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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톡 상황톡 공지사항 팬픽 만화 단편/조각 고르기
몬스타엑스 이준혁 김남길 샤이니 엑소 온앤오프
l조회 1152l 5

 

 

 

 

언제부턴가 거울을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지. 이젠 그게 너무도 익숙하니 꽤 멋진 표정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지을 수 있어. 하지만 내 주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편하지 않아. 그들이 내게 강요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남자스러움 말야. 난 자꾸 그럴수록 마냥 불쾌한 듯 찡그리다가 나중엔 그냥 웃지. 몸 여기저기에 검은 실이 올라오면서 내 가치에 대한 저울질이 시작되었어. 난 남자래. 이로써 난 남과 내 것을 가르고 만만해 보이는 녀석 위로 올라가 밟아야만 해. 그래야 내 안의 것을 찾을 수 있대.

-버벌진트, 소년을 위로해줘 中-

 

 

 


익숙하게 흐려지는 저녁노을과 쉴 새 없이 딸랑거리는 귀뚜라미 소리. 눈 부실만큼 주황빛으로 물든 논과 하늘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일상일 때도 있었는데. 아마도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저녁노을은 사라지고 밤하늘에 밝은 별들이 아름답게 수놓아질 것이다. 나는 자전거에 기대 그 때를 회상한다. 스타가 될 것이라던 김종인. 밤하늘의 별들을 관객삼아 녀석은 쓸모없는 노래를 곧잘 불러대곤 했었다. 물론 관객이 마냥 별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녀석의 옆에 부속품마냥 붙어 다녔던 친구라는 이름의 나도 관객으로 있었다. 마지못해 박수를 쳐주긴 했었다만, 사실 녀석의 노래 실력은 정말 최악이었다. 흔히 말해서, 돼지 멱따는 소리. 금방이라도 귓구멍을 손으로 막고 싶었지만 혹여나 녀석이 상처를 입을까, 나는 억지로 웃으면서 노래를 들어줬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염없는 박수. 그러면 녀석은 정말 스타가 된 것 마냥 뿌듯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 줬었다. 그 시선에는 언제나 내가 들어차 있었다.


시작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까. 인연의 시작부터 말해야겠지. 김종인을 처음으로 만났던 건 내가 열 살 때였다. 이 동네에 이사를 온지 한 시간도 안 됐던 그 때. 언젠가 귀농 생활을 하고 싶었다던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오게 된 시골마을. 사실 나는 어리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친한 친구의 보증을 서 주었다가 단 한 순간에 뒤통수를 맞았다는 것을 말이다. 때문에 집안 곳곳에 붙여진 빨간딱지와 함께 나는 친할머니가 지내시는 이곳에 오게 된 것이었다. 사람이라고는 장을 보고서 집으로 돌아가려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전부인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우리 가족을 몇 시간 전부터 마중 나와 있었을 할머니는, 버스가 도착하고 그 곳에서 우리 아버지가 등장하자마자 등딱지를 정말 열심히도 때려 주셨더란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태민이 보기도 창피하지 않냐. 그러자 아버지가 키 작은 나를 내려다보며 눈치를 봤다. 나는 모르는 척 순수한 표정을 지었었다. 그게 꽤 그럴듯 했나보다. 아버지는 내가 아무 것도 알아채지 못했을 거라 확신한 얼굴로 할머니에게 일단 집에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독촉했고, 나는 그 뒤를 총총걸음으로 따라갔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연기에 대한 재능은 김종인이 아니라 나에게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이제 와 연기자로 갈 것도 아니지만. 깨달음은 언제나 늦는 법이다. 그렇게 평생 서울에서 떳떳이 잘 나가고 살 것 같았던 우리 집안의 퇴락 아닌 퇴락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잘 나가는 비즈니스맨이었다. 꽤 이름이 알려진 기업에서 열심히 발로 뛰며 일하셨다. 서울에서는 널린 게 회사원들이라서 도시 사람들에게는 한낱 월급쟁이로 기억되었을 뿐 그저 그런 존재로 알려져 있었지만, 아버지의 고향인 시골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최 씨네 집 첫째 아들이 그 회사에 들어갔담서? 한 달 월급이 그 정도나 돼? 소문이 빠른 시골 마을에서 아버지는 저도 모르는 새 유명 인사가 되어있었고, 할머니는 의도하지도 않았건만 그들에게 잘난 아들을 두게 된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시골 마을에서 꽤나 떳떳하게 당당히 허리를 펴고 다녔더라지. 잔치국수를 해주겠다고 동네잔치를 연 것도 아니었는데 동네 어르신들은 모두 우리 할머니를 부럽다는 듯 쳐다보았었다. 물론 아버지의 몰락 이후로 그 시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하게 식어버렸지만.


시골에서의 첫 식사는 불편했다. 엄마는 내 어린 동생인 승희에게 밥을 호호 불어 먹여 주느라 정신이 없었고, 할머니는 전과 다르게 일부러 소리 내어서 젓가락질을 했었다. 아버지는 기가 죽어서 고개를 푹 숙인 나약한 모습으로 그저 국만 휘저었고. 아버지의 약한 모습을 보는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더 이상 예전의 잘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는 분명히 깨닫고 알던 바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마주하는 건 조금 불편했다. 때문에 입을 꾹 다물고 그 사이에 껴서 이리 저리 눈치를 살피다가, 밥그릇을 채 반도 비우지 못하고 자리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서 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내뱉었던 그 말. 할머니, 화장실이 어디야?


외양간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만 나무 건물 있지? 그게 화장실이야. 할머니가 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운동화에 대충 발을 끼어 넣고서 집을 나왔다. 짧은 다리를 터덜터덜 힘없이 움직여서 외양간에 다다랐다. 곧이어 나무 건물을 발견하고서 끼이익거리는 듣기 싫은 소음과 함께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단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문을 도로 닫았었다. 숨기지 않고 형체를 드러낸 배설물들은 정말 두 눈뜨고 봐주기 어려웠던 광경이었다. 게다가 문만 열었을 뿐인데 콧구멍을 괴롭히는 고얀 악취는 또 뭐고. 결국 나는 그 곳에서 자리를 떴다. 그리고 내가 간 곳은? 집 안? 아니. 바깥이었다. 마당을 완전히 나와서 앞에 조그맣게 펼쳐진 샛길을 따라 겁 없이 당차게 걸었다.


모든 일의 운명은 아마도 인연일 것이라고, 만일 내가 그 샛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그냥 집 안에 들어가던지, 아니면 화장실에 들어갔던지, 것도 아니면 바로 옆에 있는 현희네 집을 구경 갔더라면? 어쨌거나 나는 그 때의 선택에 단 한 번도 후회 한 적은 없었다. 샛길은 당시 어렸던 내가 거부하기에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였고, 하나의 모험지처럼 비춰졌었다. 내 평생을 좌우한 인연을 만난 것도 그 덕분이었다.


샛길을 걷자 끝이 없을 것 같은 논이 펼쳐졌다. 추수가 얼마 남지 않아 벼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주황빛 저녁노을이 넓은 논을 덮쳤고, 작은 내 몸 역시 아무렇지 않게 감싸 안았다. 산 속으로 들어가는 햇빛이 꽤나 눈부시다. 나는 실눈을 뜨고 익숙치않은 그 광경을 빤히 구경 했었다. 감동이란 건 없었다. 그냥 예쁘구나. 서울이랑은 다르구나. 그거였다.


“너 뭐야?”


