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푹푹 찌는 여름이었다. 날씨 때문에 불쾌지수는 상당했고 집 가는 버스는 사람으로 미어터졌다.
결국 버스 타는 걸 포기한 채 열기가 올라오는 아스팔트 위를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그래, 걸어가니까 운동도 되고 좋네.
아, 시발 버스 탈걸. 선택은 금세 후회로 바뀌었다.
그렇게 초점 없는 눈으로 하염없이 걷고 있다 어깨를 잡는 손길에 걸음이 멈춰졌다.
"너 걸음 진짜 빠르다. 따라오다 죽을 뻔했네."
급하게 따라오긴 했는지 숨은 헉헉거리면서 뽀송하고 좋은 향기도 나는 게 얘는 사람이 아닌 게 틀림없다.
설사 이 얼굴에 땀 한 바가지를 흘렀어도 그것을 성수라 믿었으리라.
"네가 날 왜 따라와?"
순간 얼굴에 빠져 본 목적을 잃을뻔했다.
역시 잘생긴 게 최고다.
"나 3반 김태형인데 너 2반 김여주 맞지?"
"응, 맞는데 왜?"
"나 너 좋아해. 우리 사귀자."
때마침 불어오는 작은 바람,
청춘영화의 한 장면 같은 김태형의 비주얼에 나도 그 순간만큼은 여주인공이 된 것 마냥 수줍게 고백을 받았다.
청춘영화는 무슨, 세상 제일 무드 없는 고백이었네.
완벽해 보였던 김태형은 사실 연애에 대해선 좀 모자랐다.
"여주야, 오늘 버거킹 먹을까?"
"오늘? 너 이 주째 버거킹만 먹고 있는 거 알아?"
"맨날 먹어도 맛있잖아."
응, 너만.
"그러지 말고 딴 거 먹자."
"맘스터치?"
"그게 그거지, 뭐가 달라."
"그럼 그냥 버거킹 먹으면 안 돼?"
폭풍 애교에 홀라당 넘어가 버린 머저리 김여주(18)는 결국 버거킹으로 삼 주를 시작해야 했다.
햄버거가 놓인 쟁반을 들고 오면서 '이걸 그냥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버릴까'라는 고민에 휩싸였다가도 태형이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니 쟁반을 조용히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번은 김태형 보는 앞에서 햄버거를 갈기갈기 찢어버렸어야 했다.
"근데 여주는 왜 안 먹고 있어?"
"아, 먹는 중이야."
"자, 내 것도 한 입 먹어."
억지로 한 입 베어 문 뒤, 햄버거에 질릴 때로 질린 나는 그날 김태형 먹는 모습만 바라보다 나와야 했다.
"태형아 이제 어디 갈까?"
"피시방?"
그때부터 였을까, 내 삼수의 시작이.
걔와의 데이트의 마지막은 항상 피시방이었는데 그를 따라 오버워치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그랜드 마스터를 찍었고 엄마도 내 성적을 보며 내 등짝에 강스파이크를 찍었다.
그뿐만 아니라 공부까지 잘하는 김태형 때문에 밤낮으로 엄청난 비교도 당해야 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일 년이 지나가고 나와 김태형도 어느덧 고삼 수험생이 되었다.
공부로 불태워도 모자를 열아홉의 반나절을 연애에 쏟으면서 회생 불가한 성적들이 나를 반겼고 그때부터 콩깍지도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나 진짜 대학은 갈 수 있을까?"
"왜 너 성적 어떤데?"
"이번 모의고사도 망했어."
"어디 봐봐."
김태형은 내 손에서 성적표를 가져가서 보더니 한참 말이 없었다.
"네가 봐도 답 없지...? 나 어떡해..."
"괜찮아. 나도 망했어."
"이번 모의고사가 어려웠나?"
"맞아, 어려워서 그런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날 그의 위로를 받고 기분 좋게 집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집에서 쫓겨날뻔했다.
"모의고사 성적표 나왔다며 보여줘 봐."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었는지 천진난만하게 성적을 공개했다. 엄마 표정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너 이걸 성적이라고 갖고 오냐?"
"아니... 이번 모의고사 진짜 어려웠대..."
"누가 그래?"
"태형이가... 그래서 태형이도 모의고사 망했대..."
"얘가 이제 어디서 거짓말을 해? 태형이 엄마랑 아까 통화했는데 태형이는 이번에도 잘 봤다더라."
"아니야.. 걔가 진짜 어렵다고 했어."
"이제 태형이 핑계를 대고 거짓말을 하네?"
집에서 쫓겨날 뻔한 거 아빠 덕에 간신히 면하고 멘탈까지 탈탈 털린 후 그날 속상해서 밤새 울었다.
그 다음날은 김태형 만난다고 냉장고에 넣어둔 숟가락을 부은 눈에 대며 아침 일찍 부지런도 떨었다. 김여주 참사랑이었네.
데이트도 참 변함없이 여전했다.
김태형이 그때 꽂힌 음식은 떡볶이였는데 평소처럼 떡볶이집을 가고 평소와 똑같이 데이트 마지막은 피시방이었다.
평소와 다를 게 없는 날이었지만 그날은 왠지 현타가 왔다.
"너 나랑 왜 사겨?"
"네가 좋으니까."
"너는 내가 만만하지? 네가 하자는 데로 다 하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 말 맞잖아. 너 내가 먹고 싶다는 거 먹은 적 있어? 나 떡볶이 소리만 들어도 토나올 것 같애."
"네가 떡볶이 좋아한다며."
"떡볶이 좋아한다고 했지. 맨날 먹으러 가자 그랬냐? 작년에는 햄버거,올해는 떡볶이 지겹다 지겨워."
"다른 것도 먹으러 갔었잖아. 우리 백일 때도 그렇고."
"그거야 손에 꼽을 정도고. 데이트 때마다 피시방 가는 것도 짜증 나."
"오버워치 재밌다고 맨날 하자던 사람이 누군데."
"그래, 내가 다 잘못했네. 걍 헤어지자."
"뭐?"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헤어지자고."
처음이자 최악이었던 내 생의 첫 연애는 이렇게 모자란 연애로 막을 내렸다. 졸업 후의 걔의 행방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잘생기고 공부 잘하기로 유명했던 애였지만 워낙 학교를 조용하게 다녔던지라 졸업 후 소식에 대해서는 늘 무성한 소문만 돌았다.
재수하던 시절 들려오는 그의 소문들로 인해 그와 했던 모자란 연애가 다시 생각이 나 괜히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는 김태형을 탓하며 여전히 미워하고 미워했다. 대학 합격 후 낮아진 자존감이 조금씩 회복되자 소식도 모르는 김태형을 괜히 미워했던 게 미안해서 우연히라도 그와 마주치기 싫었다.
그런데 현재의 김태형은 김여주와 같은 학과이며 선배이고.
나는 다시 그를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