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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눈이 떠지지 않기를 마음속 깊이 바라며 서서히 눈을 떴다. 또 실패인가. 한숨을 내쉬며 습관처럼 목을 더듬고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내 목에는 밧줄이 고리가 되어 매어져 있고, 끊어진 밧줄이 천장에 매달려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열일곱 번째 자살이다. 아니, 열일곱 번째 자살 시도라고 정정하겠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탁상 위에 놓여있는 달력을 보았다. 달력에는 동그라미가 세 개 그려져 있다. 다만, 두 개의 동그라미에는 엑스가 쳐져 있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다 목에 매달린 밧줄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져 감긴 밧줄을 위로 빼내려고 해보았다. 하지만 턱에 걸린다. 젠장. 분명 처음 매달릴 때에는 내 얼굴이 충분히 들어갈 사이즈였는데 지금은 왜 빠지지 않는 걸까. 

당장 빼내기를 포기하며 우선 몸부터 일으키기로 했다. 몸을 일으키다 발에 넘어진 의자가 부딪힌다. 아마 내가 목을 매달기 위해 밟고 서있던 의자일 것이다. 

삭신이 쑤신다. 마치 잔뜩 두들겨 맞은 듯한 느낌이다. 몸살이 난 듯 온몸이 쑤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몸에 힘을 주는 게 몇 배는 힘들다. 몸을 일으키는 시간이 천금 같은 기분.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는 달력을 향해 한 걸음씩 옮긴다. 

간신히 탁상 앞에 도달한 나는 달력 옆에 있는 붉은색 색연필로 23일에 그려진 세 번째 동그라미에 엑스를 친다. 그런 다음 색연필을 탁상에 살며시 내려놓던 와중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휘갈겨 쓴 듯한 쪽지를 발견했다. 


'너는 내게 가장 필요한 걸 가지고 있어. 네가 죽는 것은 바라지 않아, 친구.


빨간색 색연필로 써진 쪽지. 내게는 익숙한 서체이다. 그 글을 보자마자 깨달은 것은 내 룸메이트가 오늘의 자살 시도도 막아냈다는 점이다. 

서너 달 전부터 나는 몇 번이나 죽기를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내 룸메이트가 나타나 내 죽음을 막고는 했다. 이건 우리에겐 게임과 같았다. 우리는 룰을 정했고, 그에 맞춰 자살 게임을 해나간다. 

그 룰은 단순한 네 가지다. 


하나, 나는 자살을 일주일―월요일에서 일요일까지―에 한 번만 시도하며 이 집의 반경 5m 이내에서만 하도록 한다. 

둘, 룸메이트는 나의 자살을 막을 권리가 있다. 

셋, 나와 룸메이트는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 

넷, 이 일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룸메이트와 나 사이에 정한 이 네 가지 규칙만 지킨다면 우리는 서로가 무엇을 하든지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 둘은 서로를 맘에 들어 하지는 않았지만, 이 규칙들만큼은 반드시 준수하며 살고 있다. 

이 규칙들은 우리가 서로를 최소한이라도 존중하고 있다는 상징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사정상 우리가 한 집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만 그건 별개로 치도록 하자. 

어찌 되었든 내가 눈을 떴을 때에는 아마 밧줄이 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끊어졌나 싶었는데 이 쪽지를 보니 내가 매달려 숨이 경각에 달하던 그때, 룸메이트가 날 발견하고 밧줄을 끊어버렸나 보다. 밧줄을 끊고는 다시 사라진 거겠지. 

나는 쪽지를 바라보다 잠시 고개를 저으며 방을 둘러보았다. 아까부터 계속 거슬리는 이 밧줄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렇게 주변을 계속 둘러보다 갑자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입 속이 매우 메말라있다는 사실이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갈증이 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난 계속 한없이 목말랐을 텐데 어째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나는 부엌으로 걸음을 옮긴다. 걸음 자체는 느리지만 처음 몸을 일으킬 때보다는 몸이 무척이나 가벼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기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부엌을 가자마자 냉장고를 열었다. 냉기와 함께 무언가가 묵혀있는 듯한 냄새가 코를 약하게 자극한다. 나는 망설임 없이 눈앞의 생수병을 꺼내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곧바로 싱크대 위에 놓인 머그컵을 잡고는 컵에 물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어차피 죽으려고 하면서도 물은 챙겨 먹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피식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죽고 싶다. 하지만 고통은 싫다. 무의식중에 망설여 실수를 해버리고 고통을 겪으며 간신히 살아남느니 벗어나려 발버둥 치더라도 한순간에 끝나는 그런 죽음을 원한다. 나는 어째서 그렇게 죽지 못하는 걸까? 괜스레 씁쓸해졌다. 살고 싶어도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죽고 싶어도 살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는 법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발 밑이 축축함을 느낀다. 잡생각에 실수로 컵에 물이 넘쳐버렸다. 일단 물을 그대로 쭉 들이키고는 머그컵을 싱크대에 내려놓고 행주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순간 가위가 눈에 보인다. '그래, 밧줄은 저걸로 자르면 되겠구나.' 싶은 마음에 물에 젖은 바닥에 행주를 놓고는 가위를 쥐었다. 