그리고 정적을 깬 건 순간이었다. 발랄한 목소리. 뒤를 돌아보자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조그만 키를 갖고 있는 녀석이 잠자리채 따위를 들고서 나를 요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잔뜩 경계하는 눈치였다. 머리에는 밀짚모자를 쓰고서 어디서 아버지 것을 구해다 온 듯 축 늘어진 민소매를 입고 있는데,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다. 촌놈이다. 촌놈. 나는 대놓고 푸흡, 하고 싸구려 비웃음을 날려 주었다. 그러자 녀석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화가 났나? 나는 웃음을 멈췄다. 기분이 나쁘다는 의사를 표현하면 사과를 하려고 생각을 먹던 참이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녀석은 화는 내지 않고, 다만 내게 뜬금없이 잠자리채를 건네면서,


“잠자리 잡을래?”


라는 생뚱맞은 소리를 냈을 뿐이다.


얼토당토했다. 살면서 이런 첫인사는 처음이었다. 서울에서 내게 이런 식으로 다가오던 친구들이 있던가. 없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수줍어했고, 정말 관심이 있는 게 아닌 이상 그냥 모르는 척 스쳐 지나가는 게 다반사였다. 그러나 내 앞에 있는 녀석은 달랐다. 열 살이었던 나는 그 때도 녀석이 참 신기하게도 느껴졌더란다. 저런 자신감은 어디서 구할 수 있는 거지? 역시 시골 애라 그런가? 확실한 건 나는 녀석과 잠자리를 잡으면서 빠른 시간 내에 친해졌고, 녀석은 보기 드문 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김종인. 이름이 김종인이라고 했다. 이름도 정말 저처럼 생겼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내 이름을 가볍게 말했다. 서울에서 온 이태민이야. 그러자 김종인이, 아, 최 씨 할머니네 손자? 물으면,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김종인은 서울에 있다더니 여긴 왜 왔어?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녀석이 건넸던 잠자리채를 들고서 그 뒤꽁무니를 쫓아다닐 뿐이었다. 김종인 역시 내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굴었다. 별안간 어딘가로 손가락질 하더니 저기, 저기 잠자리 있다! 하면서 내 손을 이끌고 그 곳으로 향했을 뿐이다. 나는 막연하게 끌려갔었다.


그 인연이 내 인생을 뒤바뀌어 놓았다. 시작부터 할머니와의 마찰이 있을 것 같던 시골 생활은 생각보다 화려한 빛으로 막을 올렸다. 그 바탕에는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던 저녁노을이 있었다.

 

 

 

 

 

 


아이들은 나와 김종인의 사이를 대장과 부하라고 정의했다. 사실 겉보기엔 맞는 말이었다. 나는 언제나 제 신념을 즐겁게 늘어놓는 김종인의 뒤를 그 작은 키로 졸졸 쫓아다녔었다. 아이들이 정의한 대장과 부하가 그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모든 건 인연의 감정이 태초였기 때문이다.


부랄 친구. 김종인을 나를 단순한 부랄 친구라고 했다. 그래서 대장과 부하라고 부르는 아이들의 눈을 홀기거나 가끔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들기도 했다. 참, 알 수 없는 우정이다. 교무실에서 불타는 고구마의 얼굴을 하고서 반성문을 쓰는 김종인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웃기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지나가던 아이들이 김종인의 얼굴을 참 재미나게 구경 했었더라지. 물론 나는 아니었다. 씩씩대는 김종인을 달래 주었으면 그 뿐이었지, 단 한 번도 싫을 법한 소리 꺼내 본 적 없었다.


나는 내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이 조용한 성격이 문제가 되었는가보다.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애가 숫기까지 없다. 텃세가 심한 시골 아이들은 나를 홀로 내버려두고 저들끼리 뭉쳐 다녔다. 거기서 유일하게 내 옆을 지켜주는 건 종인이 혼자였다. 제 친구들 무리에 나를 억지로 넣어서 같이 밥을 먹어주고, 하교 길까지 외롭지 않게 지켜주었으니, 그 마음은 고마웠으나 나는 종인이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과 딱히 친하질 않아서 그 시간들이 불편하게 느껴졌던 건 언제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종인과 함께 단 둘이 있는 걸 좋아하기 시작했던 거지.


교복을 입기 시작할 무렵 때부터 종인이는 키가 부쩍 눈에 띄게 자라났다. 처음 만났던 열 살의 그 때는 분명 나와 키가 똑같았는데,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나란 존재는 종인의 광대에 간신히 다다르고 있었다. 녀석과 눈을 마주치거나 어깨에 팔을 두를 때 불편한 점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존심이 상한다든지 기분이 나빴던 적은 없었다. 어차피 나는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놈인지라, 키 작은 것쯤이야 남들 보기에 별 상관없다. 그냥 열심히 공부하면 그게 끝이다. 내 평화로운 표정을 보며 종인이는 또 제 신념을 떠들어 대기에 입을 바삐 움직였었고. 일상은 항상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우리 집에는 자전거가 있었다. 아버지가 언젠가 아는 분에게서 구해 왔다는 중고였다. 하지만 중고라고 하기에 무척이나 세련된 형태의 자전거였던지라, 나는 그 자전거를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곧장 자전거를 타고 좁은 집 앞 마당을 움직였었다. 그럴 때면 빨래를 널고 있던 엄마가 야, 정신 사납게! 나가서 끌어! 하고 화를 냈었다. 나는 그 화를 이기지 못하고 자전거에서 내려 그것을 끌고 마당을 완전히 나갔었다. 자전거를 끌며 터덜터덜 걷던 발걸음이 멈춘다. 나는 다시 자전거에 몸을 실었었다. 그리고 서툰 발길질로 멈추길 여러 번 반복하면서 아무도 없는 배경이 펼쳐진 근처 공원 아닌 공원에 향했었다.


망가진 그네와 이제는 더 이상 아무도 타지 않는 미끄럼틀. 먼지가 쌓인 벤치. 허허벌판과 다를 바 없는 공원에서 나는 자전거를 연습했다. 자꾸만 중심을 잃는다. 발을 땅에 끌어서 일부러 자전거를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바퀴를 끌었다. 자전거가 느릿하게, 아슬아슬하게 움직였다. 오른 쪽으로 급하게 커브 했다가 왼 쪽으로 커브, 그 우스꽝스러운 형태를 한 시간이 넘도록 계속해서 반복하자 갈아입지 않은 교복이 땀으로 젖어갔다. 한 것도 없는데 몸은 왜 이렇게 반응을 내보이는지. 이러니까 키가 안 크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자전거를 멈추려 할 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내 자전거를 세게 밀었다. 나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으앗, 으앗, 하고 자전거를 몰았다. 곧이어 자전거는 옆으로 넘어졌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자전거에 깔린 내가 아야…… 하고 신음을 내고 있는데, 위에 그림자가 져졌다. 눈을 크게 떠보았다. 재미나게 웃고 있는 김종인이었다.


“자전거도 못 타냐?”


그러더니 내 몸을 깔아뭉개고 있던 자전거를 일으켜 세운다. 나에게도 손을 뻗는다. 잡고 일어나라는 몸짓. 나는 누워서 김종인의 얼굴과 내밀어진 손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다가, 이내 그 커다란 손을 세게 잡고서 몸을 일으켰었다.


“봐봐. 형이 어떻게 하는지 보여줄게.”


