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번에 한상혁이 말한 것이 기억난다.
아무렇지도 않게 닭다리를 뜯어 먹으며 너에게 이렇게 말했었지.
"나는 포함 안되지만 그래도 조심해."
"뭐를 조심하라는 거야."
"자고로 남자와 여자 둘이 한 집에 있으면 무슨 일이 안 벌어질리가 없지."
"뭐래, 진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너와 이재환을 겨냥한 그말이, 한상혁이 음흉하게 너를 보며 얘기하던 그 말이.
*
이재환이 집을 둘러보다 너 옆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너가 새 잔을 꺼내면서 손님은 앉아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자 이재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로 걸어갔다.
이재환은 소파에 정좌세로 앉은 채로 고개를 돌리며 집안을 살폈다.
소파도 만져보고 시계도 쳐다보며 호기심 많은 눈으로 관심을 가졌다.
"뭐가 신기해?"
너가 음료와 이재환이 들고 온 과일을 깎아서 재환이의 앞에 놓았다.
이재환은 컵을 받아들더니 너의 눈치를 살폈다.
"아, 그게. 여자 집은 처음이라."
너를 보며 살짝 웃더니 음료수를 홀짝 마시는 이재환이었다.
귀엽기는,
너는 그런 이재환 앞 바닥에 조심히 앉았다.
너가 바닥에 앉는 걸 본 이재환이 놀라면서 말했다.
"별빛아. 바닥 차가워! 내 옆에 앉아!"
이재환이 툭툭 소파를 치며 하도 앉으라고 하길래 너가 하는 수 없이 옆에 앉았다.
하는 수 없는 척이었지 사실 옆에 앉고 싶었었다.
이런 너의 흑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재환이 주위를 둘러보다 리모컨을 집어들었다.
"티비 볼까. 지금 시간에 뭐하지?"
리모컨 버튼을 눌렀더니 한창 인기 중인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었다.
하필 장면도 장면이게 두 주인공이 낯뜨겁게 키스를 하는 장면이 방영되고 있었다.
너가 힐끔 이재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재환이 넋 놓고 바라보다 시선을 느끼고 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 어. 저게 뭐람."
이재환이 황급히 리모컨 채널을 돌렸다.
케이블 예능을 틀은 이재환이 입술을 깨물며 너를 바라보았다.
너가 픽 웃으며 재환의 눈을 마주쳐 바라보았다.
"드라마가 참,"
"조금 그러네. 10시 드라마도 아니면서."
서로 빤히 바라보다 헛기침을 내며 동시에 티비를 쳐다보았다.
너의 심장 뛰는 소리가 이재환한테도 들릴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이재환은 프로그램이 재밌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댔다.
톡톡, 톡,
창문 밖으로 간질거리는 소리가 들리길래 너가 일어나 바깥을 확인했다.
보슬보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도 어두운 게 곧 한바탕 쏟아질 것 같았다.
어느새 이재환이 옆으로 와 날씨를 확인하는 모습이였다.
"비가 오네. 비 그칠 때까지만 있다 갈게."
이재환은 비 오는 걸 싫어한다고 지 입으로 말한 적도 있었기에
찡그린 표정을 짓는 걸 보는 것도 별로 신기하진 않았다.
너는 내심 이 비가 계속 내리기를 바랬다.
*
이재환 옆에서 티비를 보다가 점점 잠이 오는 걸 느꼈다.
이재환은 여전히 뭐가 재밌는지 웃으면서 티비를 보고 있었고
그렇게 너도 모르게 살짝 잠이 들었나보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눈이 살짝 떠졌다.
옆에 앉아 있던 이재환이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는 것이었다.
너가 반쯤 풀린 눈으로 이재환을 바라보았다.
이재환이 들어간 화장실에서 큰 기침소리가 들렸다.
순간 잠이 번뜩 깨는 기분이었다.
".......아, 아는 척 하면 안 돼."
고민에 빠졌다.
정택운이 말하기를 이재환은 자기가 몸이 아프다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일체 아는 척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너는 급하게 얼굴을 소파에 기대고 자는 척을 했다.
이재환이 너의 어깨를 톡톡 건들이는 것을 느꼈다.
너가 이제야 잠이 깬 모습을 취해 보이며 재환을 바라보았다.
재환이의 표정은 심각해보였다.
"미안해, 별빛아. 나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
너가 창문을 확인했다.
엄청난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
"어..? 비 많이 오는데,"
"...우산 좀 빌려줄래?"
너는 다급해 보이는 이재환이 신경쓰여 일단 우산을 꺼내 건넸다.
자세히 보니 숨도 거칠게 쉬는 것이 보기에 안타까워보였다.
신발을 신다 휘청대는 이재환 모습에 순간 지켜볼 수 없었다.
"...재환아."
이재환이 문에 한 쪽 몸을 기대고 당황한 듯 너를 쳐다보았다.