그리고 가위를 목에 가져다 대고는 밧줄을 자르려고 힘을 주던 와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내 목으로 조금만 힘을 주면 정말로 죽을 수 있을 텐데. 

고통은 싫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간절히 죽고 싶음에도 죽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하지? 한 번 해볼까? 정말 편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고통이 짧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끝이 나고 곧바로 영원한 평화가 올 것이다. 그토록 바라오던 안식이. 하지만 찔리고도 죽지 못한다면? 죽지도 못한 채 그 고통으로 누군가가 구해줄 그 순간까지 몸부림치게 된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하지만 아직 이런 식의 죽음은 시도해본 적이 없다.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지 않을까? 순간 호흡이 가빠짐을 느낀다. 손이 가볍게 떨려온다. 결국 알고 있다. 나에게 자살이란 마약과 같다. 이제 그만 편해지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무언가 포근하고 푹신한 느낌이 든다. 분명 나는 부엌에 있었을 텐데, 이런 기분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은 결국엔 죽은 걸까? 

가위를 들고 목을 향한 채 손에 힘을 준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정말 아무 고통도 없이 이렇게 죽은 건가.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칠흑 같은 암흑만이 존재하길 바라면서.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내가 눈앞에 마주 본 것은 다름 아닌 내 방 천장이었다. 

뭐지? 왜 내가 여기에 있지? 분명 나는 죽으려고 했을 텐데? 나는 손을 들어 올려 목을 어루만지려고 했다. 그런데 주먹을 쥔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마자 내가 주먹 안에 뭔가를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선은 이게 뭔지부터 봐야 할 것 같아 살며시 주먹 안을 열어보자, 그 안에 있던 것은 웬 구겨진 종이다. 

나는 그 종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신경 쓰며 조심스레 폈다. 거진 내 얼굴만큼 큰 종이. 내가 종이를 펴자마자 마주 본 건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종이의 단면이었지만, 피던 중에 무언가 써져는 있음을 확인했었기에 황급히 종이를 뒤집었다. 

그리고 내가 보게 된 건 붉은 색연필로 쓰인 누군가의 글씨. 


'넌 약속을 어겼어, 배신자 친구.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 글씨가 누군가의 글씨인지는 두말할 것 없이 확실하다. 잔뜩 휘갈겨 쓴 서체는 무언가 난폭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마도 내가 일주일에―물론 굳이 세세하게 따지자면 하루에― 두 번의 자살을 한 것이 룸메이트를 잔뜩 화나게 한 듯하다. 

난 몸을 서서히 일으켜 앉았다. 내가 먼저 룰을 어겼으니 룸메이트도 룰을 어길 것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겐 손해 볼 게 없었다. 룸메이트가 룰을 어김으로써 나에게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날 해치는 것이 다일 터. 하지만 난 죽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이다. 그게 나에게 손해가 될 리가 없지 않은가. 

난 종이를 다시 구기고는 방 구석에 던졌다. 그리고는 목을 어루만졌다. 목에는 상처 하나 없다. 대체 왜 난 늘 죽지 못하는 걸까. 분명 가위는 내 목 앞에 있었는데 어째서 실패한 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소용없었다. 그리고 룸메이트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나올지도 꽤나 걱정되는 상황이다. 물론 날 죽이지는 않겠지만, 내 몸이 죽지 않는 선 안에서 내게 어떠한 해를 입힐지는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그는 그동안 열여덟 번의 자살 시도를 막아낸 사람이다. 나에게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몸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아직 그가 나에게 해코지한 듯한 흔적은 없다. 나는 조심스레 방을 나서 거실을 둘러보며 아까랑 달라진 점을 찾았다. 우선 천장에 달린 밧줄이 없어졌다. 밧줄 밑에 쓰러져있던 의자 역시. 