오늘도 교무실에서 반성문을 3장은 썼으면서 이제 와 멋있는 척이다. 형은 무슨. 나는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다. 어디 해보라는 듯 표정을 굳혀 보았다. 김종인이 자전거에 올라탔다. 내게는 크게만 느껴졌던 자전거가, 키가 큰 김종인에게는 그렇게 작아 보일 수가 없었다. 김종인의 손이 자전거 핸들을 잡는다. 그리고 나와는 다른 안정적인 모습으로 바퀴를 움직였다. 자전거가 부드럽게 턴을 하며 공원 아닌 공원을 돌았다.


요정이 구름 위를 걷는 듯, 내게는 마냥 동경스러운 모습이었다. 나보다 키도 크고 친구도 많은 김종인은 이제 보니 자전거도 잘 탔다. 공원을 도는 김종인과 자전거가 유난히 생기발랄하게 비춰졌다. 나는 입을 멍하게 열고서 그 모습을 막연히 구경만 했다. 김종인이 입은 하얀 하복이 주황빛 저녁노을에 물들어졌다. 신기루처럼 빛나던 모습. 내가 못하는 걸 너무나 쉽게 해내는 김종인. 어쩌면 내게 우상일지도 몰랐고, 연민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내가 김종인보다 잘난 건, 음, 글쎄, 학교 성적? 서울에서 살아왔던 지난날들? 근데 그게 잘난 거라고 할 수 있나. 어쨌거나 지금 멋있는 건 내가 아니라 김종인인데.


무대에서 아리아를 부르는 뮤지컬의 주인공처럼, 김종인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정체성을 찾는 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나 혼자서 찾고 깨닫고,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무던히도 태연하게 숨기면 되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까, 연기에 재능이 있었던 건 정말 김종인이 아니라 내 쪽이었다. 한 번뿐인 인생, 이쪽으로 한 번 밀어볼 걸. 괜한 후회가 인다.


대장과 부하, 부랄친구, 그러니까 결론은 산만한 우정으로 엮인 사이. 잠자리채로 닿게 된 인연. 만일 내가 그 때 샛길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슬퍼하지 않았을까. 뭐 지금 와 이런 생각 해봤자 소용없다. 일은 이미 벌어졌고, 시간은 겉잡을 수 없을 만큼 저 멀리로 지나갔다. 게다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돌린다 하더라도, 분명 나는 샛길로 다시 들어갔을 것이며 김종인과의 우정을 절대 끊지 않기 위하여 노력했을 것이다. 김종인이 없다면 나의 인생은 정말 재미없는 무미건조한 맛으로만 기억되었을 거다. 달콤하지는 않아도 쓰기는 하니, 그래도 개성은 있다. 내 인생, 꽤 특징 있네. 그렇게 생각한다. 비극이지만 비극이 아니다. 만족한다.


2차 성징은 금방 찾아왔다. 그리고 하나의 성장통인 몽정기도. 언젠가 이런 말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다.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고. 누가 지은 말인지는 몰라도 굳이 그 상대가 여자라고는 붙여져 있지 않으니, 나도 이 말에 해당되지 않을까. 감히 그렇게 생각한다. 여드름이 나고 변성기가 시작되었던 그 때. 거뭇거뭇하게 자라나는 수염이 창피하던 때가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수염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굴었다.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실은 그게 정상이다. 나도 그렇게 굴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왜인지 창피했다. 김종인이 내 수염을 보면서 너도 남자구나? 하고 장난스럽게 구는 게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었다. 분명 내 감정이 올바른 사랑은 아니었으나 순수함으로 가득 차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사랑이었던 건 확실했다. 아니, 올바른 사랑이 아니라는 법은 없다. 소크라테스는 나와 같이 남자에게 연민을 느꼈었다. 철학책을 보면서 그런 식으로 위안 받던 나날들. 사춘기. 주황빛 저녁노을. 김종인은 나날이 잘생겨져갔다. 또렷해지는 눈매와 자꾸만 벌어지는 어깨, 다부진 목소리. 여자 친구도 정말 징그럽게 많이 사귀었었다. 참, 대단한 놈이었지.


근처 여고의 숙이를 사귀었다더니, 한 달 만에 헤어지고 3반 지현이랑 사귀었다. 언젠가 지현이와 100일 이상 갔던 날, 지현이에게 받은 선물을 내게 자랑했었다. 태민아, 이거 예쁘지? 나는 부러운 얼굴로 우와ㅡ하고 찬사를 내보내 주었었다. 그러자 김종인은 마냥 뿌듯한 얼굴로 내게 기분이라는 듯 지현이가 주었던 열쇠고리를 건넸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받기는 했다만 가슴은 찢어졌다. 언제 형체가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원래의 모습을 잃고 너덜너덜해진 가슴. 끝을 모르고 박히는 무수한 총알들. 보이지는 않지만 그 위력은 강했다. 열쇠고리를 만지는 내 손끝이 상처를 받고 가녀리게 떨고 있었다. 김종인은 이런 나를 눈치 채지 못하고 제 얘기만 떠들어 댔었다. 지현이와의 첫 키스 사담이라든지, 서로 나뉘었던 낯 간지러운 대화라든지. 속은 이미 불에 타버려서 재로 남아 버린 나였지만, 겉은 가면을 쓰고서 완벽한 연기를 수행하던 나였다. 진짜? 부럽다. 나도 여자친구 만나고 싶다. 김종인은 그러면 더 신나게 굴었다. 지현이 수줍어하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 줄 알아? 너도 반할 걸. 나는 열쇠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더 꽉 주었다. 주름진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새어나왔다.


종인이가 지현이와 헤어진 건 그 일이 있고 바로 일주일 후였다. 지현이라는 애가 바람을 폈다더라. 종인이는 평소와 다른 나약한 모습으로 엉엉 울었다. 그러면 다른 친구들은 사내애가 창피하게 왜 우냐며 별다른 위로도 해주지 않고 그 곁을 떠났었지만, 나는 유일하게 남아서 종인의 등어리를 두들겨 주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종인에겐 위로가 될 것이었다. 나는 내 위험한 이반적인 감정을 숨기고 그에 대한 최대한의 애정 표시를 건넨답시고 그랬었다. 사실 종인의 우는 모습에 나도 마냥 울고 싶었다. 지현이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그래, 그렇구나. 걔는 여자고, 나는 남자니까……. 아무데도 끼지 못하고 주머니를 언제나 채우고 있던 열쇠고리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좋아한다. 좋아한다, 라. 죽어도 숨겨야 할 감정이었다. 나도 안다. 내가 김종인을 좋아한다고 해서 여느 여자 애들처럼 사귈 수 없고, 평범하게 연애할 수 없다는 것을. 말도 안 되지만 만일 사귄다 하더라도, 나중에 결혼을 할 수도 없잖아. 어쨌거나 윤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맞지 않는 사랑이었다. TV에 동성애적인 장면이 조금만 나와도 인상을 찌푸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머릿속을 강하게 스쳐지나간다. 나는 그럴 땐 묵묵히 밥만 퍼먹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김종인이 수도 없이 여자들과 만남과 이별을 반복할 만큼 내 감정은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오히려 무겁고, 순수했다면 순수했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감정이었다고 나는 감히 확신을 한다. 그러니 쉽게 돌 던지지 말라. 나에게도 무덤까지 간직해야 할 가슴 설레는 첫사랑이니.


