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저희 병원에서 제일 예쁜 간호사선생님 출근하셨네요!"
"어,어? 뭐야? 뭐예요?"
"뭐긴 뭐예요? 김간 예쁘다는 소리 듣고 촬영나온거죠."
출근한다고 엘레베이터에서 내려 탈의실로 빠르게 걷는데 로비에서 웬 카메라장비들이랑 백현이, 인턴들과 간호사들이 나를 보고 막 웃는거야.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당황하는 나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내가 당황하는게 굉장히 즐거운 듯 했어.
"방송사에서 우리 다큐 찍는다고 나왔대요. 저희도 오늘 알았지 뭐예요."
"아니, 외과에 찍을 게 뭐가 있다고..저, 방송타는 거예요?"
"지금도 계속 돌아가고 있어요~"
"어, 화장 아직 안했는데. 편집 해주셔야해요?"
완전 민낯인데, 내가 두손으로 얼굴 감싸고 탈의실로 들어가는데 뒤에서 막 웃는 소리가 들려. 옷 갈아입고 평소보다 더 꼼꼼히 화장을 하고 머리도 깔끔하게 올려 묶고선 나왔어.
방송 카메라는 우리 병동의 있는 그대로를 찍는다며 정말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촬영을 했고 평소 세수도 제대로 안하고 다니던 병동 인턴들이나 레지던트들이 멀끔하게 수염도 깎고다니는 광경을 볼 수 있었어.
"새벽에도 촬영하시는 거예요?"
"3일 72시간 내내 촬영하는 방송이에요, 새벽근무신가봐요?"
"아..안 피곤하세요?"
"저희도 중간에 교대하는걸요, 새벽에는 주로 무슨 업무를 하세요?"
틈새를 파고드는 질문에 대충 이야기를 해주고 병동을 돌러가려하는데 피디님이 나를 졸졸 쫓아오시는거야. 살다살다 내가 이렇게 원샷을 받는 날이 오다니, 어색하기도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그냥 내버려뒀어.
"어, "
"왜 그러세요?"
"주치의쌤이누구지..변백현,"
"아까 그 레지던트선생님이요?"
"네, 아까 잔다고 들어갔죠?"
"그런 것 같은데..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환자 상태 체크하고 있는데 아까 낮에도 항생제를 두통이나 맞은 환자한테 항생제를 또 걸어놓은거야. 이렇게 많이 투여할 필요는 없지않나 싶어서 주치의가 누군지 봤더니 백현이야. 지금봐도 주치의 이름써있는 칸에 백현이 이름이 있는건 어색해. 며칠 전만해도 담당 인턴 정도였는데.
전화를 여러번 해도 안받고, 결국 백현이를 깨우러 당직실로 내려갔어. 어둑어둑한 복도가 항상 혼자다니기 무서웠는데 오늘은 피디님도 같이간 덕에 이런저런 잡담을 하면서 걸었지.
"이런 일이 흔한가요? 퇴근한 뒤에도 불려가는 경우가?"
"레지던트때는 그냥 병원에서 생활하는 수준이에요. 지금 부르러 가는 선생님도 일주일은 집에 못들어가셨을걸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당직실 앞에 도착했는데 내가 문을 살짝 여니까 피디님이 뒤에서 조심스럽게 물어봐.
"여기도 촬영 가능할까요?"
"네? 여긴 침대밖에 없는데..들어오셔도 돼요."
"아, 2인실이네요."
"네, 원래 두분이 같이 쓰시는데 한분이 보름만에 집으로 가셨어요."
백현이는 우리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이불에 파묻혀 자고있었어. 평소같으면 등판을 찰싹찰싹 때리면서 깨웠을텐데, 오늘은 카메라가 있으니까..살짝 어깨부근을 흔들었어.
"쌤, 투약하신거 다시 좀 봐주세요."
"으음.."
"왜 세통을 넣으셨어요, 안 그래도 항생제때문에 두통있는 환자한테."
"..그거.."
"일단 좀 일어나서,"
카메라가 저 퉁퉁 부은 얼굴 촬영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웅얼웅얼 정신 못차리고 있어. 습관적으로 손을 뻗은 백현이가 양손으로 내 얼굴을 턱 붙잡고 제쪽으로 끌어당기는데, 뒤에 카메라가 있다는 걸 깨달은 내가 백현이 손을 붙들고 떼어내려하니까,
"뽀뽀."
"..어?"
"뽀뽀오.."
"..일어나, 일어나. 이게 헛소리를.."
