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제 간 택 (皇帝揀擇) 03
: 현명한 여인을 태자빈으로 삼아, 태자빈으로 하여 태자를 정하도록 한다.
천천히 열린 문 뒤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두 눈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매력적으로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혹여, 제가 빈의 휴식을 방해한 것은 아닌지요."
"ㅇ,아닙니다. 마침 혼자 무료하였던 참입니다."
"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아마...제가 누군지 모르시겠지요?"
"아..."
"괜찮습니다- 저를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제 3황자, 김 종대라 합니다."
"소녀는,"
"빈이야,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마마마께서 항상 빈을 이야기하시며, 아주 훌륭하신 분이라 하셨습니다."
"황후마마께서요?"
"예- 헌데, 앉아도 되겠습니다? 빈을 눈 앞에 두고, 이리 멀리 서있는 것이 저를 애달플게 합니다."
"ㅅ,송구하옵니다. 소녀가 지금 정신이 없어...이리로 오시면 되옵니다."
정신이 없어 황자 저하를 방 안으로 뫼시는 것도 잊은 채 있었나보다.
너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니, 저하께서는 다시 부드럽게 웃음을 지어보이셨다.
낯선 이를 나의 공간 안으로 들이는 것이 어색하여, 자리에 앉은 후에도 무엇을 해야할 지 몰라 안절부절 할 수 밖에 없었다.
"혹, 제가 불편하십니까."
"ㅇ,아닙니다. 그저, 누군가와 마주보고 있는 것이 낯설어서 그런 것이니..."
"다른 형님들이나, 종인이는 만나 보셨습니까."
"예, 헌데 다른 분들은 뵙지 못하였고, 준면 저하만을 아까 뵈었습니다."
"어우, 제가 제일 먼저 만나뵙고자 하였는데, 벌써 형님께서 선수를 치셨네요."
저하께서는 어색해하는 나를 위해 말을 먼저 걸어주시고, 웃어주시는 반면에 나는 이 상황이 너무도 어색해 말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니, 저하께 너무 죄송해졌다.
"소녀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니, 저하께 송구한 마음만 들 뿐이옵니다."
"아닙니다. 어마마마께 들으니, 예(藝)에도 아주 능하다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보여주지 못할 미천한 실력입니다."
"어마마마께서 칭찬하신 것이니, 너무 겸손치 마십시오. 저 또한 할 수 있는 것이 예 뿐이니, 빈과 언젠가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저하께서 그리 원하신다면, 소녀에겐 영광일것입니다."
낯선 이와 이리 오래 담소를 나눈 것이 처음인지라, 아무 것도 하지 못한채 얼어있었으나, 저하께서는 그리 신경 쓰시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그저, 날이 어두워졌으니, 여인의 방에 있는 것이 실례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내일 아침 조찬 때 다시 보자는 말씀을 하시고는 떠나셨다.
저하께서 떠나신 뒤, 서책을 보았으나 평소와 다르게 눈에 글이 들어오지 않았다.
방이 낯설어지고, 사람 또한 낯선 이들 뿐이니, 긴장감 때문인지 무엇인지 심장이 쿵쿵- 뛰어대는 것만 같았다.
결국, 글 읽는 것을 포기 할 수 밖에 없었고, 오지 않는 잠을 자려, 일찍 누워 잠에 드려 했다.
혹여나 낯선 곳에서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일까 걱정했지만, 보드라운 이불 속에 몸을 뉘이자마자, 언제 그런 긴장을 했었냐는 듯 잠에 들 수 있었다.
* * * * *
꽤나 깊게 잠에 들었다, 생각이 들어 눈을 떴을 때는 아직 해조차 뜨지 않은 캄캄한 새벽이었다.
분명 해가 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나는, 다시 잠에 드려 했으나, 한 번 깨어진 잠을 들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새벽 공기라도 마실까, 하는 마음에 살며시 문을 열고, 어제부터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후원으로 향했다.
어제 해가 떠 있는 낮과는 다르게, 안개가 껴 있는 풍경이 묘한 느낌을 주는 것만 같았다.
한 발, 두 발, 내 딛을 때 마다 느껴지는 차가운 새벽 공기에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 같아, 괜시리 얼굴에 웃음이 났다.
정자에 신을 벗고 올라서 연못을 바라보니, 붉은 빛을 띈 붕어들이 헤엄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에 주저앉아, 발을 정자 밖으로 내밀었더니, 발이 물에 닿을 듯 닿지 앉았다.
드리워진 그림자에 붕어들이 놀랐는지, 서둘러 헤엄쳐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모습이 아쉬웠다.
붕어들은 보내고 나서 멍-하니 막, 해가 뜨려고 하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으스름한 빛이 연못에 비추어지는 모습은 지금까지 내가 본 어떤 모습보다도 아름아워,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아마, 내 뒤에 누군가 다가오는 것 조차도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새벽 공기가 아직 찬 터인데, 이리 얇은 차림으로 나오신겁니까."
들려오는 사내의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듯 보이는 앳된 얼굴이 보였다.
아, 이 분이 아마도 막내 황자 저하일 것이구나.
"소녀, 저하께 이른 아침, 인사를 드리옵니다."
휘어지 듯, 접힌 눈이 아직 어린 소년의 모습을 벗지 못하고 있었다.
"4황자, 김 종인이라 합니다. 날이 아직 추운데, 어찌 그리 얇게 나왔어요?"
"예?"
"아...송구합니다. 제가 경어체에 익숙하지 못하여, 죄송해,아니 송구합니다."
어린 소년의 앳된 얼굴에 경어체가 아닌 어투가 튀어나오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나보다 더 당황하여,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을 보니, 귀여운 마음에 웃음이 나왔다.
"ㅇ,아..."
어찌 할 줄 모르고 붉어진 얼굴에, 방황하는 눈동자가 영락없는 아이었다.
어제 만나 뵈었던 황자 저하 두 분에 비해서 키도 더 크고, 건장해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어투는 영락없는 아이였다.
평소에 황제폐하나, 황후마마, 그리고 다른 황자 저하께 귀여움을 받을 터이니, 경어체를 아니 쓰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몰랐다.
"괜찮습니다, 저에게도 편하신 데로 경어체를 쓰지 않으셔도 욉니다."
"어, 하지만, 다른 이들이 보면..."
"저와만 있을 때는 괜찮습니다. 저를 편히 대해주세요."
"아...!"
그제서야 밝아지는 얼굴을 보니, 나 또한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 같았다.
다시 아이처럼 웃어보이는 저하셨다.
"하지만, 저를 어리게만 바라보지는 마십시오. 저 또한 황자이고, 빈의 지아비가 될 수 있는 몸이 아닙니까."
아, 내가 방심했다.
아까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소년의 티를 벗고 제법 남자와 같은 태도로 하시는 지아비란 말씀에, 나 또한 붉어진 얼굴을 어찌할 수 없었다.
"비록, 제가 가장 어리긴 하지만, 빈을 위하는 마음은 어디 형님들에 뒤쳐질 리가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소년 같은 웃음을 지어보인 그가, 소년인지, 남자인지 모르겠는 말씀을 해 보이시니, 저하를 마주보기가 부끄러워졌다.
"부끄러워하지 마요. 제가 빈을 편히 생각하는 것처럼, 빈께서도 저를 편히 여겨 주세요"
"날이 차니, 어서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여, 고뿔이라도 걸리시게 되면 저는 물론이고, 형님들께서도 걱정이 클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