동경심 가득 안고 보았던 우상은 어느새 내 영원한 연민의 대상이 되어서 한 없이 다른 여자만을 찾았었다. 그것을 언제나 곁에서 바라보았던 나는 새삼스레 내 인내심이 갈수록 늘어나는 걸 느꼈다. 이것도 훈장이라면 훈장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몰라주는 훈장. 그래도 나중에 시골을 나와 도시에 상경해 사회생활을 할 땐 이 인내심이 큰 도움을 주겠지? 그 땐 나도…… 여자와 결혼을 할 거야. 반드시. 내 감정에는 점점 굳은살과 내성이 쌓여가고 있었다.


우리는 점점 더 자라났다. 그럴수록 종인이를 상대로 몽정을 하는 밤이 늘어났다. 이건 죄악인가? 죄악 인가봐! 나는 내 머리채를 뜯었다. 그리고 뺨을 세게 때리고, 나 같은 건 죽어야 한다고 팔을 꼬집었다. 그러자 바로 옆에 누워 있던 동생 승희가 내 인기척에 인상을 찌푸리면서 몸을 뒤척였다. 많이 자랐다지만 그래도 내겐 여전히 어린 승희. 아이. 생명. 사랑의 결실. 나는 양심이 수도 없이 팔리는 느낌을 받는다. 알 수 없는 자책감에 절망했다. 새벽은 어두웠다. 혼자서만 알아야 하는 그 감정에 강아지 마냥 끙끙 앓았었다. 모든 속이 허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종인이가 아닌 여자를 상대로 몽정하기 위해 노력했던 어린 날의 초상화. 종인이는 더 이상 여자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다만 다른 것에 꽂혀버렸다. 공원에서 내 자전거를 타다가 말했다.


“나, 뮤지컬 배우를 할 거야.”


뮤지컬 배우? 무대 위에서 노래하며 연기 하는 사람? 나는 왜인지 커다란 걱정부터가 들었다. 종인아, 너 노래 못 하잖아. 김종인이 노래를 못 부른단 건 옆 집 현희도 알고 그 집개도 안다. 지나가던 삼척동자가 놀라겠네.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겼고, 그냥 배우라면 모를까, 뮤지컬 배우라니. 종인아 너 그거 좀 무리 아니니.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만 또 목구멍 밑으로 삼켰다. 손대지도 못 할 만큼 소중한 나의 첫사랑에게 괜히 상처를 주고 싶진 않았다. 종인이가 여태껏 여자 친구들에게 차여오며 받았던 상처만 해도 숱하다. 종인로 인해 내가 받는 상처는 다른 별개의 것이다. 나라는 놈은, 상처를 받아도 된다. 김종인은 안 된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박수를 쳐주면서. 기대를 하겠다는 쓸데없는 엄포까지 늘려 놓았다. 그러자 김종인이 마냥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넌 이제부터 나의 1호 팬이야.
나는 얼떨결에 김종인의 1호 팬이 되었다. 사실 1호 팬이 아니라 ‘유일한’ 팬이라는 호칭이 어울렸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마냥 친구라고만 비춰졌던 내가, ‘1호’ 팬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으니, 조금 더 특별한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게 좋았다. 그 것만으로도 소중한 사랑이었다. 그렇게 김종인은 질주를 시작했다. 제 꿈에 대한 영원한 질주. 아이들이 정의했던 대장과 부하처럼, 우리 둘의 사이는 스타와 팬으로 새롭게 정의되어 쓰여 졌다.


그 후로 김종인은 나를 공원에 자주 불러냈다. 저녁을 먹으려 숟가락을 뜨는 순간 어디서 전화벨이 울리면, 그건 김종인이다. 전화를 받은 아빠가 종인이라는데. 하고 내게 말한다. 나는 그러면 숟가락을 내려놓고 미련 없이 자리서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밥은 먹고 가지 그러냐. 아빠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듣는 체 하지도 않고 열심히 뛰었다. 어디로? 공원으로. 김종인이 나를 부르는 곳이란 그 곳밖에 없으니까. 여기는 영화관도, 카페도, 도서관도 없다. 오로지 그 공원이 가장 우리 동네를 대표하는 만남의 광장인 것이다. 공원으로 달리는 나의 숨이 언제나 평소답지 않게 가빠지고는 했다.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고개를 숙이고서는 개처럼 헥헥댔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올리면, 종인이가 손에 무슨 종이를 들고서 나를 멍하게 바라봤었다. 그 표정이 꽤나 놀란 듯 보였더라지. 뭐, 김종인이 나를 공원으로 부르고, 내가 공원에 허겁지겁 달려가는, 그런 일상이 계속 반복되자 김종인도 더 이상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지만 말이다. 물론 나도 쓸데없이 체력이 좋아져서 더 이상 숨 가쁘게 헥헥대는 짓을 하지는 않게 되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 시간에 김종인이 나를 불렀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 공원에는 아무도 없다. 오로지 김종인과 나뿐이다. 그렇다면 김종인이 다른 이는 부르지 않고 나만 불렀다는 얘기가 되는 건데, 김종인과 단 둘이 있었던 적이란 뭐 예전부터 무수히도 많았지만, 그래도 내게는 언제나 설레는 일이라서, 그 것이 중요한 거였다. 다른 건 신경 쓸 수 없었다.


“내가 괜히 불렀어?”


누가 봐도 급하게 온 티가 역력한 나를 보며 김종인이 그리 물었었다. 그러면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마침 운동하고 싶었어. 불러주니 다행이다.”


라는 마음에 있지도 않던 망발을 지껄였다.


“아, 아.”


김종인이 목을 푸는 목소리를 냈다.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종이를 들고서 저렇게 진지하게 구는 모습이란, 생전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또 가슴이 두근거렸었던 것 같기도 하다. 뭐가 그렇게 멋있어 보였는지. 모든 게 처음이었던 사춘기 소년에게 첫사랑은 마냥 빛처럼 다가왔었다.


잘 들어줘. 김종인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긴장한 얼굴의 김종인이 종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침을 소리 내어 꿀꺽 삼키더니,


“하지만 미안해, 네 넓은 가슴에 묻혀, 다른 누구를―”

 

으악.


나는 듣자마자 손을 들어 올려 귓구멍을 막았다. 김종인이 노래를 못 부르는 것이야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막상 오랜만에 들어보니 충격이 배로 돌아왔다. 내 표정이 이렇게 굳혀졌는데도 불구, 김종인은 진지했다. 아예 눈까지 감고 노래를 불렀다.


“생각했었어―”
“그만, 그만!”


내가 소리쳤다. 그러자 김종인이 꽉 감고 있던 눈을 뜨면서 나를 쳐다본다. 동그랗게 뜬 눈이, 뭐가 잘못됐냐는 표정이다. 제 노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도 못하는 것 같았다. 설마 본인이 잘 부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진짜 그런 것 같아서 괜히 내가 다 불안했다. 어쨌든, 못 부르는 건 사실이니까, 따끔하게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번에 뮤지컬 배우를 꿈꾼다고 했던 김종인의 당차던 얼굴이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이 녀석, 이런 실력으로는 뮤지컬 배우는커녕 어디 가서 노래로 분위기 흐려놓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표정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진짜로 비판해줘야지. 냉정하게! 하지만 이런 내 생각과는 달리 입은,


“소리 크기만 줄이면 될 것 같아. 너무 성량이 풍부해서…….”


전혀 생각지도 못 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아, 그래?”
“응. 음색 자체는 괜찮은데.”
“알았어. 다시 불러볼게.”