뒤에서 우리 모습 그대로 촬영하던 피디님은 벌써 터지셔서 막 웃고계시고 백현이는 아직도 상황파악 못해서 내 얼굴 붙잡고 쪽하니 뽀뽀하곤 머리를 헤집고 일어났어. 푹 잠들었던 건지 평소보다 잠투정을 하는 탓에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볼을 톡톡 두드려줬어. 어차피 변백현이 입술박치기를 해버린탓에 피디님도 우리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건 눈치 챘을 테고. 백현이가 유독 제 볼을 만져주는 거랑, 머리 쓰다듬어 주는 걸 좋아했었는데 깨울때 그렇게 해주면 잘 일어났거든.
"카메라 뒤에 다 있는데..하여튼 변백현."
"어, 피디님 잠도 안주무시고?"
변백현이 능글능글하게 웃으면서 침대 구석에 아무렇게나 박혀있던 가운을 집어들고 팔을 끼워 입었어. 옷걸이에만 걸어놔도 저렇게까지는 안구겨질텐데, 매일 저런식으로 침대에 던져놔서 구깃구깃 난리도 아니야.
"아이, 이런 모습 방송 나가면 안되는데, 외과의사 너무 꼬질꼬질해보이는거 아닌가 몰라."
"두 분, 보통 사이가 아니신 것 같은데요?"
"저희요? 아까 다 보셨잖아요."
변백현이 하하 웃으면서 내 손을 턱 붙들었어. 당직실에 나랑 피디님밖에 없는 걸 확인한 백현이가 이제 아주 당차게 나오는 거지. 아무리 잠깐 나갔다가 오는 거라두, 옷을 너무 대충 껴입은 백현이 옷매무새를 조금 만져준 뒤 당직실을 나섰어.
"아아, 이 환자 오늘 급하게 수술 잡힌 것 때문에 항생제 더 넣은건데."
"아, 맞다.."
"그쵸? 내일 수술 전에 필요하면 진정제 조금 투여해요, 오늘 수술 잡히고 불안해하세요."
"미안, 괜히 깨웠네."
상처가 속에서 덧나는 바람에 당장 다음날로 응급수술 잡아놓은 상태였는데 그걸 내가 생각을 못한거야. 백현이는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하기보다는 자기가 다시 한번 보고 확인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자다가도 병동으로 나온거구, 원체 잠이 많은 애라 다시 누우면 금방 잠들기야 하겠지만 중간에 깨웠다는게 미안해지는 순간이었어.
"그 후배는 어디가고 혼자 있어?"
"동생이 응급실에 와있대."
"아프대?"
"충수염인가봐."
"그걸 어떻게 알았어?"
"동생이 의대생이야."
"아.."
"실려오면서 저 맹장터져서 누나 병원으로 가겠다고 전화왔더라구."
항상 열의넘치던 내 후배는 출근 몇시간 전에 미리와서 공부하거나 차트체크를 하고 있었거든. 진짜 출근시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한테 전화가 왔는데, 응급실로 오고 있다고 하는 말에 어이가 없는 듯 웃어보이는거야. 보호자가 없어서 잠시 내려갔다 와도 되냐고 묻는 말에 수술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오라고 내려보냈어. 임직원 가족할인 잊지 말라고 당부까지 해주고.
"얼른 가서 더 자, 지금 자도 네시간밖에 못자겠다."
"너네 후배 올 때까지만 있을게."
내가 지금 가라고 떠밀어도 가지 않을 백현이가 너무 뻔해서 그냥 내버려뒀어. 그리고 우리가 서로 잡담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피디님이 카메라를 어깨에 짊어진 채로 웃으시면서 질문을 던졌어.
"병원에서 서로 많이 의지하는 편이세요?"
"의지는 많이 하는데..아무래도 싸움이 많아요."
"싸움이요? 예를 들면 어떤.."
"서로 일하는 걸 그대로 보니까, 마음에 안드는 부분은 참고 넘어가는 법이 없거든요. 둘다."
"간호사선생님 입장에서는 어떤 부분이 제일 마음에 안드세요?"
"전부 다요. 지금처럼 자라고 해도 안자고, 밥 제대로 안 챙겨먹고, 아. 아까처럼 침대에 가운 던져놓고 다니는 것도요."
내 말에 피디님이 재미있다는 듯 계속 웃으셨어. 중얼중얼 볼멘소리로 말하던 날 향해있던 카메라를 백현이 쪽으로 돌리시더니, 백현이에게도 가벼운 질문이 던져졌지.