나는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 역시 거실과 같다. 머그컵과 행주와 가위 역시 각자 제자리에 돌아가 있고, 생수병은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냉장고의 원래 자리에 들어가 있으리라. 

생각해보니 거실과 부엌에는 아까와 달리 불이 켜져 있었다. 창문 밖이 어둑한 걸 보니 아마 어느새 저녁인가 보다. 몇 시간이나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머리가 개운한 걸 보니 꽤 오랜 시간을 잔 듯했다. 오전에 목을 매달았는데 어느새 저녁이라니 하루가 참 빠르다. 

그 순간 배에서 꼬르륵하고 소리를 낸다. 돌이켜보니 오늘 한 끼도 먹은 적이 없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밥솥을 열었다. 텅 비어있다. 순간 약간 짜증이 치밀었다.

그러다가도 참 나란 놈은 죽겠다고 발버둥 치면서 사는데 필요한 건 다 찾는구나 싶어 기분이 묘해진다. 하지만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하지 않는가. 

늘 그렇듯이 냄비를 꺼내 물을 받는다. 물을 어느 정도 채우자마자 곧바로 가스레인지를 켜고 냄비를 가스불에 올렸다. 그리고 찬장에서 라면을 꺼낸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죽고 싶다. 그냥 오늘 한 번 더 죽어볼까. 대체 어떻게 죽으면 좋을까. 이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마자 나는 가스불을 껐다. 

죽자. 그냥 또 죽어보자. 설마 한 번 더 이럴 줄은 모를 터이다. 나는 라면을 다시 찬장에 넣었다. 이번에는 룸메이트가 막지 못하도록 확실히 죽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죽음을 시도하면 돌이킬 수 없는 방법이 곧바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건물 옥상에서 떨어진다면? 룸메이트가 슈퍼맨이라도 되지 않는 한, 만유인력이 날 죽음으로 인도해줄 것이다. 나는 곧바로 현관을 나섰다. 그리고는 계단을 오른다. 

이제 정말 끝이야. 편해질 수 있어. 

이 생각이 끊임없이 머리를 맴돈다. 드디어 쉴 수 있다. 뛰는 심장도, 산소를 받아들이는 폐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떠올리는 이 뇌도 모두가 멈춘다. 그리고 무언가를 내뱉던 입도, 무언가를 바라보던 눈도, 누군가의 손을 잡았던 이 손도 모두 차갑게 식어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릴 것이다. 무척이나 행복하다. 이제 정말 끝이야. 편해질 수 있어. 한없이 되뇌다 보니 어느새 옥상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가장자리로 걸어간다. 그리고 내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담을 밟고 선다. 밑에 아무도 없어야 한다. 깔끔하게 혼자 떠나는 게 좋으니까. 다행히 아래의 골목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앞을 바라봤다. 눈앞을 가득 채우는 야경.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아등바등 거리며 발버둥 치는 사람들. 멍청한 자들. 죽으면 모든 게 편해지는 것임을 모르는 바보들이다. 난 먼저 쉴 거야. 이제 정말 끝이야. 편해질 수 있어.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고 있다. 최대한 움직이지 않은 채 주변을 살핀다. 아직 일어날 때가 아닐 텐데 눈을 뜨다니, 친구가 약속을 어긴 건가? 

우선 나는 눈알을 최대한 굴리며 상황을 살폈다. 우선 내 양손은 내 목 앞에 고정되어 있다. 내 손은 가위를 꼭 쥐고 있고, 칼날은 나 자신의 목을 향해 있다. 나는 가위를 살며시 내려두고는 목을 만져보았다. 목에 감긴 밧줄이 거슬리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상처는 전혀 나지 않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선 발아래를 흥건히 적시고 있는 물과 열린 채로 식탁에 얹어진 생수병, 식탁 너머로 거실에 매달려있는 밧줄과 쓰러진 의자. 아무리 봐도 저번에 날 깨운지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다. 순간 갑자기 화가 치민다. 분명 나와 자살은 한 주에 한 번만 시도하기로 했을 텐데. 참 예의 없는 친구가 아닌가.