말과 달리 내 얼굴은 울 것 같이 변해만 갔는데, 김종인은 그걸 전혀 간과하고 있지 못한 듯 했다. 다시 목을 가다듬는 녀석을 보며 나는 비참함을 느낀다. 아무리 따끔한 소리를 해주려 마음을 먹어도, 결국 녀석을 좋아하는 나는 나쁜 소리를 절대로 뱉지 못 하는 것이다. 이것은 숙명이다.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그러니까 뭐라고 표현 못 할, 강제적인 의무. 태초에 내가 벌인 일이니 누구를 탓 할 수도 없다. 절대로 내 품에 안을 수 없는 김종인을 좋아하는 내 마음을 원망해야겠지. 현실을 인정했다. 그러자 김종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미안해, 네 넓은 가슴에 묻혀,”


그나저나 저 노래 제목이 뭐였지. 분명 예전에 라디오에서 많이 들어 본 노래였는데 말이다.


“다른 누구를, 생각했었어―”


그것을 깨닫는 데에는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델리스파이스라는 밴드의 고백이라는 노래. 가사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던 노래였다. 물론 제목도 예뻤다. 고백이라니, 듣기만 해도 얼마나 가슴이 뭉클해지는 단어인가. 물론 내게는 평생 진실로 표현하지 못할 단어였지만 말이다. 단지 내가 남자라는 그 평생의 숙명 때문에, 시작과 끝도 태어나지 못할 단어.

 

 

 

 

 

 


나의 거뭇거뭇한 사춘기의 한켠에는 김종인과 내가 공원에서 보냈던 일들이 일기처럼 빼곡하게 쓰여 졌다. 시골에 이사 왔던 그 순간부터 내게 동경과 우상의 대상이었던 부랄 친구 김종인이 유일하게 못 하는 것이 노래라는 것을 점점 깊게 깨달아 갔으며, 그러는 시간이 흐를수록 대학에 대한 부담감도 하루하루 늘어났다. 학교에서 강제적으로 시키던 야간자율학습을 단 한 번도 빼지 못했던 것은, 그건 김종인을 향한 내 마음 만큼이나 대학이 나를 짓누르는 부담감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조용한 교실. 모두가 문제집을 붙들고 열심히 샤프를 움직여 갔다. 사각거리며 종이에 박히는 복잡한 연산 기호들, 수도 없이 반복되어 읽어진 영어 단어들, 이해가 되지 않아도 무작정 이해시키려 머릿속에 넣었던 언어 문제집의 문학, 비문학.


2학년에 올라오고 나서 학교 아이들 거의 대부분이 열심히 공부에 집중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예외도 존재했다. 그 예외가 내 우상인 김종인씨라고, 나는 조심스레 말해본다. 김종인은 뮤지컬 배우를 꿈꾸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공부는 뒷전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공부가 유일한 특기였던 나만큼은 아니어도 나름대로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던 김종인이 하위권으로 마구 떨어지는 건 정말이지 시간 문제였다. 그놈의 노래, 연기. 야간자율학습은 물론이며 보충까지 매일 매일 빠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유일한 친구인 김종인 없이 쓸쓸한 학교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밤 10시. 야간자율학습이 끝난 시각, 나는 너덜해진 운동화를 힘없이 끌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문득 고개를 들어 올리면 별들이 수도 없이 박힌 밤하늘이 내 눈가를 시큰하게 채웠다. 서울과는 다른 그 모습에 잠시 위로를 받다가도, 다시 현실에 직시해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떨구던건 금방이었지만 말이다.


어디선가 돼지 멱따는 소리, 아니, 정정하겠다. 노래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공원에서 김종인이 종이를 붙들고 그 시간까지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중간 중간엔 연기도 했다. 연기는 그럴 듯하게 봐줄만 했는데, 문제는 노래였다. 박자도 음정도 다 무시한 저 노래 실력을 어떻게 해줘야 할까. 그냥 연기쪽으로만 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김종인은 단순한 연기는 싫어했다. 꼭 노래를 곁든 뮤지컬을 하고 싶어 했다. 게다가 내가 아니면 김종인의 꿈을 지지해줄 사람도 없다. 그래서 나는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김종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뒤에서 박수를 쳐주었다. 김종인이 뒤를 돌아본다. 나와 눈이 허공에서 섞인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해맑게, 자신감이 당당한 얼굴로 씨익 웃었었다. 김종인은 그런 놈이었다.


김종인의 꿈을 향한 질주는 계속됐다. 교육을 위한 학교라는 곳은 언젠가부터 김종인에게 잠을 자는 장소로 쓰여 지고 있었다. 속으로는 쟤 진짜 저러다가 아무 대학도 못가면 어쩌나, 조바심 넘치는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일단 내 사정도 중요하긴 중요했으므로 애써 시선을 문제집에 꽂았었다. 그러나 문제집을 얼룩이는 김종인의 웃는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다시 고개를 돌려 김종인을 보았었다. 오른쪽 맨 뒷자리에 앉은 김종인은 뒤통수만 내보인 채로 꿈나라를 잘도 여행하고 있었다.


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얘기가 있는데, 나에게도 뭔가를 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꿈이 있었다. 누가 들으면 아마 비웃을 게 뻔하다. 그것은 김종인도 마찬가지겠지.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 비웃음이 두려워서 말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김종인의 꿈 앞에서 내 꿈이란 지극히 하찮은 것이므로, 그래서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말이다.


내 세상에서 이태민이라는 이름의 나란 사람은 가장 하찮고 작은, 볼품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언젠가 영화를 만들고 싶다던 영화감독이라는 꿈은 어느 누구의 입에도 들려지지 않은 채로 흐지부지하게 지워져갔다. 언젠가 김종인이 내 영화에 출연했으면 싶어서 써두었던 서툰 시나리오도 분리수거함에 볼품없이 버려졌고 말이다.


아쉬움은 없다. 단순한 욕망이었다고 생각을 한다. 그렇게 미련도 없었다. 김종인만큼 꿈을 크게 바라지도 않았었던 것 같다. 물론 그 마음에는 아버지의 말들도 중간 중간 크게 섞여 있었고 말이다.


“태민이 너는 의대를 가야 한다. 의사가 돈도 잘 벌고 명예도 높아. 알겠냐?”
“네.”


잠시의 거절도 없이 그렇게 승낙해버렸던 당시의 나. 분명 영화감독을 하고 싶은데 그런 말은 죽어도 나오지 않았던 게 신기하다. 의대에 가기 위해 이과로 전향을 하고 그렇게 싫어하던 수학에 몰두하며 지냈었는데, 그 와중에 영화감독에 대한 미련은 너무나 없었던지라 나 스스로도 무척 신기할 정도였다. 물론 내가 착각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내 본심은 영화감독을 크게 꿈꾸고 있는데, 하면 안 된다는 현실의 거짓말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애써 지워지던 것일지도 말이다.


나는 어쩌면 무의식중에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절대로 본심을 내뱉을 수 없는 나라는 약한 존재가 영화감독이라는 꿈도 이루지 못할 때, 차라리 김종인이라도 꿈을 이루어라, 크게 되어라, 라는 바람을 말이다. 모든 게 바보 같고 하찮은 이태민과 달리 김종인은 키도 크고 잘 생기고 자신감도 넘치는 애니까, 나와 달리 모든 게 완벽한 애니까, 꼭 이룰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응원했고 팬의 역할을 계속해서 자처했다. 분명히 할 수 있어. 확신했다. 내가 동경하고 좋아하는 김종인은 어떻게 서든 그 꿈을 이루어야 했다.


