 그렇게될것이 눈에 훤했다. 좀 들어가라, 태형이 윤기의 척추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댔다. 윤기는 제법 깊은 잠에 빠졌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색색 하는 숨만 내뱉었다. 태형이 다시 밖으로 나오자 비가 주적주적 내리기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큰길가로 뛰어 나갔더니 마침 택시가 오는것이 보여 택시를 잡아탔다.
" 뭐야, V. 네가 이시간에 왜… "
택시기사는 태형을 알아보는듯 말을 걸어왔다. 태형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 존, 요즘 성실하게 산다는 소문이 돌더니만 고작 택시기사였던가? "
" 하하, 마약상보다는 낫지않겠나? 어디로 갈거야? "
" 오랜만에 내 친구가 좋아하는 맥주집에 가고싶은데, 내 친구가 좋아할지는 모르겠군. "
태형이 제법 마른 백인 택시기사에게 찡긋 윙크를하자, 택시기사는 토하는 시늉을 내더니 호탕하게 웃으며 엑셀을 밟았다. 존은 불과 1년전까지만해도 태형과 함께 마약상을 하던 친구였다. 꽤나 능청맞은 성격에 공과 사는 확실히 구별하는 사업적인 성격은 그가 고학력자였다면 아마 유능한 비즈니스맨이 되지않았을까 어림짐작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나마 태형이 마음을 풀고 다가갈수있는 상대였기때문에 그가 없는 1년동안 태형은 누구에게 속풀이를 해야할지 몰라 크게 난감했다. 하필 만난게 근심가득한 오늘이라니, 되는일이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나보다.
" V, 네가 먼저 술을 권할정도라면 할 얘기가 많다는건데. "
" 내가 친구한테 술 한번 먼저 안권하고 살았던가? "
" 기억도 안나? 어쨌든 빌어먹을 마약얘기라면 집어쳐. 난 이제 하얀 표백제만봐도 토가 쏠린다고. "
" 마약 얘기는 아냐. "
" 그렇다면 돈? "
" …아니군, 설마. "
존이 룸미러 너머로 태형을 슬쩍 바라보자, 머쓱하게 웃는 태형이 보였다. 존의 얼굴에 금새 흥미롭다는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 맙소사, 아무 얘기도 하지마. 도착해서 하자고. "
존과 함께 일하는 수년동안 태형은 연애에 대한 고민을 한적이 없었다. 그건 태형의 여자쪽으론 취향이 없었다는것도 영향이있었지만,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도통 사람을 믿지않는 턱에 마음을 여는 사람이 없었던것이다. 그렇다고 태형이 놀줄 모르는 고리타분한 사내는 아니었기에 여러 남자와 여자를 갈아치우는 모습을 꾸준히 봐왔던 존이었다. 하지만 진지한 감정을 가진적은 없었기때문에 태형의 연애사를 듣는건 무척이나 생소하게느껴졌다. 존의 택시가 어느 번화가에서 멈췄다. 번지르르한 5번가는 아니었지만 슬럼가에 비하면 제법 근사했다.여전히 왁자지껄한 맥주집은 태형과 존에게 어린날의 향수를 품게했다. 열여덟살때부터 다닌 맥주집에는 주황색 조명, 왁자지껄한 분위기, 특유의 달싹지근한냄새, 어디가 10점짜리인지 헷갈릴정도로 구멍이 뚫린 다트판, 여전히 뚱뚱한 주인아저씨까지, 변한거 하나 없이 완벽했다.
" V, 처음왔을때 기억나? 꼴에 잔뜩 멋부리고서 어깨에 힘 주고 들어왔잖아. "
" 아, 맥도날드온것마냥 멍청하게 주문했다가 어린이 세트로 가져다드릴까? 했던 멍청하게생긴 꼰대 낮짝도 떠오르는군. "
둘은 서로에게 가벼운 농을 던지며 웃음을 지었다. 뚱뚱한 주인아저씨는 둘의 모습을 기억하는듯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맥주와 감자튀김을 가져다 주었다. 주황색조명아래의 노란빛깔 맥주와 감자튀김이 먹음직스럽게 놓여지자, 존은 일을 하느라 저녁끼니를 거른것인지 바로 손을뻗어 감자튀김을 우악스레 입에 넣었다.