우선 화를 가라앉혀야겠다. 잠시 식탁 의자에 앉아 조용히 심호흡을 한다. 점차 심박수가 느려져 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서는 안되겠지. 경고는 해 줄 필요성이 있는 것 같다. 아까 목을 매 죽으려고 했을 때에는 정말 살아나지 못할 뻔했다. 발버둥 치던 와중에 밧줄이 끊어지지 않았더라면, 정말 상상도 하기 싫다. 난 진저리 치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참 골칫덩어리 친구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몸이 한 몸이다 보니 함부로 죽일 수도 없다. 

친구가 눈을 뜨고 있을 때는 내가 잠이 든다. 내가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친구가 잠이 든 상태란 뜻이다. 친구가 평소처럼 잠이 들 때에는 내가 잠에서 깨어나듯 자연스레 눈이 떠지기 마련인데, 친구가 자살시도를 하는 경우는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 나는 그럴 때마다 무지막지한 악몽을 꾸다 깨어난 사람처럼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엄청난 심장 박동을 느끼며 무언가가 내 목숨을 노리는 상황을 맞이해야 한다. 그런 경험은 아무리 해봐도 기분이 참 뭣같다. 대부분은 상처 하나 없이 끝났었지만 개중에 정말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일이 하루에 두 번이나? 이건 조약 위반이다. 서로의 신뢰에 대한 가장 비열한 배신이자 도발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확실히 경고를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사실 그 외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탓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봐온 친구의 모습으로는 아마 경고만으로도 찔끔하여 얌전해질 것이다. 

나는 우선 일어나 지저분한 집을 정리하기로 한다. 행주로 물기를 닦고, 머그컵은 씻어서 다시 제자리에 두고 생수병은 넣었다. 그리고 가위를 다시 집어 들어 목에 감긴 밧줄을 천천히 잘라나간다. 까딱 실수해서 우리의 소중한 몸에 상처가 나는 일은 없어야 할 테니 아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그렇게 한참을 낑낑거리다 밧줄을 간신히 잘라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줄이 생각보다 두꺼웠기에 자르는 데만 십 분 가까이 걸린 것 같다. 

어디 보자, 그럼 이제 정리해야 하는 게 저 거실의 밧줄과 의자인가? 나는 의자를 밟고 올라가 밧줄을 풀어버리고 의자를 부엌으로 가져다 놨다. 그리고 밧줄은 부엌의 쓰레기통에 대충 처박아두고 달력이 있던 탁상으로 갔다. 달력 옆의 메모장에 내가 쓴 글씨가 보인다. 나는 그 메모 아래의 깨끗한 종이를 뜯었다. 

뭐라고 써주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 친구가 자신의 그릇된 행동을 멈출까. 이렇게 생각하던 와중에 서서히 잠이 몰려옴이 느껴진다. 본래 몸의 주도권이 없던 상태인데 이런 식으로 깨어나게 된 탓이다. 잠에 다시 빠져들기 전에 해야 할 일을 다 끝 맞춰야 한다. 그냥 아무렇게나 쓰고 빨리 누워야겠다. 잠이 들기 전에 해야 할 일도 있으니까. 

붉은 색연필을 들고 종이에 '넌 약속을 어겼어, 배신자 친구.'라고 휘갈겨 쓴다. 그리고 종이를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구겨버린 다음에 오른손에 꼭 쥐었다. 어디서 잠이 들어야 할까. 부엌에 쓰러져 있는 게 자연스러울까? 아니다. 뜬금없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게 더 끔찍할 것이다. 나는 드러누웠다. 그리고 스스로 최면을 건다. 나는 잠에 빠져든다. 지금부터는 꿈이다. 현실이 아니다. 나는 잠에 빠져든다. 지금부터는 꿈이다. 현실이 아니다. 나는 잠에 빠져든다. 현실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고 있다. 무언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손에 닿는 무언가를 세게 붙잡았다. 최대한 움직이지 않은 채 주변을 살핀다. 차가운 공기가 내 볼을 스친다. 아직도 일어날 때가 아닌 거 같은데 눈을 뜨다니, 설마 친구가 또? 우선 나는 눈알을 최대한 굴리며 상황을 살폈다. 우선 발 밑이 아득하다.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내디디면 그대로 내 몸이 지면으로 처박힐 것이다. 이제는 추락사냐……. 이 와중에도 위안이 되는 게 있다면 내 손이 아직 난간을 꽉 붙잡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깨어나는 순간 손에 힘이 풀리려 했는데 난간을 놓치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하루에만 세 번째 자살 시도라니, 이 망할 놈의 친구가! 우선 나는 조심스레 몸을 돌리고 난간을 다시 넘어 옥상 바닥을 밟았다. 온몸에 식은땀이 가득하다. 정말 이게 무슨 일인가. 조용히 심호흡을 시작한다. 점차 심장이 뛰는 속도가 느려지고 몸의 떨림이 가라앉는다. 