언젠가 김종인의 손에 붙들려 군에서 가장 큰 문화예술회관에 갔던 날을 기억한다. 그 곳에서 무료로 이루어진 자선 뮤지컬 공연은 나와 김종인의 청춘을 뜨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배우들이 누구였는지도 모르겠다. 안내 팜플렛은 읽지도 않고 급하게 자리에 앉아 공연을 보기에 급급했던지라 말이다. 내용은 고양이들의 세력 다툼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분장을 한 게 캣츠같기도 하고, 또 근데 고양이들이 어찌나 한이 많은지 그게 꼭 명성황후 같기도 하고. 아무튼 아름다운 뮤지컬이었다.


여주인공이 나와서 아리아를 불렀다. 작고 볼품없는 고양이가 드디어 제 마음을 표출하는 장면이었다. 김종인도 김종인이었겠지만, 내 마음도 울렁거렸다. 꼭 저 고양이가 나인 것만 같았다. 아, 이래서 김종인이 뮤지컬을 하려고 하는 구나. 그 때 느끼기도 했다. 실은 아무도 모르지만 저 고양이는 이 뮤지컬의 하나뿐인 주인공이다. 똑같이 생긴 고양이들에게 묻혀서 지루한 삶을 살아가는 고양이. 어느 누구도 그 고양이에게 시선이나 호기심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이다. 나도 그럴까?


그 순간 누군가 옆에서 내 손을 꽉 잡았다. 고개를 돌려 보았다. 당연한 것이지만 김종인이었다. 분명 관중석은 어두웠는데도 김종인의 눈은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거기서 볼 수 있었던 녀석의 야망. 이 와중에도 녀석이 꽉 붙잡은 손이 뜨거웠다. 식은땀에 젖어간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김종인은 아무 생각 없이 잡은 건데, 나는 내가 녀석을 짝사랑하는 소녀라도 된 것 마냥, 아니, 짝사랑하는 거 맞구나. 다만 소녀가 아니다 할 뿐이지. 아무튼 터질 듯이 설렜었다. 왜 나는 소녀가 아닐까. 내 인생이 희극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그렇다고 비극이라 생각한 적 역시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왜 그 때만큼은 내 인생이 비극이라 느꼈었던가, 나도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가슴이 아렸고, 내가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그거였다. 얼굴에 난 여드름과 수염, 불룩 튀어나온 목젖, 모든 게 다 비참하다. 새어나오려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고 녀석에게 붙잡혀 있던 내 손을 조심스레 뺐다. 비극을 비극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내 부질없는 발악이었다.


“끝났다.”


뮤지컬이 완전히 끝나고, 관객석에 불이 켜지면서 내가 한 말이었다. 자리서 일어났다. 그리고 짐을 챙기며 공연장을 나오려 하는데, 어쩐지 뒤에서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김종인이 멍한 표정으로 아무도 없는 무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 내려다보며 물었다. 뭐 해?


그러자 김종인이 그 잘생긴 눈을 내 쪽으로 꽂으면서, 감동 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태민아. 최고야. 나 정말 뮤지컬 배우 할 거야.


녀석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진심으로 보이는 포즈. 나는 나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입 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녀석을 따라서 나 역시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그래, 최고야. 너 꼭 뮤지컬 해라. 노래는 못하지만, 그래도 내 눈에는 다 멋있으니까. 물론 이렇게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다만 똑같은 포즈를 지어줬을 뿐이다. 김종인이 푸하, 하고 웃었다. 그리고 공연을 보았을 때처럼 눈이 반짝였다. 야심 가득한 표정이 무척 진지하다. 나는 김종인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걸, 그 때 정해진 운명처럼 느끼고 있었다.


내 인생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알 수 없는 비극이었다면, 김종인의 인생이란 비극인지 희극인지 구분이 딱 가는 희극이었다. 그러나 선택의 갈림길은 어쩔 수 없이 다가왔었다. 우주의 흐름인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까. 아무리 내 동경의 대상인 김종인이라도 시간은 붙잡을 수 없었다. 우리는 나란히 고3이 되었고, 학교에서 하는 대학 입시 강연회와 교수 초청회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강연회와 초청회를 듣는 시간들이 아까워졌다. 내 미래에 대한 조바심 때문이었다. 남들은 그것들을 듣기 위해 강당으로 갈 때, 나는 나를 비롯해서 조바심 들끓는 아이들과 함께 교실에 남아서 수도 없이 교과서를 펼쳐 보고 단어장을 펼쳐 보았다. 이미 달달 외울 만큼 읽은 영어 지문들이 막상 시험 문제에 가면 낯설어 지고는 해서, 이번 시험에는 꼭 그런 느낌을 경험하지 말아야지, 하며 지문들을 읽고, 또 읽고 그랬었다.


현실을 판타지처럼 바라보며 뮤지컬 배우를 꿈꾸던 김종인은 감히 대학을 뮤지컬과에 가겠다고 부모님께 선언했다. 그러자 부모님이 노발대발한 건 당연지사한 일이었다. 종인이 정도면 애가 공부 기본 머리도 있는 편이고, 비록 2학년 때부터 많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정시만 노리면 될 법도 했는데, 갑자기 비전도 없는 뮤지컬과라니. 부모님이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 언성을 높인 건 종인이었다. 뮤지컬과가 비전이 없다니요? 저는 꼭 성공할 겁니다. 제 꿈을 무시하지 마세요. 뭐 아무튼 그랬었다. 다음 날 김종인은 얼굴에 멍이 잔뜩 박힌 모습으로 학교를 등교했고 말이다. 애들이 괜찮아? 걱정 어린 목소리를 내보였다. 그러자 김종인은 신경질을 부리면서 대답도 없이 고개를 책상에 박았다. 거칠게 구는 김종인은 꼭 마치 아무도 다가오지 말라는 듯 보여서, 녀석의 1호 팬이자 부랄친구인 나도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김종인은 제 기분 내킬 때마다 나를 부르고 내게 다가오는데, 나에게 김종인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애써 시선을 돌리고 다시 문제집과 싸움을 했다.


3월 첫 모의고사를 보았다. 결과는 평균 2등급이었다. 이 정도면 나쁜 편은 아니지만 의대에 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점수였다. 나 스스로도 공부가 절실하다고 느끼던 때였다. 무조건 1등급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문제집에 코를 박았다. 내가 그렇게 대학을 위해 숫자들과 고군분투할 때, 김종인은 그 시간에 열심히 노래를 하고 연기를 했다. 노래를 할 시간에 연기를 더 하지.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나 역시 워낙에 바빠서 그렇게 말 할 시간도 없었고, 용기도 없었다. 차라리 말없이 적분만 깨는 게 나에게는 훨씬 더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봄이었다.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아 아이들 모두가 열을 올리던 때였다. 영어 선생님이 열심히 칠판에 단어와 숙어를 적어가며 문제 풀이를 해주었다. 그것을 듣다 말고 문득 창가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창밖에서 나오는 바람이 내 머리를 기분 좋게 흐트려 놓았다. 정신줄을 놓으라면 충분히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풀내가 진동하는 것이, 향긋하고 상쾌했다. 그 순간이었다. 펼쳐놓은 교과서에 내 코피가 뚝뚝 떨어지던 것은. 그것을 알아채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애가 선생님, 태민이 코피 나요, 라고 말해준 덕분에.