" 성실하게 사는 택시기사가 먹기전에 하나님께 기도도 안드리는군? "
태형이 농담스러운 어투로 비아냥대자, 존이 머쓱하게 웃으며 기도하려는듯 손을 모으더니 바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마치 열여덟살의 서로를 바라보는것같은 기분에 훈훈한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 그래서, V를 꼬셔버린 빌어먹을 여우년이 누구야? "
" 여우년이라니, 말조심해. "
" 어지간히도 아끼나보네, 그전에… "
" …? "
" 어차피 난 마약계에서 발도 뺐고, 이제 그만 친구의 실명을 부르고싶은데. "
태형은 잠시 고민을했다. 존은 확실히 믿음직한 친구였고 마약계에서도 발을 뺐기때문에 태형의 실명을 알려주는것은 어렵지않았다. 그리고 사실상 태형의 실명은 그렇게 큰 의미도없었다. 그저 태형이 마약계에 발을 담그면서 스스로 정한 스스로의 룰이었을뿐이다.
" V가 편해. "
태형이 말했다. 존은 그런 태형의 모습이 익숙하다는듯 서운한 기색없이 고개를 끄덕여왔다.
" 그럼 본론으로 가지. V를 꼬셔버린 공주폐하는 누구신가? "
" 하얗고, 늘씬하고, 흑발이야. 동양인인데. 피부가 정말 하얘. 백인보다 하얘 보일때가 있을 정도로. 근데, "
" 근데? "
" 중독자야. 헤로인. "
태형의 입에서 중독자라는 말이 나오자 존은 굉장히 실망한 태도로 태형을 바라보았다. 존의 시선에 태형이 머쓱하게 맥주잔만을 바라보았다. 맥주안의 자잘한 탄산들이 잔 가장자리에 다닥다닥 붙어있는듯 하더니 위로 떨어져나와 하나두개씩 톡톡 터지는 모습이 괜시리 우스꽝스러웠다.
" V, 중독자는… "
" 나도 알아, 끊게 할거라구. "
" 좋아, 어느정도로 중독되어있는데? "
" 말해봐. 중독정도에 따라서 그에 맞는 해결책을 세워주지. "
" …약을 댓가로 매춘을 할 정도? 근데… "
" 젠장, 정신 나갔군. V, 내생각엔. "
" 알아, 안다구. 내가 다른사람이랑 거래하지 말라고 했어. "
존이 말없이 담배를 꺼내물었다. 순식간에 테이블 주변이 연기로 자욱해졌다.
" 그래서, "
" 너랑 그사람 관계도 거래하는 관계라는거군? "
" 그 사람이 널 좋아한데? 딱 그리 말하던가? "
" 아니, 아직… "
" 그렇다면 다른사람이랑 거래하지 말라는 말을 잘 듣던가? "
" 오늘 말했어. "
존의 표정이 확 구겨지자, 태형이 무안한 마음에 입술을 달싹였다. 존의 말은 틀린것이없었다. 따지고 보자면 윤기가 좋아서 쫒아다니는것은 명백히 태형쪽이었고, 그에 대해 윤기는 일체의 반응을 보이지않았다. 약에 취하지않았을때 태형을 찾아온것빼고, 윤기의 집에서 태형을 보자마자 안겨든것을 빼면 남는것이 거의 없었다. 단지 결정적으로 실명과 닉네임을 함께 알려주었을때 항상 실명으로 불렀다는것이 결정적이었으나 사실 윤기의 동양인인 입장에서 부르기 쉬운 실명을 선택했다고 치자면 그렇게 결정적인것도 아니었다.