"의사선생님께서는 불만 없으세요? 방금 이렇게 공격을 당하셨는데."
"저는 없어요, 불만."
"정말 없으세요?"
"..저요?"
"네, 뭐 사소한 거라도?"
"저는 그냥 저 분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자체가 불만이에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백현이의 진심이 그득한 불만을 나는 느낄 수 있었어. 피디님은 반 농담식으로 들으신 듯 상대분이 험한 일 하는게 많이 싫으신가봐요, 하셨지만.
"그쵸, 삼교대에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하고. 무거운 침대 끌고 이리저리 다녀야하고. 얘기하자면 끝도 없어요."
백현이는 진심으로 더 말하고 싶은게 많은데 꾹 참는 느낌이었어. 나는 그냥 옆에서 조신한 척 웃고 있었지. 화면이 잘 나오나 카메라 화면을 들여다보시던 피디님이 다시 백현이쪽으로 카메라를 고쳐잡으시곤 조금 흥미로운 질문을 하셨어.
"그래도 간호사라는 직업이 굉장히 참한 이미지잖아요, 일등 신붓감이라고 할 정도로."
"아..그렇죠."
"실제로 같은 병원에서 이렇게 만나시면서 특별히 반했던 계기라도 있으셨어요?"
아마도 피디님은, 우리가 병원에서 처음 만나서 연애를 시작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어. 백현이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잠시 웃었지만 바로 대답을 이어나갔어.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뭔가 내가 몰랐던 걸 이야기 할 것 같은 느낌에 컴퓨터 화면에 두었던 시선을 백현이에게로 돌렸어.
"제가 처음으로 수술 어시스트를 했던 적이 있었어요."
백현이가 수술 어시를 처음 했을 때, 가물가물 했지만 대충 기억을 해냈어. 그 때는 내가 수술실에서 일하고 있었을 때였으니까.
"처음 어시를 하는 날에 하필이면 수술이 길어져서 긴장을 많이 했거든요, 식은 땀이 흐를 정도로."
그 때 수술이 안그래도 긴 수술이었는데 거기다 시간까지 연장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다리가 저릿저릿 아팠었던 것 까지 기억이 났어.
"그 때 옆에서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는데, 그게 그렇게 설렜어요."
정말 어이없는 끝맺음에 피디님이랑 내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어. 백현이가 비장하게 말하는 탓에 나까지 기대를 했는데 저게 뭐야, 수건으로 수술하는 의사들 땀 닦아주는 거야 원래 내가 하는 일이었잖아. 백현이라고 특별해서 땀을 닦아 주었던 게 아니었는데.
한참을 웃으시던 피디님이 이번엔 카메라를 내 쪽으로 돌리면서 똑같은 질문을 하셨어. 나도 이랬던 적이 있었냐고 물으시는데, 나는 한참을 생각해야했지. 백현이가 날 챙겼던 게 한두개가 아니었던 터라.
"저는.."
사실 내가 하려던 얘기의 뒷배경은 훨씬 긴데, 그걸 모두 이야기 할 순 없어서 짧게,
"아플 때 주사 놔주는 거..?"
"두 분 다 포인트가 굉장히 소박하세요, 사실 대단한 걸 기대했는데."
"주사 놔 줄 때가 가장 의사같아요, 그래서 좋은 것 같아요."
사실 주사를 뜯을 때 백현이가 섹시하고, 또 주사 놓기 전에 한참을 실랑이하는 백현이도 귀엽고, 그래서 그래요. 라고 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담아두었지. 백현이도 나랑 주사 하나가지고 언성을 높이던 그 때가 생각이 났는지 웃음을 퍽 터뜨렸어.
"저희 결혼하는 거 아직 모르시는 분들 많은데, 방송 나가면 몰매 맞겠어요."
"그럼 카메라대고 한마디 하시겠어요?"
피디님 말에 백현이가 화면 잘 잡혀야 된다며 내 손을 가져다 깍지를 꽉 끼고 카메라 렌즈 앞에서 살짝 흔들었어. 나는 민망함과 어이없음이 섞인 웃음을 짓고 백현이는 함박 웃음을 지었어.
"저희 다음 달 초에 결혼해요, 김간 피부 생각해서 나이트 좀 봐주세요-."
능글능글, 너 통편집 당할 지도 몰라, 하면서 내가 백현이 팔을 퍽 때렸더니 피디님한테 이건 편집하지 말아달라며 웃어보여. 방송 나가고 정말로 나이트근무가 줄어들지는 미지수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