선생님은 그다지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태민이 화장실 갔다와, 라고 했다. 나는 자리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하고 교실을 나가 화장실에 갔다. 세면대 옆에 있던 두루마리 화장지를 뽑아서 코를 닦았다. 거울 속에 비춰진 내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 때, 좋지 않은 무언가가 내 머리를 스파크처럼 반짝하며 스쳐지나갔다. 왜였을까. 나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이곳을 빠져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의 주입식 교육에 지친 모범생의 반항?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게 그런 감정이 느껴질 리 없었다. 다만 나는 뭔가에 홀린 듯 본능의 무언가에 붙잡혀 복도를 가로질러 뛰었다. 학교를 빠져나와 무작정 뛰는 내 모습이 한 눈에 봐도 미친 자의 형태였다. 한참을 뛰었다. 20분은 뛰었는데 단 한 차례도 쉬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내가 도착한 곳은?


“이태민…….”


공원이었다.


먼지 쌓인 그네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종인이 나를 올려다보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밥숟가락을 미련 없이 놔두고 집을 뛰쳐나왔던 그 때처럼, 헥헥대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겨우 들어 올려 김종인을 바라보았다. 김종인이 나를 멍하게 보고 있었다. 나와 같은 교복 차림. 학교에 있어야 할 녀석은 언제 땡땡이를 친 건지 이곳에 있다. 벌점 받겠다. 다만 이 상황에서 신경 써야 할 주제는 그게 아니었다.


“나, 졸업하면……”


제발, 더 이상 말하지 마. 나는 꿈을 못 이뤄도 너는 어떻게 서든 이뤄야 해.


“면사무소에서 일하게 됐어. 큰아빠가 거기서 일하셔서…… 낙하산 확정이래.”


아아, 청춘이 무너진다. 의지할 곳 하나 없어 미련처럼 잡아두고 있던 끈 하나가 스르르, 힘없이 풀려지는 느낌이다. 아니, 어쩌면 예전부터 이미 풀려 있었다는 듯이. 이미 가정화된 현실이었다.


더 이상 되돌릴 수도 없었다. 나는 힘없는 고등학생이었으며, 그것은 김종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의 우상이자 첫사랑이 무너진다. 이 모습을 두 눈으로 바라볼 순 없다. 김종인은 지현이와 헤어졌던 그 때처럼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서 서럽게 울었다. 나는 죽었다 태어나도 절대로 울릴 수 없을 소중한 사람을, 다른 이들은 너무나도 쉽게 울리고 아프게 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울고 있는 김종인의 등을 말없이 토닥여 주다가, 이내 껴안기 위해 팔을 벌렸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진짜로 안지는 않았다. 감히 껴안을 수도 없을 만큼 내게는 너무나 조심스러운 김종인이라서 말이다. 벌렸던 팔을 남모르게 거뒀다.


언제나 녀석의 무대로 쓰이던 단 하나뿐인 공간이던 공원이, 그 때는 그렇게 눈물로 적셔 들어갔다. 스타 김종인은 제 하나뿐인 팬 앞에서 서러움을 폭발해대며 울었다. 눈물방울 하나하나가 내 잘못인 것만 같다. 괜히 다 미안했다. 이게 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 것일까. 그런 거라면 감히 이런 말을 하고 싶다. 개나 줘라, 라고.


열아홉 봄날은 그렇게 흘렀다. 라일락 향기가 물씬 풍겼어야 할 그 시기에 김종인은 꿈 앞에서 좌절했고, 그리고 몇 달을 앓았다. 그래서 나도 같이 앓아주고 싶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대학 입시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문제집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김종인은 더 이상 학교에 나올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출석만 간신히 한 뒤 조퇴증을 끊고 제 친구들과 PC방이나 노래방에를 갔다. 어차피 졸업 후 면사무소에 취직해야 하는 운명을 가졌는데,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못 느꼈던 게 분명했다. 그에 반해 나는 물에서 막 빠져 나온 생선처럼 허우적거리며 아등바등한 삶을 등에 업어야 했고.


수능은 금방 끝났다. 평생 걸어야 할 것 같던 시기도 허무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나는 모의고사때보다 더 좋은 등급을 얻어냈다. 탐구 과목 하나 빼고 모두 1등급이면, 서울 소재의 대학에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거라는 것이 선생님의 말이었다. 그렇게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서울의 모 대학 의예과에 덜컥 합격을 했다. 놀라움이랄 것도 없었다. 나라는 놈은 전부터 잘하는 거라곤 노력으로 얻은 공부가 전부였고, 아이들은 뭐, 쟤가 대학이라도 잘 가야지 안 그러면 자랑이 있긴 하냐, 라는 식으로 반응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였고. 내게 아마도 대학은 아둔한 나를 조금이나마 치장해줄 소품으로밖에 비춰지지 않을 것이었다.


김종인과 나는 오랜만에 그 공원에서 만났다. 대학 논술 시험을 준비한다고 요 근래 바빴던 나와 간만의 만남이었다. 그것도 이 공원에서 말이다. 언제는 녀석을 평생 지지해 줄 것같이 굴던 유일한 무대가, 이제는 그냥 전의 허허벌판으로 변해 있었다. 물론 내게는 김종인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화려한 무대임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대학 붙어서 좋겠다?”


김종인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그냥 웃었다. 이제는 뮤지컬에 아무런 미련이 없어 보이는 면사무소 예비 직원 김종인이 내게 말했다.


“잘 다녀라. 힘들다고 찡찡대지 말고.”


그 말투에는 서운함이 녹아 있다. 그래도 우리 함께 한 세월이 10년이라고, 녀석도 졸업하면 헤어진다는 게 아쉽기는 한가보다.


“방학 때 놀러 와라. 형이랑 소주 한 잔. 오케이?”


김종인이 손으로 소주를 마시는 흉내를 내며 말한다. 그러면 나는,


“형은 무슨.”


라고 싱거운 대답을 내놓을 뿐이다.


처음의 만남은 비등했으나 이제는 나보다 훌쩍 더 커져서 고개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내 첫사랑은 그렇게 저물어져 갔다. 한없이 바라보면 결국 언젠가는 실명이 되지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을 낳았던 동경의 대상이 이제는 평범한 직원이 되어서, 그냥 그렇게 희극 같은 비극의 인생을, 그래, 나뿐만이 아니라 김종인도 비극이구나, 비극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상처가 안 된다면 묻고 싶다. 뮤지컬은 이제 정말 포기한 거야? 난 너를 평생 응원할 자신이 있는데.


남들은 다 너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시선을 돌려도 나는 언제든지 너를 믿고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 누구는 이반의 사랑이라 욕하지만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어느 무엇보다 더 깊고 신중했던 내 감정은 이젠 팬으로서의 빛도 잃어버렸다. 나는 누구를 탓해야 할까. 어른들을 탓해야 할까? 하지만 이제는 나도 어른인걸. 그건 나를 탓하는 것과도 같아. 힘없는 웃음이 난다. 내 소중했던 소년기는 그렇게 지나는 것 같았다.

 

 

 

 

 

 


“어디 갔다 왔어?”


자전거를 끌고 마당에 들어오는 나를 보며 중학교 교복을 입은 승희가 물었다. 귀뚜라미 소리를 배경음 삼아 저녁노을을 좀 먹은 논을 구경하며 옛날 첫사랑 생각좀 했다, 라고 대답하기엔 조금 창피하다 싶어서 그냥 바람 쐬고 왔다 대꾸했다. 그러자 승희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왕 올 거면 아이스크림도 사고 오지, 그냥 빈손으로 오냐.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나중에 오빠가 서울에서 비싼 거 사줄게. 승희를 달래는 설탕발림을 뱉었다. 그러자 승희가 정말? 하며 환하게 웃었다.


