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억 나? 이길, 우리가 함께 걷던 이 길 말야.
난 아직도 가끔 이 길을 걸으며 널 떠올리곤 하는데. 너는 어때.
《199x. 3. 3.》
설렘, 또는 기대. 10대의 마지막을 보낼 이 곳에서.
낯선 교정과 운동장, 옅은 봄날의 색채.
흠흠-
콧노래, 콧노래, 그리고 너.
"안녕, 난 김탁구. 넌?"
"장한울."
《199x. 3. 7.》
왠지 한울이랑은 친해지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애들보다 친해지기 힘들어. 입학식날 인사한번 한게 고작인가.
꼭 말걸어봐야겠다, 꼭.
《199x. 3. 10.》
나는 한울이에게 점심을 같이 먹자며 태연하게 도시락을 꺼내들었다.
"나 오늘 맛있는거 싸왔거든. 같이먹자."
용기내길 잘한 것 같아. 좀 쑥스럽긴 했지만.
한울이와 조금 더 가까워 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199x. 3. 28.》
한번 말을 트기 시작하니 친해지는건 식은 죽 먹기였다. 남자애들 특유의 단순함이랄까, 그때부터 우린 밥도 같이먹고 청소도 같이하고. 집에도 같이 걸어갔었지.
나는 한울이와 집 방향이 반대였지만 밤공기가 좋아 걷고싶다는 것을 핑계로 한울이의 집 앞을 거쳐 돌아오는 길을 택하곤 했다.
한울이네 집 가는 길.
그 길은 봄이면 벚꽃, 가을이면 단풍, 겨울이면 눈꽃으로 물드는 아름다운 가로수길이었다. 그 길을 걸으며 나와 한울이는 별 시덥잖은 얘기를 하며 환히 웃었다. 우린 그 길이 좋았고, 그 길을 걸을 때면 30분이 1분으로 줄어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다음에는 야자땡땡이치고 노을질때쯤에 와보자. 그래그래, 먹을거 하나씩 사고 벤치에 앉아서.
《199x. 4. 1.》
"야, 장한울. 오늘 오락실갈래?"
"째고?"
"뭘 물어. 당연한거아니냐."
피식-우리는 통했다는듯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너네집 가는길, 그 가로수길에 있는 오락실가자.
좋아. 지는사람이 아이스크림사기.
한울이와 나는 그 오락실에서 동물철권이라는 게임을 많이했었다. 주로 내가 졌다. 이놈은 어디서 이런기술들을 배워왔는지. 나는 매일 내가 아이스크림을 사야 할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냥, 매일 져도 좋았고 돈이 나가도 좋았다. 함께 무엇인가를 즐겁게 한다는게 행복했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들고 가로수길을 걷다 문득 오늘이 만우절이라는 것이 기억났다.
장난한번 쳐볼까?
나는 짐짓 무게를 잡고 한울이를 불렀다.
"장한울."
길에서 멈추어 선 나를 돌아보는 너.
"나 사실 말할게 있는데,
....나 너 좋아해."
너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것도 엄청 심각하게.
어, 이러려던게 아닌데. 내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닌데. 나는 급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기위해 한울이에게 해명했다.
"야~왜그렇게 진지해! 오늘 만우절이잖아!"
내가 이렇게 말해도 한울이의 표정은 풀어질줄 몰랐다.
"..넌 그런걸 가지고 장난을치냐."
그대로 뒤돌아 걸어가는 한울이를, 왠지 나는 불러세울 수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다시 그를 쫓아가 장난이라며 아이스크림 하나 더 사겠다며 능청을 피울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왠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땐 몰랐어.
그게 장난이 아니었다는걸. 내 마음이 나도모르게 그렇게 말했다는걸.
《199x. 4. 10.》
한울이는 그 날 이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내가 화해를 하려 머뭇거리며 다가가도 그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집에 같이 가려고 해도 먼저 빠른걸음으로 가버리고.
아, 겨우 친해졌는데. 짜식이 쪼잔하기는.
이놈의 입이 문제지.
오늘은 꼭 집갈때 쫓아가서 미안하다고 말해야겠다.
"야! 야, 장한울! 거기좀 서봐!!"
매정한자식.
"야이 새x야!!!!!!"
그제서야 돌아보는 너. 욕을해야 말귀를알아듣냐?
"...뭐."
"후..후..뛰느라 죽는줄알았네. 아직도 화났냐 ? 사내놈이 말한마디에 꽁해가지고는."
손에 들고있던 아이스크림 하나를 내밀었다.
"여기. 사과의 표시로."
한울이는 아이스크림을 받아들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아직도 화가 안풀렸나?
"음..너가 화풀릴때까지 아이스크림사줄게! 먹고싶을때마다 말해."
"...진짜지?"
"짜식, 아이스크림이 그렇게좋냐?"
그제야 웃는 너를 보고 마음이 놓이는 나도 참, 찌질하다.
《199x. 5. 16.》
우린 그렇게 다시 화해를 했고 그 후로 더욱 함께 있는 시간이 늘었다.