이렇게 또 살아남았다. 다행이야, 내 몸을 지켜냈어. 

한참을 멍 때리다 보니 몸의 떨림이 다시 심해져 간다. 날씨가 상당히 추우니 우선은 집으로 내려가자.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어쩔 수 없다. 친구가 다음에 일어났을 때에는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오늘은 꼭 성공해야 할 텐데……. 

나는 계단을 통해 내 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그동안 해왔던 연습을 떠올렸다. 친구가 처음 자살을 시도했던 그날로부터 며칠 뒤부터 나는 '그 일'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100일이 넘는 나날 동안. 난 그 오랜 기간 동안 몇 번이나 친구가 나와 의식을 뒤바꾸는 모습을 봐왔고, 몇 번이나 친구가 자는 동안 친구의 꿈에 함께 들어가 그를 직접 관찰했다. '그 일'. 다름 아닌 '자각몽'으로 말이다. 

직접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 무의식이라는 녀석은 제법 재밌는 방식으로 돌아간다. 

우선 이 몸의 주도권은 자연스러운 생체 리듬에 따른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평균적으로 약 12시간씩을 담당하며 살아가고 있고, 주도권이 없는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금한다―친구가 자살하려고 했던 것처럼 위급한 상황에서는 예외이다. 아마 무의식적 방어 기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둘 다 무의식이거나, 둘 다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주도권을 가진 사람이 우선이다. 

즉, 두 의식이 동시에 깨어 있고 현실을 인식하고 있더라도, 본래 주도권을 가진 인격이 보다 더 우성으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이건 반대로 두 의식이 모두 잠들어 있을 때도 마찬가지. 

친구. 우리가 마주 보고 얘기를 나눌 그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다시는 그가 자살 시도를 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이 몸을 다치게 하는 일 따위는 없도록. 

내려오는 계단과 복도는 아주 고요했다. 그때, 꼬르륵 소리가 났다. 고요한 이곳을 가득 채울 정도의 소리로.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무척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나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바로 밥솥을 열어보았다. 텅 비어있군. 밥부터 해야 하나? 뭐 시켜 먹을까? 잠시 고민하던 중, 물이 받아진 냄비가 보인다. 집에 라면이 있나 보다. 나는 평소 라면을 넣어두는 찬장을 열어보았다. 빙고! 그런데 물이 받아져 있는 냄비를 볼 때, 친구가 라면을 먹으려고 했나 본데 왜 먹지 않은 걸까? 의문이 든다. 나는 가스불을 켜고 라면 봉지를 뜯은 다음 스프를 꺼내 흔들었다. 스프를 넣고자 하던 와중에 문득 묘한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여기에 독이라도 탄 건 아니겠지?' 설마. 친구의 성격을 볼 때 아마 독을 구했다면 그냥 그걸 그대로 마셨으면 마셨지, 옥상에서 뛰어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 불안한 기분이 들어 냄비의 물을 싱크대에 부어버리고, 한번 깨끗하게 헹군 다음 다시 물을 받기로 한다. 그렇게 가스불 위에 올린 냄비에 스프를 털어 넣은 나는 뭔가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큰일을 하려면 든든하게 먹어둬야 하는 법.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먹는데 집중하자. 친구, 조금만 기다려. 곧 만나러 갈게. 그렇게 나는 냄비에 면발을 털어 넣었다.




 하늘을 날고 있다. 화려한 야경이 가득한 이 넓디넓은 도시에는 아무도 없다. 당연하다. 마냥 즐겁다. 할 일이라곤 바람을 가르며 나는 것뿐이니까. 이곳은 혼자만의 도시. 행복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계속 날 수 있어서.




