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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아는 과 내에서 조용한 애로 유명했다. 그렇게 못난 얼굴도 아닌데. 도경아는 안경을 고집했다. 흑발의 긴 생 머리도 고집했다. 어느 날 나는 강의실에 도경아의 옆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자리에 앉으려 하자 친구들이 말렸다. 나는 친구들의 손을 뿌리치고 도경아의 옆 자리에 앉았다. 도경아는 수업 내내 가만히 교수님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경아는 겉 치장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항상 도경아의 옷차림은 수수함을 넘어서서 옷 사는데에 제약이라도 받는 건지 단정했다. 단정한데 촌스럽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던 건 도경아의 특별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같은 자리에 앉았던 날, 도경아는 흰 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블라우스는 적당한 사이즈로 도경아에게 꼭 맞았고, 부들부들해 흘러내릴 것 같은 분홍색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도경아가 몸매가 좋다는 건 과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 그 날도 도경아의 몸매는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은근하게 드러나있었다. 나는 시선을 흘끗 돌려 도경아의 블라우스를 훑어보다 가슴 언저리를 쳐다봤다. 팔부터 손목까지 가느다란 도경아는 158의 작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 가슴은 매우 컸다. 정말 컸다. 선배들과 술 마시던 자리에서 선배들은 도경아가 아마 d컵이 아닐까 하는 우스갯소리까지 하곤 했다. 가슴 부근에 잠궈진 블라우스의 단추는 금방이라도 그녀가 기지개를 핀다면 툭, 하고 튀어나갈 것 같았다. 거기에다 덤으로 피부가 하얗기 때문에 다른 곳은 분홍색이 아닐까 하는 농담 까지도..
도경아는 그날도 짧은 치마가 아닌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굽이 없는 흰 단화를 신은 그 위로 보이는 얇은 발목은 내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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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도경아는 나에게 시선 한 번을 주지 않았다. 나는 긴 강의 시간 동안에 어떻게 도경아와 친해질지 머리를 굴렸다. 다시 한 번 도경아를 흘끔 쳐다보는데. 도경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 날 나는 도경아의 눈을 처음으로 마주봤다. 도경아는 눈이 아주 컸다. 눈이 사슴같다라는 표현이 이런 곳에 쓰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나는 도경아의 안경을 벗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이 저렇게 크다면 시력이 그다지 나쁜 것도 아닐텐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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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아는 나와 눈이 마주친 채로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나는 도경아의 시선을 피할 생각도 없었으며 오히려 기뻤다. 도경아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사실 나는 과에서 잘 생긴 축에 속했다. 연극영화과에서 그, 잘 생긴 애? 하면 내 이름이 가장 먼저 튀어나올 정도로. 그에 비해 문예창작과였던 도경아는 존재감이 없었다. 그게 그녀와 나의 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날은 내가 옷을 꽤나 차려입고 온 날이었다. 핏 좋은 하늘색 셔츠에, 곤색 자켓. 그리고 나름 신경쓴 머리에. 도경아의 시선이 아무리 나에게 닿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도경아가 나를 쳐다본지 한 2분 쯤 경과했을 때, 도경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왼쪽 팔로 턱을 괴어, 내게 들릴만큼 작게 웅얼거렸다.
" 너.. 나 좋아해요? "
그 날 나는 내 감정을 못 숨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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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로 나는 도경아에게 은근히 추근거렸다. 도경아와 마주보고 지나치는 말에는 일부로 가던 길의 방향을 돌려 도경아에게 접근하곤 했다. 사놓고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를 그녀에게 쥐어주기도 했다. 도경아는 그럴 때마다 나쁘지 않은 듯 동그란 눈으로 날 올려보다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게 다였다. 어떤 날은 도경아가 전공 서적을 들고 바쁘게 걸어갈 때 그녀의 책을 휙 받아들고 같이 걷기도 했다. 그걸 몇 차례 본 선배들은 내게 눈짓을 건넸고. 선배들은 눈치를 채고 입을 닫았다. 도경아가 자기의 이름이 소문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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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도경아의 소문을 듣고 뒤로 넘어갈 뻔 했다. 도경아가 자신이 고집하던 안경을 버리고 학교에 왔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선배들은 그동안 안경이 웬수였다며 도경아가 저렇게 이쁜 지 몰랐다는 둥 내게 찬사를 날렸다. 나는 도경아의 모습을 보려 창문을 기웃거리며 살펴보는데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다행인지, 그 날 도경아는 내게 무슨 일인지 강의가 끝난 후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그 문자 때문에 강의를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학교 정문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도경아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두 눈을 비비고 저기서 오는 여자가 내가 알던 도경아가 맞나? 라는 생각을 했다. 도경아는 무거워보이던 긴 생머리를 느슨하게 올려 묶은 채로 평소에 입지 않던 흰색 미니스커트에 목이 살짝 파인 티셔츠 위에 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살짝 높은 구두를 신은 채로 조신하게 걸어오는 도경아의 모습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도경아의 목선이 그렇게 예쁜 줄 그 날 처음 알았다.
나는 괜히 그 날 신경써서 입고 오지 않은 걸 탓하며 머리를 살짝 때렸다. 도경아의 키는 구두를 신어도 내 어깨 아래에 닿았다. 나는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것을 느끼며 안고 싶다는 충동을 억지로 참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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