그리고 오늘은 고등학교에 들어와 처음으로 체육대회를 하는 날이었다. 나는 야구부였기때문에 선배들과 함께 모여 마지막으로 준비운동을 하고 야구장으로 나갔다.
작은 학교 내 야구장에 들어서자 많은 학생들이 경기를 구경하기위해 좌석에 앉아있는것이 보였다.
한울이는 왔으려나.
주위를 둘러보지만 많은 인파들이 있어서인지 한울이를 찾을 수 없었다.
찾고 찾았지만 결국 한울이를 찾지 못하고 내 차례가 되었다.
타자석에 서 투수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공이 투수의 손을 벗어나고, 힘껏 배트를 휘둘러 공을 때린다.
와아아-!!
함성소리가 야구장을 가득 메우고, 공은 철조망을 넘어 좌석으로 떨어진다.
홈런이었다.
그렇게 체육대회가 끝나고, 나는 서둘러 한울이를 찾았다.
한울이는 교문 앞에 서있었다.
"장한울!"
손을흔들며 뛰어가 한울이의 앞에 섰다.
"야! 너 오늘 경기 보러 왔어?"
"어...봤어."
"그게 끝이야?"
"너 좀 하더라."
"큭큭큭, 그거 칭찬이지? 고맙다~"
따뜻한 5월의 햇살 아래, 우리는 파릇파릇한 봄 나무의 잎사귀처럼 소란스레 재잘대며 그 가로수길을 걸었었지.
아아- 그리도 찬란한 시절.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때.
우린 몰랐다. 삶에서 봄과같이 가장 푸르른 그 시절, 주위의 모든 세상이 우리들로 인해 빛났다는 것을.
《199x. 7. 30.》
여름방학식날.
온 세상이 초록색의 활기로 가득 찰 때, 모두들 한껏 들떠 여름방학의 계획을 세우며 기대에 부풀었다.
나와 한울이 역시도 무얼 하고 놀까 차례로 계획을 세우고 방학 내내 숙제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아무 걱정없이, 아무 고민 없이. 그렇게 서로와 함께했다.
시간이 갈 수록 한울이는 나에게, 또 나는 한울이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또한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한울이가 나에게 단순한 우정을 넘어선 감정을 겪게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199x. 9. 2.》
여름의 끝자락, 가을의 첫자락.
"..야."
"왜? 왠일로 그렇게 심각한표정이냐."
"그게.. 나 이사간다."
한울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뭐?"
"..후, 갑자기 가게 된거라서. 다음주에 갈 것 같아. 벌써 엄마가 전학수속 밟아놨더라."
"..."
한울이도 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그렇게 아무말 없이길을 걸었다.
《199x. 9. 5.》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평소처럼 웃었다.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고, 수업을 듣고, 말장난을 했다.
또 아무렇지 않게 가로수길을 걸으며 하루하루가 가는 것에 대해 미련을 보이지 않았다. 서로 그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기로 한 것은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199x. 9. 11.》
"오늘 .. 여기 이 길로 같이 걸어가는거. 마지막이네."
내가 말을 꺼내자 한울이가 걸음을 멈췄다. 나를 보는 한울이의 눈에서 슬픔이 묻어났다.
"...그러게."
"장한울, 나 잊지마."
낯간지럽게 무슨 시덥잖은 소리야.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며 우물쭈물했다. 어색했다. 할 말이 있는데 목구멍이 막혀버린 기분이랄까.
그 어색함을 깨고 한울이가 말했다.
"..야. 나 사실, 수연이한테 고백받았다."
뭐? 나는 심장에 돌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언제?"
"..오늘 낮에. 편지 주던데."
한울이가 나를 올려다본다. 그리고는 묻는다.
"어떻게 할까, 김탁구."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온 세상이 돌아버리는 듯 했다.
싫은데, 정말 미치도록 싫은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너와 함께 길을 걷는다는게.
그렇지만 말할 수 없었다. 사실은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알아 챈지 좀 됐다고.
혹시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냐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겁쟁이였다.
"..잘됐네. 이제 우리 장한울한테도 여친이생기는건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장한울이 나를 본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정말 그렇게 생각해? 라고 묻고 있는 너를 나는 모른척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혼잣말이라서 미안해.
"나 없어도 같이 다닐 사람이 생긴것 같아서 내가 마음이 놓인다."
사실은 널 사랑해. 차라리 들켰다면 좋았을까.
"장한울, 연락할게. 잘있어라."
더이상 있다간 버티지 못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빠르게 길을 간다. 나는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돌아 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미친듯 뛰어가 너를 안아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20xx. 4. 20.》
그 후로 나는 일부러 한울이를 찾아가지도 전화를 하지도 않았다. 그러기를 10여년, 다시 용기를 내어 이 길에 선다.
다시 보이는 익숙한 풍경에 나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낀다.
한울, 장한울.
바람이 불며 가로수길의 벚꽃잎이 흩날린다.
쏟아지는 분홍색 눈발들..
보고싶다.
퍽-
"악!!뭐야!!"
내 등 한가운데로 충격이 느껴졌다.
내 등을 때리고 눈 앞으로 굴러온 것, 그것은
낡고 너덜너덜한 야구공.
"이제오냐. 김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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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링별로 나올고에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