" 빌어먹을, V, 난 네 눈이 그렇게 낮은줄 몰랐어. "
" 나도 몰랐어. 그냥 처음봤을땐, 중독자같아서 놀려줄까 싶었는데… "
" 얼굴을 들여올려봤는데, 그러니까, 너무 예쁜거야. 한눈에 반했어. 정신나간거같지? 난 한눈에 반하는게 빌어먹을 삼류드라마에서만 나오는것인줄 알았다고. "
" 말그대로 삼류드라마로군, 마약쟁이 여자친구에 마약판매상 남자친구라니 아주 잘 어울리는 조합이야. "
태형이 고개를 들어올려 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존은 새 담배를 꺼내 물어 불을 붙이고있었다.
" 여자친구가 아니야, 남자라고. "
존이 담배연기를 깊게 빨아들이다가 켁켁 대며 내뱉었다. 아마 여태까지 윤기가 여자인줄 알고있었겠지.
" 가지가지하는구만, 네 취향이 그쪽인건 알고있었지만, 네 빌어먹을 애인이 호모에 창남에 마약쟁이일줄은 꿈에도 몰랐어. "
" 그런식으로 말하지마, 원해서 매춘하는게 아니라는걸 너도 알잖아. "
" 잘 알지, V. 네가 정말 삼류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그가 좋아 미칠것같다면 말리지않겠다만, 네 친구의 입장으론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고싶어. "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면 조금이라도 착잡한마음이 풀릴까싶어 존에게 털어놓은건데, 오히려 더 착잡해진 마음이 태형의 어깨를 꾹 꾹 짓누르는것 같았다. 태형은 거의 비워진 감자튀김 그릇을 보더니 다른 안주를 하나 더 시켰다.
" 나도 내가 멍청한 병신 머저리같다는걸 알아. 사실 만난지도 이틀밖에 안됐어. 이틀만에 이렇게 사람머릿속에 꽉 들어차선 어떻게 빠져나갈 방도가 보이질않아. "
" 실명을 알려줬어, 매춘을 하고 온날 물었지. 네 앞에있는게 V인지 '나' 인지. "
" …하, "
" 날 택하더라. 그냥 그걸로 정했어. V를 택했다면 어찌어찌 정리할수도 있었겠지만, 아니, 정리 못했을거지만. 아무튼간에 날 택한거야. "
" 그리고 매춘도 아니었어. 일방적인 강간이었다고. 내가 옷을 벗겨내니까 몸을 덜덜 떨면서 울었어. 피도 났다고. 너도 그 반응이 연기로 나오는 반응이 아니라는것쯤은 알잖아. "
" 잘 알지. "
새로운 안주가 나왔지만 존은 물끄러미 태형의 눈만을 바라보았다.
" 젠장, 네 빌어먹을 사랑에빠진 눈을 보니까 욕을 못하겠잖아. "
" 마약치료에 쓰이는 약이 있긴한데. "
" 메타돈, 들어는 봤겠지. 마약성이긴해, 그런데 다른 마약과는 달리 도취감이적어. 말그대로 진통역할만 하지. 뭐, 상태에 따라 부작용은 거의 비슷하지만. "
" 그걸 써봐, 결국엔 쾌감을 쫒아서 마약을 다시 하는게 대다수이긴하다만, 본인의지가 있다면 끊을수도있겠지. "
존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새로나온 안주를 입안에 우겨넣기 시작했다. 태형의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상태로 존의 모습을 바라보자, 시선을 느꼈는지 존이 고개를 치켜올렸다.
" 난 네 애인을 인정한게 아냐. 혹시나 내앞에 데려올 작정이라면 약부터 끊고 데려와. "
존의 표정이 단호했다. 태형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존은 슬쩍 미소지으며 여지껏 어떻게 지내왔는지에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방금전까지만해도 착잡한 분위기였던 술자리가 순식간에 맥주집 특유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동화되는 느낌을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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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좀 길게 가져왔습니다! 일요일은 좀 쉬려구요ㅠㅠ
사실 윤기와 태형이의 관계는 아직 애인도아니고 뭐 그저그런 꽁기꽁기한 관계인데말이죠..
오늘은 불맠이없군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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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이 또 늘어났습니다! 야호! 신난다!
제 글 읽고 뷔슙 영업당했다는 말이 어찌나 듣기 좋은지몰라요ㅠㅠ
내가 초록글이라닜!...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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