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신아?" 배신감과 분함이 섞여 답답한 속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기만 하고 있는데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항상 듣고 싶은 목소리지만 지금만큼은 죽어도 듣기 싫은 목소리라 애써 무시하며 더 목 놓아 울기만 하자 난처한 듯 왜 그러냐며 나를 달래오는 아저씨의 손길이 있었다.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안 좋은일 있었어? 하고 묻는 목소리에 그냥 품에 안겨 엉엉 울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러 담고 손을 들어 아저씨의 팔을 탁 소리 나게 쳐내었다. 당황한 듯 다시 내 이름을 불어오는 목소리가 쓸데없이 다정했다.
"무슨 일 있었어? 연락도 안 되고, 왜 울고 있어. 응?" "...나가요," "어?" "나가라고!!"
악에 받쳐 꽥 질러버리자 아저씨가 그런 내 어깨를 살며시 잡아온다. 왜 그러냐며 달래는 목소리가 듣기 싫어 고개를 저으며 밀어내자 당황함에 더욱 꽉 붙잡아오는 손을 있는 힘껏 떼어냈다. 아직까지도 내가 이렇게까지 울며불며 소리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그저 걱정스러운 눈길만 한 아름 던져주고 있는 아저씨를 보자 억울함과 서러움이 더욱 밀려들었다. 사람 마음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도 모자라서, 내가 울고불고 악을 쓰는데도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구는 태도에 더 화가 났다.
"왜 그래, 응? 혹시..시험 망쳤어?" "지금 그딴게, 뭐가 중요해! 나가요!!" "아니, 엌..! 효신아..? ㅈ, 잠깐만, 아파..!" "나가요, 내 집에서 나가! 최악이야, 꼴도보기싫어,"
시험을 망쳤니 어쨌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것에 이젠 화가 나다 못해 마냥 기가차서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 아저씨 몸 이곳저곳을 되는대로 퍽퍽 때리며 밀어냈다. 그 와중에도 아프다는 아저씨 말에 걱정이 되어 손에서 살짝 힘을 빼는 내 행동에 나조차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한테 별로 진심도 아니었던 사람한테, 나는 뭐 하러 이렇게까지 정성을 다해 좋아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억울함이 밀려들어와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라는 게 고작 이런 것 뿐이라는 것도 화가 났다.
"여자친구 있죠?" "..어?" "있잖아요, 여자친구. 나한테 거짓말 했잖아," "..." "아저씨 집에서 나오는거, 다 봤어요. 또 거짓말 할거에요?" "효신아,"
딱히 변명하지 않았다. 아니면 아니라고 할 텐데, 그냥 내 이름만 부르는 것을 보니 여자친구임에는 틀림없는 듯 했다. 끝까지 조금이나마 아니길 기대했던 것마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럼 대체, 여태 나한테 보여준건 다 뭐였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하고,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입 맞추고,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내 삶에 끼어들었을까. 묻고 싶은가, 따지고 싶은 것은 산더미 같은데 입 밖으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질 않았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할지도 판단이 서질 않았다.
"여자친구였어, 조금 전까지." "..근데요." "헤어졌어, 너 오기전에." "..그런다고 여태 날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이 없어져요?" "그런거 아니야...정말 고민 많이 했어. 내가 너를, 내 사람으로 만들어도 될까, 엄청 많이 생각해봤어." "..." "이기적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널 너무 좋아해서. 포기할 수가 없더라, 너를."
여자친구였어. 과거형이 돼 버린 그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여자친구가 있으면서도 제멋대로 내 인생에 끼어들어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사람인데, 헤어졌다는 것만으로 아저씨가 두 사람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 결국 모두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내 자신이 싫을 정도였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지내온터라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었는데, 난 꽤나 깊이 아저씨를 좋아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앞으로 내가 아저씨를 어떻게 믿어요? 나랑 사귀다가도 다른 사람 안만날거란 보장이 어딨어." "너 좋아하는거, 진심이야." "..싫어요, 진짜 싫어.." "효신아.." "이제 못 믿겠어요..."
나는 겁이 났다.
- 그 후로 나는 필사적으로 아저씨를 피해 다녔다. 학교 가는 길에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아저씨 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후다닥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기도 했고, 학교가 끝나고 집에 와서는 아예 집밖으로 나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수능이 끝난 터라 학교에 오래있는것도 아니라 거의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있었다. 차라리 밖에서 늦게까지 놀다가 들어올 수 있으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수능이 끝남과 동시에 여기저기 나다니는 친구들 틈에 끼어 발걸음을 옮기다가도 자꾸만 다운되는 기분에 결국 집으로 다시 돌아오기 일쑤였다. 하루 종일 집에서 하는 거라곤 때 되면 밥 먹고, 심심하다 싶으면 티비를 보고, 그것도 재미없어 지면 몇 시간씩 노래를 듣고, 그러다 잠들고. 영양가 없고 활력도 없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아저씨랑은 뭘 해도 즐거웠는데, 혼자 하는 것들은 아무 감흥이 없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이렇게 혼자서 지내는 시간을 못 견디게 만들어버린 아저씨가 원망스러워졌다. 모른 척 다시 아저씨 곁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러기엔 아직 불안한 마음이 컸다. 여자친구와 헤어지면서까지 날 선택했다는 사실보다,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는게 아직은 조금 더 크게 다가오는 듯 했다.