너가 밑을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가지마."
"....별빛아,"
"비 그치면 간댔잖아."
처음으로 널 붙잡았다.
혼자 보낼 수 없었다.
또 이대로 가버리면 예전처럼 나만 두고 혼자 사라져버릴까봐.
또 그렇게 바보같이 있고 싶진 않으니까.
*
이재환이 고개를 떨구다 신발을 벗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너 앞에 선 재환은 우산을 건네다 얼굴을 찡그렸다.
너를 바라보는 눈빛이 흔들렸다.
너의 마음도 흔들렸다.
괜히 이기심 때문에 보내지 않은 것이 재환이한테 큰 화를 입힐까 싶었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겠어서 말없이 우산을 받아들었다.
이재환은 힘없이 걸어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얼굴을 파묻힌 이재환을 바라보았다.
그냥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재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 안 갈게. 비 그치면 간댔으니까."
이재환은 너가 오히려 걱정되는 눈으로 쳐다보자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냥 오늘 조금 피곤해서 그런 것 뿐이라고,
너에게 미안하다고 되뇌었다.
이재환이 손으로 뺨에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너는 물이라도 주기 위해 냉장고로 다가갔다.
물을 컵에 따라서 이재환한테 걸어가 컵을 건넸다.
어느새 새근새근 잠든 이재환이었다.
너가 작은 식탁에 물을 받은 컵을 내려놓고
땀으로 젖은 재환이의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방에서 얇은 이불을 들고 온 너가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아무래도 정택운 씨한테 연락해야겠다."
너가 너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혹여나 거실에서 잠이 든 재환이가 깰까 싶어 더 조심히 연락을 시도했다.
긴 연결음이 들리고 마음이 초조해졌다.
"안 받아,"
너의 입에서 짧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냥 몸이 안 좋다고만 들어서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머리를 쓸어넘기며 다시 정택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받지 않았다.
너가 터덜터덜 재환의 앞에 앉았다.
이재환을 빤히 바라보다 살짝 이재환의 눈이 떠진 것을 보았다.
그리곤 서서히 감기더니 천천히 떠지는 이재환이었다.
그 시선은 확실히 너에게로 향해 있었고
너는 말 없이 그런 이재환을 바라보았다.
이불 위로 올려진 재환이의 손을 꼭 잡았다.
"미안해. 욕심 부려서."
지이이잉
지이이잉
황급히 고개를 돌려 탁상을 바라보았다.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 안으로 정택운의 이름이 떠 있었다.
너가 전화를 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이재환이 너를 잡고 확 끄는 것이었다.
너는 순식간에 끌려 이재환 얼굴 코앞에까지 다가갔다.
이재환이 살짝 뜬 눈으로 너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 죽어가는 애가 힘은 왜 이렇게 센 건지 잡힌 손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 때문에 깬걸까, 진동 소리 때문에 깬걸까,
".......별빛아."
작은 목소리로 이재환이 옆에 붙어있는 너를 불렀다.
"응."
"..... 옆에 있어줘."
재환이는 말을 마치더니 너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너가 그런 재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행여 더울까봐 머리를 넘겨주었다.
옆에 있으라면 어떡하겠어, 옆에 있어줘야지.
*
화장실로 향한 너가 급히 정택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한 번에 받는 정택운이였다.
"정택운 씨, 당장 우리 집 와줄 수 있어요?"
'왜 그래.'
"재환이가 많이 아파요. 혹시나 해서 응급차는 안 불렀는데 거의 반 쓰러졌어요, 제발, 빨리.."
'왜 걔가 이 시간에 너 집에 있는거야.'
너가 당황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미친, 약은 먹었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한 1시간 전부터...."
'하... 걔 약 안 먹어서 그런거잖아. 더 심해져서 실려가기 전에, 아, 기다려.'
정택운의 목소리도 꽤 다급해 보였다.
너는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실 너가 붙잡은 건데 정택운이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었다.
너는 몰려드는 걱정에 두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다 너 잘못 같아서 후회가 들었다.
이재환은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솔직히 잠들어 있는건지 눈만 감고 있는 건지는 잘 몰랐다.
너가 정택운이 올 때까지 기다리며 이재환의 얼굴을 감상했다.
입술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고로 남자와 여자 둘이 한 집에 있으면 무슨 일이 안 벌어질리가 없지.'
불현듯 떠오르는 한상혁의 말 때문에 너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아무 일도..
너가 침을 삼키며 손가락으로 살짝 입술을 건들였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너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더니 살짝 이재환의 눈이 떠지는 게 아니겠는가,
너가 놀라서 바로 얼굴에 향해 있는 손을 뗐다.
너는 이재환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곤 이재환이 거칠게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잡았다.
너의 얼굴이 순식간에 이재환과 가까워졌다.
입술에 맞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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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ㅜㅜ
더 빨리 들고 올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16편에서 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