자전거를 세워다 놓고 집에 들어가기 위해 마루에서 신발을 벗던 참이었다. 오빠, 오빠한테서 편지가 왔어. 그 말에 나는 시선은 여전히 신발에 둬놓고서 줘 봐, 했다. 그러자 승희가 내게 편지를 건넸다. 나는 그 봉투를 잡고서 글자를 읽어 본다. 단조로운 봉투. 받는 사람은 강원도 홍천군의 이태민, 보내는 사람은…… 육군 제 1003 부대의 김종인 이병.


김종인, 라는 그 세 글자에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정말 첫사랑이라는 게 무덤까지 가기는 하나보다. 침이 꿀꺽 넘어가고 손끝이 떨린다. 언젠가 내가 죄악이라고 생각했던 청춘의 한 조각이 여전히 기분 좋은 설레임으로 나를 끌어들이고 있다. 나는 봉투를 찢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편지지를 꺼내 펼쳐 보았다. 무척이나 익숙한 글씨체가 펼쳐졌다.

 

「오랜만이다. 뜬금없이 웬 편지냐고 하겠지. 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군대에 왔고 지금 열심히 이병으로서 살아가는 중이다. 너는 학업 때문에 군대를 미뤄뒀다고 들었는데, 이왕이면 빨리 와라. 군대 늦게 가면 후회한다. 나이도 어린 선임한테 까이고 울고 싶어?」

 

푸핫. 웃음이 나온다. 그대로다. 그 장난스러운 말투도, 생각보다 단정한 글씨체도, 모든 게 추억처럼 되감긴다.

 

아마 궁금했을 거야. 아무렇지 않게 면사무소에 덤덤히 취직하던 내가 말이야. 뮤지컬을 한다고 큰 소리 빵빵 치고 다니더니, 결국 시골에서 일이나 하고 있으니. 사실 너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뮤지컬을 한다던 건 김종인을 스쳐지나가던 한낱 욕망에 불과했나. 그렇지 않아. 나는 아직도 뮤지컬을 하고 싶다. 취직하고 처음으로 맞았던 회식 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다가, 너와 다른 사람들의 싸늘한 반응에 내 노래 실력이 정말 최악이구나, 좀 늦게 깨닫기는 했지만.」

 

실은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때라던데, 아무튼 지금이라도 알아채서 다행이었다. 물론 녀석이 뮤지컬 배우를 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생각하는 건 아니고, 그래도 전부터 그랬듯이 현실은 냉정하니까 말이다.


일상의 모든 건 영화같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우리네 일상. 내 인생도 비극이었으나 아직 다 살아보지 못 한 이상 그렇다고 확신할 순 없는 법이었다. 나는 20대 초반인걸. 앞길은 창창하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이 했던 대사처럼 인생을 좌우할 선택 길에 서서 맥없이 지쳐가던 우리도, 그래도 결국엔 그 시련을 이겨냈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나, 대학 가기로 결심했다.」

 

지금, 비장한 글씨체의 김종인처럼.

 

제대하면 바로 서울에 갈 거야. 그리고 연기 학원을 다닐 거고. 한 번 뿐인 인생, 나 하고 싶은 거 하나쯤은 이뤄둬야겠다고 생각했어. 뮤지컬 쪽으로 가기엔 내 노래가 좀 듣기 흉하니까 아쉽지만 그건 포기하기로 했어. 포기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거든. 안 되는 건 붙잡아봤자 평생 이루어지지 않아.」

 

김종인에게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노래였고, 나에게는 김종인이었다. 그건 지금도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었다.

 

연극영화과에 가기로 했어. 응원해줘.」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언제나 너를 응원할 것이다. 와중에 뭔가가 내 정수리를 적신다. 편지를 읽다 말고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오고 있었다. 이전에는 내 마음을 눈물이 적셨다면, 이제는 비가 적시고 있다. 지극히 현실적이다. 더 이상 눈물에 울고 웃을 나는 없다. 비극 속에 갇힌 이태민은 없다는 것이다.


승희가 집 안에서 뛰쳐나왔다. 비 온다! 엄마! 빨래 어떡해! 그러자 빨래를 걷으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웅웅 울려 퍼진다. 승희가 맨 발로 마당에 뛰쳐나가 빨랫줄에 걸려있던 옷감들을 열심히 거두었다. 나는 시선을 다시 편지로 박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승희가 오빠, 좀 도와주지 뭐 해! 라고 큰 소리를 내서 그것도 그만 두었다. 머쓱해진 얼굴로 자리서 일어나 알았어, 하며 편지를 봉투에 급히 넣었다. 그리고 집 안에 넣은 뒤 오빠 된 도리로 승희를 도와 옷감들을 거두었다.


그 순간 비가 멈추었다. 승희가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이게 뭐야! 하며 허탈하게 소리쳤다. 하늘은 언제 저가 비를 내려댔냐는 듯 구름을 거두고 햇빛을 비추었다. 하늘이 환하게 다시 저녁노을을 내뱉었다. 승희도, 나도, 주황빛에 얼룩져간다. 귀뚜라미소리가 온 동네를 기분 좋게 울린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 입 꼬리를 올렸다. 여전히 가슴은 시리다. 나는 아직도 시작과 끝이 존재할 수 없는 그 감정을 잊지 못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From.1호 팬을 소중하게 여기는 스타가」

 

다시 ‘1호’ 팬이라는 독립적인 명칭으로 빛을 찾게 된 나의 첫사랑이, 그래도 존재의 이유는 있구나, 싶어서였다. 꼭 그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마음은 아팠지만 그래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나의 소년기가 말이다.


그렇게 나는 한참동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개가 아플 법도 했으나 이상하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키가 큰 김종인을 보기 위해 수도 없이 고개를 올렸던 세월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의 사랑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너로 하여금 깨닫는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애써 웃음지어 보여도 나는 알고 있어. 때로 너는 남들 몰래 울곤 하겠지. 특별할 것 없는 나에게도 마법 같은 사건이 필요해. 울지 않고 매일 꿈꾸기 위해서. 언젠가의 그날이 오면, Oh let me smile again in the sun. 내보일 것 하나 없는 나의 인생에도 용기는 필요해. 지지 않고 매일 살아남아 내일 다시 걷기 위해서. 나는 알고 있어, 너도 나와 똑같다는 것을. 주저앉지 않기 위해 너도 하늘을 보잖아. 언젠가의 그날을 향해. I see the light shining in your eyes.

-자우림, 팬이야 中-

 

 

 

 


백도여신

팔백이십육만년전에 혼자 쓰고 꿍쳐뒀던 글이에요

쓸데없이 겁나 기네요...후...후!!!!!!!!!!!!!!!!!!!!!! (숨을 몰아 쉰다)

글이 길어서 포인트도 쫌...많이..설정해뒀습니다..^^...(욕먹을까봐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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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와...
금손이셔라ㅠㅠ 너무 좋아요 ㅠㅠㅠ
예쁜 글이네요ㅠㅠㅠㅠㅠ

11년 전
독자2
헐 ㅠㅠㅠㅠㅠㅠㅠ잘보고가요ㅠㅠㅠㅠ
11년 전
독자3
왠지 아련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근데 둘다 예쁘네여 ㅠㅠㅠㅠㅠㅠㅠ힐링글 ㅠㅠㅠㅠㅠㅜㅠㅠㅠ
11년 전
독자4
으어 ㅠㅠㅠ 진짜 완전 몰입햐서 읽엇어요 ㅠㅠㅠ 아진따 와넌 아련아련하네요ㅠㅠㅠㅠ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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