 나는 침대에 차분하게 누웠다. 갑자기 일어났음에도 피곤하지 않은 걸 보니 이제 주도권은 친구가 아닌 나에게로 넘어온 듯하다. 그럼, 친구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스스로 최면을 건다. 나는 잠에 빠져든다. 지금부터는 꿈이다. 현실이 아니다. 나는 잠에 빠져든다. 현실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얼마나 날아다녔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냥 행복만이 가득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하늘 위를 날고 있는데 누가 내 어깨를 잡는단 말인가? 나는 휙 하고 뒤돌아 얼굴을 확인했다. 그건, 나였다.

 "안녕, 친구? 꿈은 재밌게 즐기고 계신가?"

 내가 환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아니. 내가 아니다, 저건.

 "……룸메이트?"

 그래, 룸메이트. 그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꿈속? 내 꿈인 건가? 어떻게 내가 날고 있던 거지? 룸메이트는 내 꿈에 왜 나온 거고? 갑자기 하늘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해 주변을 마구 둘러보았다. 하늘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세상이 칠흑 같은 암흑으로 가득 찼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으나, 룸메이트가 내 어깨를 세게 붙잡고 있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뭐야 대체. 내 꿈인데 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지?

 "내가 널 만나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지 모를 거야."

 룸메이트가 날 보며 얘기했다. 그의 표정은 환하게 웃는 것을 넘어서 기괴한듯한 느낌을 주었다.

 "날… 왜?"

 목소리가 떨림을 막을 수 없다. 난 약속을 어겼다. 여기가 꿈 속이라면 그가 나한테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 몸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어떻게든 깨어나야 해……! 내가 계속 발버둥을 치자 룸메이트는 날 놓아버렸다. 그러자 내 몸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추락하다 몸이 점점 느려지더니 저절로 다시 떠오른다. 내 룸메이트는 그런 날 보며 살며시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소용없어. 지금은 나에게 주도권이 있어서 넌 허락 없이 깨어나지 못해."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얼굴을 뒤로 빼고 날 바라봤다.

 "너는 내 꿈이야. 난 현실이고."

 "허, 헛소리! 이건 그저 악몽에 불과해!"

 그가 고개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끄덕였다.

 "맞아. 우리는 서로의 꿈이야. 하지만 중요한 게 있어."

 갑자기 그가 내 배를 찔렀다. 그의 손에는 어느샌가 날카로운 칼이 들려있었다.

 "지금은 내가 현실이고, 네가 꿈이라는 거야."

 분명 아까는 칼이 없었는데? 나는 내 배를 보았다. 피가 왈칵 쏟아진다. 그런데 통증이 없다. 아니, 통증은 둘째치고 아무런 감각이 없다. 그저 꿈인가? 맞아. 난 다시 깨어날 거야. 그런데 몸에 힘이 점점 빠져나간다. 내 몸이 균형을 잃는 게 느껴진다. 어느새 이 어둠에 바닥이 생겼다. 나는 바닥에 철퍼덕하고 드러누웠다. 갑자기 눈물이 주륵 하고 흘러내린다. 

 "재밌는 거 알아?"

 난 입을 열고 싶었다. 하지만 힘이 없어서 입을 열 수 없다. 그가 날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최대한 온 힘을 다해 그가 있는 쪽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는 몸을 숙여 내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꿈은 현실을 넘어서지 못해, 친구."

 그는 몸을 일으켰다. 점점 시야가 흐려진다. 머릿속에 구멍이 뚫린 듯이 생각이 빠져나간다. 이렇게 끝이야? 나 정말 죽는 거야? 내가 원했던 게 이런 거야? 정말? 진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옴을 느끼며 그의 마지막 음성이 들린다.

 "잘 자게, 내 유일한 친구."

 나는 눈을 감았다.




 늦은 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꿈은 죽었다. 열아홉 번의 죽음을 거쳐 날 만나 진정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곳은 꿈이 아닌 현실. 이제는 편안하게 잘 수 있을까 했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꿈을 지워버렸기 때문일까. 아마 다시는 잠들지 못하겠지. 그때, 괘종시계가 울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 …, 열두 번. 생각해보니 오늘이 내 스무 번째 생일이구나. 생일 선물로 꿈을 버리고 원하는 것을 얻었다. 원하는 바를 얻었음에 불구하고 앞으로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는 시선을 돌려 암흑으로 가득 차있는 창밖을 보았다. 친구도 나와 함께 오늘 생일이었겠지.

 "축하해."

 작게 중얼거렸다. 축하해, 친구. 생일 축하해. 내 유일했던 친구. 


=============

처음 올려보네요! 어떻게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지만, 한 분이라도 즐거이 보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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