그렇게 며칠을 텅텅 빈 것 마냥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지내다가 슬슬 답답해져 오는 마음에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싫다고, 가라고 밀어낸 건 난데, 그렇다고 정말 그 뒤로 연락 한 번 하지 않고, 찾아오지도 않는 아저씨의 태도에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괜시리 서운해져 오는 마음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복잡한 마음이 커질수록 보고 싶은 마음도 커져갔다. 짜증나는 것도 화나는 것도 전부 아저씨 때문이라서, 그래서 더더욱 보고 싶어졌다.
그러다 어느 날은, 아저씨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집 앞에 쪼그려 앉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효신아..?" "..."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응?" "..." "..아저씨 기다렸어?"
오랜만에 보는 아저씨 얼굴이 조금 수척해진 것 같아 괜히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애써 삼키며 한참을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다 그대로 뒤돌아 집안으로 들어와버렸다. 보고 싶었던 얼굴인데, 막상 보고나니 눈물밖에 나질 않아 집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현관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그런 내 목소리가 현관문 밖으로도 울려퍼지는듯, 아저씨는 한참이나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겨우 울음을 멈추고 한참이 더 지나서야 아저씨가 집안으로 들어가는 듯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잠깐 얼굴을 마주보고 나자 더더욱 아저씨를 보고 싶어지는 마음이 커져가는듯 했다. 하루 종일 안절부절 하며 집안을 돌아다니다 현관으로 향하기도 여러 번 반복했으나, 곧 다시 발걸음을 돌려 방안으로 들어오곤 했다. 밥을 먹으려다가도 아까 본 아저씨 얼굴이 생각나 결국 저녁도 먹지 못했다. 그렇게 새벽녘까지 온 집안을 들쑤시고 다니며 복잡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다, 결국엔 현관문을 나서 아저씨 집으로 향했다. 이미 시간은 새벽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문 앞에서 망설이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선 집안에선,
그렇게도 보고 싶던 사람이 거실 소파에서 잠들지 않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저씨," "이리와." "진짜...짜증나," "미안해, 미안해..."
짜증을 내면서도 팔을 벌리는 아저씨 품에 잽싸게 안겨들었다. 언제나 따뜻하게 안아주던 그 온기가 여전해 또 다시 눈물이 터졌다. 복잡한 감정에 끅끅대며 울어대자 아저씨가 손을 올려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나를 달래었다.
"힘들게 해서 미안해." "..." "네가 지금처럼 나한테 안겨있기만 해주면, 나는 이제부터 널 위해서 뭐든 다 할 생각인데," "..." "..있어줄거지?"
아직까지도 선뜻 용기내기가 두려웠지만,
"아저씨가...네가 많이 절실해, 효신아." "...나 아직, 복잡한데," "옆에만 있어줘. 그냥, 여태 하던 것만큼만. 응?" "..."
나는 다시 그 손을 붙잡아 보기로 했다.
- "아저씨," "응?" "그...여자친구..." "..응." "어떻게 헤어졌어요? 2년이나 사겼다며..." "..알고 있더라. 내가 다른 사람 좋아하게 된 거." "슬펐겠다..." "..응," 비록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왠지 모를 죄책감이 마음 한켠을 따끔하게 찔러왔다. 내가 아니었다면 굳이 서로 등 돌리지 않았어도 될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드는 동시에 지금 내 옆에 아저씨가 있다는 사실이 또 너무 좋아서,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복잡한 마음에 아저씨 품으로 더 안겨들자 아저씨도 아무 말 하지 않고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규칙적으로 토닥이며 내려앉는 손길이 네 잘못이 아니야, 라고 말해주는것 같아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 했다.
"..많이 놀랐어?" "당연하죠, 안 놀라는 게 이상한거지.." "미안해," "이제 미안하다고 그만해도 되는데," "..그래도 미안."
그렇게 미워죽을것 같았는데,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말만 하는걸 보고 있자니 썩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별로 냉정하고 담담하게 굴 수 있는 성격도 아니면서, 여자친구랑 헤어지면서까지 날 붙잡을 생각을 했다는 게 대단하다 싶었다. 이제 어차피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 돼 버렸고, 이래저래 나보다 더 복잡한 마음일 아저씨 대신에 내가 더 대담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아저씨," "응?" "향수 바꿨어요?" "...엥??" "향수 바꿨냐고요. 아저씨 냄새가 아닌데,"
아저씨 품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자 아저씨가 그제야 슬며시 웃으며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하나 더 있던 거야." "그렇구나. 근데 난 저번께 더 좋은데," "그래?" "응, 지금껀 좀..늙은 아저씨 같아." "내일 당장 바꿀게."
큭큭 웃으며 아저씨 품에서 벗어나자 아저씨가 내 양볼을 붙잡고는 한참을 쳐다보기만 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마주한 아저씨는 볼살이 조금 빠져있었고, 피부가 조금 푸석해진 느낌이었다. 원래부터 남자치곤 많이 얇은 편이었던 허리가 더 얇아진 것만 같아 밥을 먹고 다니긴 한거냐며 핀잔을 주자 멋쩍은 듯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근데 너, 그래서 시험은 잘 친거야?" "당연한걸 뭘 물어요. 내가 누군데." "얘가 또," "웬만하면 겸손하고 싶은데, 너무 잘 쳐서." "..그래." "뭐에요 그 반응? 나 진짜 잘 쳤다니까요?" "알겠어, 나 아무 말 안했다..?" "안 믿는 반응이잖아요!" "아냐, 믿어. 내가 널 왜 안 믿어? 그치?" "아니..!" "밥 먹을까? 배안고파?"
이 새벽에 무슨 밥타령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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